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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공화국 República luminosa (2017)

  • 저자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 역자 엄지영
  • ISBN 979-11-6790-081-4 (03870)
  • 출간일 2021년 12월 29일
  • 사양 264쪽 | 124*195
  • 정가 14,000원

‘스페인 문학계의 신성’ 안드레스 바르바가 창조한
기묘한 열대 도시 이야기 혹은 21세기판 『파리대왕』
★2017년 스페인 에랄데상 수상작
★전 세계 22개 언어권 출간 화제작 · RT피처스 제작사 영상화 계약

산크리스토발에 도착하자 처음에는 모든 것이 꿈속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잠시 후, 다시 정신이 들자 가난에 찌든 처참한 현실이 별안간 눈앞에 밀어닥쳤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건만, 현실 속의 가난은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밀림이 곧 가난이라는 것을, 즉 가난과 하나가 되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지운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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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대상이 된 그 아이들, 거리의 신호등 사이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보이기 시작한 그 아이들, 해가 질 무렵이면 도시에서 종적을 감추고 에레 강변에서 무리 지어 자던 그 아이들 또한 우리 딸아이와 마찬가지로보통아이들과는 다르게어떤 물건도 당연히 자기들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어떤 물건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훔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일부러 그 말에 강조 표시를 했다. “오랫동안 우리가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기 때문에 결국 그런 문제가 터지고 만 거예요.” 얼마 전 나는 시청에 근무하는 동료 여자 직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강도’ ‘도둑놈그리고 살인자’.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던 그 말들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운명을 정하는 것인 반면,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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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아이들의 이런 행태를 유기체에서 세포들이 활동하는 모습과 견주기도 했다. 그 아이들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개체이지만, 그들의 삶은 벌집의 벌처럼 공화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완전히 흡수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이 실제로 단일한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면, 두뇌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벌집 같은 조직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대체 누가 여왕벌이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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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들은 내 주변에서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암흑이 두렵기는커녕 다정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평온해졌다. 마치 여자아이들에게 있는아니면 내 안에 있는그 무엇이 나를 들볶던 문제를 당장 해결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이유로든 이제 앞을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담요 같은 꿈속으로 점점 더 깊게 빠져들어 갔다. 그런데 그때 그 여자아이들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어린아이들의 보드라운 손길이 느껴졌다.

이제 앞을 봐요.” 아이들이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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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떤 책을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읽다가 우연히 떠올린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나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바다라는 말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실제 바다와 일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바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언제나 거품으로 뒤덮인 녹청색의 묘한 수면만을 떠올렸지, 진정 바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진정한 바다는 물고기들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 그리고무엇보다어둠으로 가득 찬 거대한 심연이다. 바다는 그야말로 암흑이 지배하는 왕국이다. 아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날, 산크리스토발 시민들은 밀림을 보면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현상이 갑자기 실체와 뒤섞여버린 듯한 느낌 말이다.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추어진 밀림으로 달아나면서 아이들은 우리의 마음도 함께 데리고 갔다. 우리는 마치 잠수정을 타고 심해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아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그들과 가까이 있었던 셈이다. 그들의 시선 깊숙한 곳으로,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두려움의 한복판으로 들어갔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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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을 뒤덮은 초록은 진정한 죽음의 빛깔이다. 흔히 생각하듯, 죽음은 하얀색도 검은색도 아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초록. 무언가를 간절히 갈망하는 듯, 불안하고 숨 막힐 듯 답답한 느낌이 들면서도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거대한 덩어리. 그 안에서 약자들이 강자들을 떠받치고 있는 반면, 거대한 것들은 작고 힘없는 것들로부터 빛을 빼앗는다. 거기서 거인들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미세한 것들뿐이다. 그런 밀림 속에서 32명의 아이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인간 고유의 저항력을 증명하며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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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기록은 지도와 비슷한 면이 많다. 한편으로 모두가 기억하는 집단적 사건이 마치 견고하면서도 화려한 빛깔의 대륙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는가 하면, 개인적 감정들 또한 바다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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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명의 아이들이 죽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나는 생물학 실험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유리병에 파리와 벌을 각각 여섯 마리씩 넣은 다음, 막힌 바닥을 창문 쪽으로 향하게 하고 병을 수평으로 눕혔다. 파리와 벌 중에서 누가 먼저 열린 입구로 달아나는지를 알기 위한 실험이었다. 실험 결과, 파리는 창문 반대 방향으로 달아난 반면, 벌들은 유리병 바닥에 계속 부딪히다 결국 모두 죽었다고 한다. 벌들은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출구가 있다는 믿음을 끝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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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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