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페이첵> <컨트롤러> 등의 원작자로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한 작가’로 평가받는 필립 K. 딕. 그의 걸작 장편만을 모아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총 12권 완간을 목표로 하는 ‘필립 K. 딕 걸작선’의 일곱 번째 주자로 『성스러운 침입』이 폴라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필립 K. 딕이 실제로 한 신비 체험을 토대로 말기에 집필한 ‘발리스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담을 토대로 하지만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발리스』에 비해 『성스러운 침입』은 종교적 SF의 이야기구조를 확실히 갖춘 새로운 이야기이다.
하느님은 기원 후 70년에 패배하여 지구 밖으로 쫓겨났으며, 지구는 벨리알이 지배하는 악의 지대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벨리알과 최후의 대결을 하여 지구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은 소행성에 살던 허브 애셔와 리비스 로미를 부모로 택하고, 예언자 일라이어스 테이트를 길잡이 삼아 지구로 돌아온다. 그러나 벨리알의 지배를 받는 지구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귀환을 막으려고 온갖 일을 꾸미고, 그들이 꾸민 사고 때문에 하느님의 화신 이매뉴얼은 열 살이 될 때까지 기억을 상실한 채 기억이 되살아날 계기를 기다린다.
『성스러운 침입』은 필립 K. 딕의 장편 중 드물게 가볍고 유쾌하며 풍자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방대한 신학적, 철학적 지식과 독자적인 세계관을 근간으로 한 깊이 있는 작품이며 미래를 배경으로 하여 신의 개념,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이 선택해야 할 길을 보여주는 우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독자들은 익숙한 이야기의 새로운 판본을 만들어내고, 수십 년 전에도 현재까지 의미를 가질 만한 인간형을 묘사한 대가의 진면목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변적인 『발리스』에 비하자면 『성스러운 침입』은 그 설정에서 정통 SF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역시 그 배경이 되는 세계관에 대한 장황하고 사변적인 설명이 종종 끼어든다는 점은 마치 옥에 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중략) 이런 불완전한 설명이 PKD의 의도인지 실수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점은 이 책에서 잠시 언급된 일부 내용 중에는 빙산의 일각처럼 더 깊고 방대한 내용을 밑에 숨기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중략) [이 작품의]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의미는 『주해서』의 (중략) 여러 대목을 참고해야만 비로소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발리스 3부작’의 세계관을 이루는 PKD의 신비 체험에 대한 해명이 바로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 박중서
■ 지은이 _ 필립 K. 딕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일생을 보냈다. 미숙아로 태어난 직후, 쌍둥이 누이를 잃는 등 불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안전강박증에 시달렸고 마약에 중독되었으며,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불안한 삶을 살았다. 1952년에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36편의 장편소설과 100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딕은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렸고, 죽기 몇 년 전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블레이드 러너>로 처음 영화화되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결국 198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원작소설들이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 <임포스터> <컨트롤러> 등의 영화로 재탄생하면서, 오늘날 딕은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딕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초능력과 로봇, 우주 여행, 외계인과 같은 기존의 SF 소재와는 차별된 암울한 미래상과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며 끊임없이 인간성의 본질을 추구해왔다. 1962년에 『높은 성의 사내』로 ‘휴고상’을, 1974년에 『흘러라, 내 눈물, 하고 경관은 말했다』로 ‘존 캠벨 기념상’을 수상했다.
1983년, 그의 이름을 딴 ‘필립 K. 딕 상’이 제정되었다.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출판사들에게 외면당했던 그의 삶을 기린 이 상은 페이퍼백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름은 없지만 가능성 있는 작가의 작품을 선정하는 ‘필립 K. 딕 상’의 첫 수상작은 바로 ‘사이버 펑크의 성경’으로 불리고 있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이다.
■ 옮긴이 _ 박중서
출판기획가 및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해바라기』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젠틀 매드니스』(공역) 『슈퍼내추럴 : 고대의 현자를 찾아서』 『거의 모든 스파이의 역사』 『런던 자연사 박물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나무가 숲으로 가는 길』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발리스』 등이 있다.
■ 줄거리
소행성에서 여가수 린다 폭스의 음악을 듣는 것만을 낙으로 여기며 살던 허브 애셔는 갑작스럽게 이웃 돔의 환자 리비스 로미를 돌봐주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게다가 예언자 일라이어스까지 찾아와 리비스가 처녀임에도 임신한 상태이며 리비스의 태에 든 것이 하느님이라고 밝히고, 허브를 졸지에 하느님의 아버지로 만든다. 세 사람의 임무는 지구에서 패배해 쫓겨난 하느님을 태아로 품고, 벨리알이 지배하는 악의 지대인 지구로 돌아가는 것. 온갖 난관과 장애물을 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기고 지구에 도착한 직후 허브와 리비스는 공중 충돌 사고를 당하고 만다. 리비스는 죽었지만 아이는 살고, 허브는 10년 동안이나 냉동 대기 상태로 이전의 기억을 꿈꾸다 일어나 기억과 권능이 돌아오지 않은 아들 이매뉴얼과 처음으로 만난다. 이매뉴얼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자기의 본질을 기억해내고자 하고, 특수학교에서 만난 지나는 이매뉴얼의 기억을 되살려내길 돕겠다고 하지만, 자신의 정체는 드러내지 않는다. 벨리알을 물리치기 위해 지구에 크고 두려운 날을 불러오려는 이매뉴얼에게 지나는 내기를 제안하고, 자신의 세계로 초대한다.
■ 이 책은...
고독하고 절실한 인간의 이야기
- 종교적 테마를 통해 나타난 필립 K. 딕의 인간애
『성스러운 침입』은 전작 『발리스』와 마찬가지로, 선악의 대립, 이념 사이의 경계가 해체되고 힘을 잃은 현대 자본사회에 새로운 신화라고 할 만한 세기의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종교적인 테마와 우화적 교훈이 뚜렷하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소행성에 이민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지만, 지구를 다스리는 두 주체는 기독이슬람 교회와 과학 공산당이라는 두 거대 기구이며, 악마의 대리인 슈퍼컴퓨터가 지구를 관리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느님은 기원 후 73년의 전투에서 벨리알에게 패해 먼 소행성으로 쫓겨났다. 즉 이 작품에서는 과학 기술과 신과 악마가 모두 실재하며, 신의 권능과 악마의 권능 또한 과학기술과 공존한다. 지구를 악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매뉴얼이라는 아이로 태어난 하느님의 권능은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고, 지구를 감싸고 있는 악의 주체인 벨리알의 권능은 무언가를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매뉴얼과 벨리알은 마지막으로 지구를 놓고 전쟁을 벌이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사실 그 전쟁은 인간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 멸망과 생명 또한 인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우주적인 규모의 종교적 다툼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허브 애셔라는 인물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소행성에 있을 때에도 종일 누워서 린다 폭스라는 가수의 음악만 들었고,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해 만나는 사람마다 한소리를 듣는다. 원하는 것은 있지만 너무 멀다고 느끼고 내 손이 닿는 범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십 년 전 작품 속의 인물이지만 놀랍도록 현대인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인물이다. 무력하고, 소심하고, 남들이 보기엔 정말 이상한 삶을 살며 자기가 선택한 한 가지만 보고 듣고 파고드는 허브 애셔는 최근에야 사회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인간형으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필립 K. 딕의 통찰력을 나타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되풀이되는 필립 K. 딕 평생의 주제
- 현실이란 무엇인가?
『성스러운 침입』은 인류가 우주로 활발하게 진출했으며 지금과 완전히 다른 통치기구를 가지고 있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지만 『발리스』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잇고 있으며, 필립 K. 딕이 평생 추구해온 주제와도 길을 같이 하는 작품이다.
시뮬라크르, 즉 외형을 모방하였으나 실재가 아닌 것에 대한 경계와 인식은 필립 K. 딕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감정을 가진 안드로이드를 통해 인간성이란 것에 의문을 던지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마약을 통해 무한히 증식하는 환각 세계를 체험하게 하고 영원한 생명과 현실의 기반에 의문을 던지는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자폐증에 걸린 소년이 보는 미래를 보려다가 현실 붕괴를 경험하게 하는 『화성의 타임슬립』 등 많은 작품에서 필립 K. 딕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현실을 경계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추구해왔다.
『성스러운 침입』 에서는 신적인 권능을 통해 가짜 세계에서 살게 되는 인물들과, 그들이 ‘진짜 세계는 따로 있고 지금 나는 누가 보여주는 가짜를 진짜라고 믿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의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 또한 필립 K. 딕의 전작을 잇는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증거이다. 이러한 ‘현세에 대한 의심’은 인도 신화의 마야, 장자의 호접몽, 그리스 철학의 도코스 등 고대 철학으로부터 시작된 오래된 화두이지만, 이것을 과학과 미래와 결부시켜 새로운 충격을 선사하고 오늘날 가상현실과 가상세계를 다룬 많은 SF 영화의 효시가 된 것은 필립 K. 딕 고유의 특징이자 업적이 아닐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언젠가는 아이의 기억이 돌아올 것이었다. 뭔가가, 그러니까 이 아이 스스로 예정한 대로 이 아이에게 가해질 어떤 탈억제적 자극이 기왕증 - 건망증의 상실 - 의 방아쇠 노릇을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아이의 모든 기억이 물밀듯이 돌아올 것이다. CY30-CY30B에서 일어난 수태에 관한, 리비스가 끔찍한 질병과 싸우는 동안 그녀의 자궁 속에 들어있었던 시기에 관한, 지구로의 여행에 관한, 어쩌면 심지어 심문에 관한 기억까지도 말이다. 리비스의 자궁 속에서 매니는 그들 세 사람에게 조언해주었다. 그들이란 바로 허브 애셔, 일라이어스 테이트, 그리고 매니의 어머니인 리비스 자신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 사고가 터졌다. 물론 그게 정말로 사고였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바로 그 사고 때문에 손상이 생겼다.
그리고, 손상 때문에 매니는 기억을 잃었다. - 10쪽
그는 제임스 조이스가 글 속에서 '말 테이프'에 관해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거기에 대해 논문이라도 써서 간행해야지. 『피네간의 경야』라는 작품이야말로 제임스 조이스의 시대에서 거의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던 컴퓨터 메모리 시스템에 근거한 정보 풀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인지는 몰라도 조이스는 우주 의식과 접촉했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자기 작품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영감을 얻었다고 말이야. - 23쪽
불길이 워낙 밝아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애셔는 눈을 꾹 감고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도대체 누구요?" 그가 물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에흐예(Ehyeh)다."
"이런." 허브 애셔는 깜짝 놀라 말했다. 이 산의 신이 전기적 간섭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에게 공개적으로 말을 건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왜소함이 느껴지면서 허브 애셔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저한테 뭘 원하시는 겁니까?" 그가 물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좀 늦은 시간이라는 겁니다. 지금은 제가 잘 시간이거든요." - 59쪽
바로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일라이어스의 말에 따르면) 토라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관념이었다. 지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장차 올 메시야의 시대에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음 번 '셰미타'이며, 첫 번째와 매우 비슷할 것이었다. 토라는 다시 한 번 뒤죽박죽된 행렬[매트릭스]에서 스스로를 재정렬할 것이었다.
허브 애셔는 생각했다. 컴퓨터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우주는 프로그램이 되어있는 거군. 그리고 나중에 가서 더욱 정확하게 다시 프로그램이 되는 거고. 환상적인데. - 176~177쪽
의식을 잃어가는 중에 허브 애셔는 속으로 말했다. 야의 계획이 완전히 망쳐진 것까지는 아니로군. 야는 아직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어. 여전히 희망이 있는 거야.
하지만 희망이 아주 많은 것까지는 아니었다.
"벨리알." 그가 속삭였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포프 선생이 상체를 굽히며 그의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벨리알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저희가 그분과 대신 연락을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분께 사고 사실을 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허브 애셔가 말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 208~209쪽
그들은 금속의 경우처럼 중독되었어. 그는 생각했다. 금속이 그들을 속박하고, 금속이 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지. 이곳은 금속의 세계야. 톱니바퀴에 의해 돌아가는, 갈아버리며 나아가는 기계, 위의 고통과 죽음을 처리하는…… 그들은 죽음에 워낙 익숙해져 버렸지. 그는 깨달았다. 마치 죽음 역시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그들이 동산을 알고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던가. 동물과 식물이 쉬고 있는 그 장소를.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내가 그들을 위해 그 장소를 다시 찾아줄 수 있을까? - 217쪽
"전쟁이 다가오고 있어." 이매뉴얼이 말했다. "우리는 그 장소를 선택할 거야. 우리 둘, 벨리알과 내게는 그곳이 게임을 벌일 일종의 테이블이 되는 거지. 그 위에서 우리는 우주를, 존재 중의 존재를 내기에 걸 거야. 전쟁의 시대에서도 이 마지막 편은 내가 시작을 하지. 벨리알의 영토, 그의 본거지로 내가 직접 찾아온 거니까.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전진한 거야. 다른 우회적인 방법을 택한 게 아니라. 이게 과연 현명한 생각이었는지는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밝혀지겠지." - 247쪽
허브 애셔는 매니 팔라스라는 그 소년을 자기가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치 다른 언젠가, 어쩌면 또 다른 생애에 그를 알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애를 사는 걸까? 그는 속으로 물어보았다. 우리는 일종의 테이프상에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일종의 반복 재생이 가능한 것일까? - 2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