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시와 흠모하는 선배와 사랑하는 여인이 존재하는 과거에 빠져 살던 ‘판(판지수)’은 부모까지 잃게 되자 유일하게 고요하고 무탈한 ‘동인건설’의 세계에서 안식을 찾고자 한다. 허나 그곳은 빙고, 즉 국가와 권력을 위해 임시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 투표하거나 집권여당의 선거운동원 또는 자원봉사자로 일하거나, 국가 정책 홍보 광고 또는 텔레비전 뉴스 인터뷰에 출연해 이 나라는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나라이며 국민으로서 혜택 받고 있다고 말하고, 주요 포털이나 웹사이트 게시판, 인터넷 카페와 개인 블로그 운영만을 집중적으로 담당하며 전략적으로 대통령 및 보수층지지, 여론몰이에 앞장서는 사람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명백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의심과 불안만이 공기처럼 나를 휘감는” 곳이자, “세계가 여전히 불확실하고 폭력적이며 기기묘묘한 장소라는 사실만을 인지시켜주”는 곳이며, “자본주의를 기조로 한 현재의 세계가 빈과 부로 나뉘어 신음하고 있듯 안과 밖, 내부와 외부가 철저히 분리된 채로 구성돼 있”는 동인건설. 그곳에서 빙고들의 관리를 맡게 된 ‘판’은 빙고의 세계에 반하는 ‘우리’ 혹은 ‘반’을 만나게 되면서 동인건설이라는 거대 조직의 효율적인 부품으로 기능하도록 훈련된 자신 역시 빙고들을 관리하는 또 다른 빙고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일그러진 거울을 통해 빙고인 줄 모른 채 빙고의 삶을 살아왔던 자신의 지나간 삶과 마주하게 된 판은 이 세계에서 치명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국민으로 온 나라를 구석구석 활보하는 빙고일까, 무명씨로서의 빙고들을 개처럼 부리고 조종하는 배후로서의 동인일까, 아니면 빙고와 동인을 만들고 가동시켜온 믿을 수 없는 이 나라의 시스템일까, 그도 아니라면, 정말이지 그도 아니라면, 그저 뼛속까지 기형화되어버린 우리네 인간들 그 자체일까”를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과거의 시와 선배와 사랑을 현실로 소급한다. 그러나 판이 동인건설의 진실을 알아가면서도 동인건설과 ‘우리’의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결정짓지 못한 채 끝없이 망설이는 사이, 서서히 빙고들이 사라져 가는데…….
카프카의 『성』과 조지 오웰의 『1984』의 2013년 한국판!
오늘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국정원 사건’과 ‘댓글 알바’에 대한 문학적 상상
2005년 《현대문학》에 단편 「뱀꼬리왕쥐」를 발표하며 등단,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 『노웨어맨』 등을 통해 너무나도 평범한 인물들의 절박한 삶을 환상적 서사로 전해주었던 작가 염승숙. “좀 더 부끄럽지 않은 소설을 써내기 위해 매일 새로운 용기를 내고 있다”던 그녀가 첫 번째 장편소설 『어떤 나라는 너무 크다』를 현대문학에서 펴냈다. “첫 번째 장편은 풍자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바람을 담은 『어떤 나라는 너무 크다』는 빙고 판의 판을 연상시키는 ‘판’이라 불리는 “특별하지도, 특출하지도 않지만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어디서나 무수히 존재하는, 그저 그런 보통의 사람”이 빙고들을 관리하는 ‘동인건설’이라는 환상적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SF적 상상력으로 치환
그간 염승숙의 소설 속 인물들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상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잊어버린 채 집과 학교 혹은 직장만을 오가며 살아가는 소시민들이었다. 작가는 그런 일상 속 인간들이 너무 판에 박힌 존재들이 아닐까, 판 위의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고, 그런 생각 끝에 너무 큰 나라와 너무 작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계인 ‘빙고의 세계’를 창조했다. 이 빙고의 세계는 “너무 크다. 크다는 것은 아득하고 먼 것. 그것은 슬픈 것이다.” 이에 반해 이 빙고의 세계 속 빙고들인 우리들은 “너무 작다. 작다는 것은 아련하고 가까운 것. 그것은 아픈 것이다” 하여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온다.” 이 빙고의 세계, “어떤 나라는 너무 크고 어떤 사람은 너무 작”은 이 세계는 “슬프고 아프다.”
이 너무 큰 나라와 너무 작은 시민 혹은 국민이 직조해낸 ‘빙고의 세계’ 속에서 작가의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SF적 상상력으로 치환되고, 이로 인해 너무도 평범해 시선을 줄 수 없었던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 그 경계를 넘나드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우리 자신이 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작가의 말마따나 “이 거대한 사회의 아주 사소한, 그러나 끝없이 팽창해가는 어떤 균열에 관한 이야기”로 훌륭하게 형상화된다. 그리고 이 균열 속에서 작가는 절망이 아닌, 아니 절망적이지만 절망으로만 침잠하는 세계가 아닌 그들만의 절실함, 솔직함과 소박함이 담긴 따뜻하고 낙관적인 희망의 불씨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 시대에 대한 뼈아픈 풍자
자본주의적 인간의 삶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와 철학적 존재론을 그 내용의 뼈대로 삼고 있는 『어떤 나라는 너무 크다』는 형식적 측면에서 너무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어 독자들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작품은 풍자와 알레고리, 알레고리와 풍자가 환상을 만나 만들어낸 아주 이상하고, 아주 비참하며, 아주 슬픈 소설이다. 카프카의 『성』과 조지 오웰의 『1984』의 2013년 대한민국 버전이라 할 만한 이 소설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국정원 사건’이나 ‘댓글 알바 사건’의 알레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너무 큰 나라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그들은, ‘반(‘우리’)’은 왜, 어떻게 ‘처리’되는가라는 물음 속에서 주체성 혹은 주권을 잃어가는 우리 시대에 대한 뼈아픈 풍자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또한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 등 이미 고전이 된 SF 스릴러 혹은 SF 추리물의 형식적 쾌감을 선사해주는 한편, 2000년대 세대들만의 아픔과 사랑과 헤어짐과 상처를 새롭게, 그러면서 절절하게 전해주는 후일담 소설 형식을 통해 드라마적 감동 또한 전해준다. 그런가 하면 이 소설은 시와 관련한 메타 서사 형식에 비판적 리얼리즘과 ‘마술적 리얼리즘’을 적절하고 절묘하게 결합해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에 기분 좋은 충격과 자극을 전해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