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 찬 차르: 광기와 합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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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회

Ⓒ「오프리치니키」, (니콜라이 바실례비치 네브레프 作)

반역죄로 체포된 페오도로프를 차르로 분장시켜 왕좌에 앉혀놓았다.

오프리치니키와 궁정인들이 단도로 그를 찌르기 직전이다.

 

피에 굶주린 듯한 이반의 행적 뒤에는 분명 광기가 번득인다. 그가 행한 이상한 행위의 정점은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1581119, 그는 아들을 뾰족한 몽둥이로 찔러 중상을 입혔고, 이 상처로 인해 며칠 뒤 아들은 결국 사망했다.

이반의 성격이 비정상적인 면모를 띤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모든 일들을 그 개인의 이상 성격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광기는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합리적 목표 달성이라는 맥락 속에서 발현된 광기로 해석할 수 있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는 자신이 역사적으로 담당해야 하는 시대의 과업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이반의 시대는 러시아가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어가고 동시에 대영토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의 광기는 이런 흐름 속에 위치해 있다. 예컨대 오프리치니나는 보야르의 이해관계에서 국가를 떼어내어 독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차르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군주에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봉사 귀족(신분에 의해 귀족이 된 게 아니라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여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귀족이 된 경우를 말한다)을 형성한 그는 프랑스의 루이 11세나 영국의 헨리 8세처럼 근대 국가의 정초를 놓은 국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 방식은 분명 서구와 많이 달랐다. 그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를 통해 당대인들의 상상력을 장악하는 스펙터클을 보임으로써 독재 권력을 강화했다. 그 이면에서 우리는 러시아의 독특한 종교 문화를 읽을 수 있다.

1567년 이반 페오도로프가 차르에 대한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처형은 실로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에게 차르 옷을 입힌 뒤 홀을 쥐고 왕좌에 앉도록 하여 마치 그가 차르가 된 것처럼 만든 후 모든 궁정인이 보는 앞에서 주살誅殺한 것이다. 당시 궁정인들은 모두 단도로 그를 찌르도록 강요당했다.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짧은 순간이나마 페오도로프를 왕좌에 앉혀 자리를 바꾼 것은 카니발처럼 뒤바뀐 세상을 연출한 것이다. 모든 카니발이 그렇듯이 이것은 한시적인 비정상 상태를 통해 오히려 원래 세상의 정상성을 확인하는 기능을 한다. 이를 통해 차르는 권력의 신성한 독점을 역설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1575, 젬시치니나를 몽골계 공 시메온 벡불라토비치의 지배하에 둔 것 역시 그 비슷한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금장한국金帳汗國 칸의 손자이며 정교로 개종한 인물이었다. 이반은 그를 왕좌에 앉히고 차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러시아인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적의 최고위 지배자의 자손을 자신의 상관인 듯 모시고, 심지어 자신은 아예 왕궁을 떠나 마치 그의 신하인 듯 처신했다. 그러고는 1년 후에 돌아와 자기 지위를 모두 되찾았다.

이처럼 이반은 간혹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전도와 도치의 행위를 하곤 했다.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자신의 권력 근거를 초월적인 신성성에서 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에 미친 광인혹은 예수에 빠진 바보라는 러시아의 특이한 종교 전통에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모스크바의 성 바질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 사람은 모든 재산을 버리고 사회생활을 포기한 채 숨어 살다가 광인을 가장하고 나타나 일부러 굴욕적인 행위를 한다. 예컨대 여자들 사이를 벌거벗고 돌아다니거나 교회에 돌을 던지는 식이다. 그 의미는 표면적인 모습과는 정반대로 사람들의 성적 타락을 비난하고 신의 집에 접근하는 악마를 쫓는다는 것이다. 이런 인물들은 이성을 버리고 전적으로 신앙에 헌신함으로써 신적인 진리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예수에 미친 광인은 도치된 행위를 통해 신의 언어를 표현하는데, 이는 세속의 법을 초월한다. 이반 역시 이런 식의 정치 언어를 구사한 셈이다. 이성보다 신앙을 극상의 위치에 놓고 신의 뜻을 받아 통치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되면 표면적으로는 미친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는 이 세상에서 신의 질서를 구현하는 합리적 지배가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함으로써 러시아는 서구식 절대주의 국가와 다른 전제 국가가 되었다.

통치 후기에 이르러 이반은 지극한 종교적 경건성을 보였다. 그는 계속 종교 서적을 읽고 기도하고 새로운 성인들을 배출했다. 참회의 행위로 자신이 살해한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모아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공식적으로 확인된 희생자의 수가 4,095명에 이르렀으니, 기도 시간이 제법 길었을 것이다!). 그는 한없이 난폭하게 정의를 실현하다가도 곧바로 관대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보였다. 사실 이렇게 온탕냉탕을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야말로 그로즈니한 독재자의 전형이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고 언제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언제든지 애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보다 더한 공포는 없으리라.

1584년 이반은 54세에 갑자기 사망했다. 이 나라의 정치 전통에 충실하게도 이반 역시 독살되었다는 설이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진실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살아남은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연장자인 표도르(테오도르라고도 한다)가 차르가 되어 통치했다(1584-1598). 그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누이동생인 이리나 고두노프와 결혼했다. 심신이 미약한 그를 대신해 그의 매형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권력을 행사했는데, 그의 능숙한 외교술로 인해 이 시기에는 비교적 안정을 구가했다.

그 무렵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반의 또 다른 아들 드미트리가 자기 집 안뜰에서 목이 베어져 죽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9세였다.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 집의 경비원들을 의심하여 그들을 살해했다. 공식 조사위원회는 드미트리가 칼을 가지고 놀다가 간질 발작을 일으켜 자기 스스로 치명상을 입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나 혹은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보리스 고두노프가 그를 죽였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이 설은 푸슈킨이나 무소르그스키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 그러나 실상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표도르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1598년에 죽은 후 그동안 실권을 장악했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이나 그가 어린 드미트리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커졌다.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등극한 이후 최악의 시기가 도래했다. 계속된 흉작으로 러시아는 소위 고난의 시대를 맞았고,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바로 그즈음 이전에 죽었다는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세상에는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살아서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위난의 시대에 나라와 민중을 구하기 위해 홀연 나타났다는 신화적인 방식이 작동한 것이다. 가짜 드미트리는 세 번이나 등장했는데, 그중 한 번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실제로 제위에 올라 1년 동안 차르 행세를 하기도 했다. 대혼란은 1613년에 로마노프왕조가 들어서서야 종식되었다. 이때 들어선 로마노프왕조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300년 넘게 존속했다. 그러나 이반의 시대부터 나타난 진실과 허위를 헤아리기 힘든 미친 권력 현상은 그 후로도 계속 가짜 차르와 가짜 차레비치(차르의 아들)가 등장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참칭僭稱현상은 러시아의 정치와 사회 및 문화에 자주 보이는 중요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20세기에도 가짜 레닌이나 가짜 스탈린 아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슈킨, 보리스 고두노프,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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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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