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 찬 차르: 이반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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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회

역사가들은 흔히 이반의 시대를 합리적인 전반기와 광기에 찬 후반기로 나누곤 한다. 어떤 이유에서 훌륭한 통치자로부터 광기 어린 잔혹한 전제군주로 바뀌게 되었을까?

이반은 점차 보야르와 격한 투쟁에 들어갔다. 그는 갈수록 조언 집단을 멀리하고 개인적 권력을 강화하며 절대적 통치 방식을 이루고자 했다. 그의 목표는 중앙집권화된 전제 국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표를 순조롭게 수행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여러 문제에 봉착했다.

1553년 그는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병상에 누운 그는 자신이 죽을 것으로 예상했고, 그래서 궁정의 모든 신하들에게 그의 아들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덜컥 드러눕고 보니 충격적이게도 그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뿐 아니라 측근들마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것을 목도하게 됐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우선 이반의 아내 아나스타샤가 왕이나 공prince의 가문이 아니라 그보다 아래 수준으로 기껏해야 자기네들과 동급인 보야르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했고, 또 아들 드미트리가 아직 미성년자여서 그가 차르가 되면 또다시 정국이 어지러워질 것을 염려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충성서약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이반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고, 이때의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반이 완쾌되어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을 때에는 재앙이 떨어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1560, 사랑하는 아내 아나스타샤마저 사망했다.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아내가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차르의 분노는 폭발했고, 피바람이 일었다. 재판 절차도 무시한 채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다수의 귀족들은 살아남기 위해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외국으로 망명했다.

30대에 들어서자 그는 더욱 종잡을 수 없는 별난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1564, 이반은 갑자기 모스크바를 떠나 100킬로미터 떨어진 알렉산드로프의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추종자들과 함께 검은 수도사 옷을 입고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실로 기이한 행동을 했다. 표면적으로는 일부러 기독교를 버린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마스크를 한 채 광대와 춤을 췄으며, 교회 안에서 유혈 사태도 자주 일으켰다. 수도원에서 벌이는 이런 악마적인 향연에 대한 비난이 일자 그는 돌연 총주교에게 양위譲位를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보야르들과 시민들은 돌아와줄 것을 호소했고 이반은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오프리치니나라는 특별 구역을 창설하고 이곳은 차르가 재량대로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 둘째, 악당들과 반역자들에 대해서는 차르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권리를 갖는 것을 승인해달라. 국토를 둘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겠다는 것이나 반역자들을 내 밸 꼴리는 대로처벌하겠다는 것 두 가지 모두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끔찍한 조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이반은 이 두 가지 조건을 승인받고 15652,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국가를 두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그중 하나를 자신이 직접 통치한다는 이 이상한 조치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이 아직도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차르가 직접 통치하는 오프리치니나는 모스크바국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보야르가 통치하는 그 나머지 땅은모스크바 시도 여기에 포함된다젬시치니나라 불렸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이 조치가 이반의 권력 강화의 한 방편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조치로 인해 귀족들의 영지 소유와 주민들의 지배 체제를 크게 바꾸었으며, 결국 그들의 권력 기반을 흔들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권력 강화에 더 직접적으로 활용된 기구는 오프리치니키라는 조직이었다. 이는 말하자면 일종의 헌병 혹은 비밀경찰 조직이었다. 처음에 1,000명으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6,000명으로 늘어난 이 기구는 차르의 적을 잡아 파멸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이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개 대가리와 빗자루를 매단 검은 말을 타고 다녔다. 그 뜻은 차르의 적을 물어뜯고 쓸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의 가족, 친척, 친구, 하인들도 함께 사라졌다. 체포된 인사의 재산은 몰수되거나 아예 불태워졌다. 차르의 심기를 과하게 건드린 경우에는 끔찍한 응징을 당했다. 1570년에 배반죄로 정죄된 노브고로드 지역이 대표적인 사례다. ‘피와 불의 진압을 통해 이 도시는 완전히 불타고 파괴되었다. 누구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수도사가 되어 피신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 당시 이반은 분명 정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아나스타샤를 잃은 후 여섯 번이나 다시 결혼했지만 안정을 찾지 못했다. 분노가 폭발할 때마다 그는 반역자들을 색출하여 잔인하게 처형했다. 그는 오프리치니키와 함께 직접 반역자를 고문했고 사지 절단, 십자가형, 가죽 벗기기, 솥에 집어넣고 물로 삶기, 화약통 위에 앉히고 폭발시키기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

오프리치니나 정책은 완전한 실패였다. 너무나 많은 학살이 자행되었고, 경제가 피폐해졌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그가 막강한 권력을 얻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확실하게 귀족 분쇄자라는 명성을 확보했다. 세속 귀족이든 고위 성직자든 감히 대드는 자들을 아예 제거해버렸다. 그의 정책을 비판했던 총주교 필립도 살해되었다. 이반은 민중들의 지지 위에 자신의 절대 권력을 구축했다. 그렇다면 민중들은 그동안 그들을 착취하던 지배층으로부터 해방된 것일까? 무자비한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반 뇌제를 흠모하던 스탈린은 그 과정에서 하층민이 해방되었다고 해석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보야르가 몰락할 때 그 밑의 농민들도 덩달아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차르로서는 귀족층이 자신의 통치와 군대의 핵심 기반이었으므로 이들이 완전히 몰락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충성하는 귀족의 농민 지배를 강화시켜주었고, 그 때문에 러시아의 예농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말하자면 귀족들이 농민들을 확고하게 지배하도록 만들어주고 그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차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것이다. 서구에서 농민들이 봉건적 예속 관계에서 해방된 시점에 러시아에서는 오히려 농민들의 지위가 갈수록 악화되어갔다.


 

* 심문 과정 중 사람들을 숯불 그릴에 굽는 고문을 가했다. 대주교는 곰 가죽을 입히고 사냥개들을 풀어 쫓도록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강물에 던져 넣고는 오프리치니키들이 보트를 타고 돌아다니며 물 위로 떠오르는 사람들을 갈고리나 몽둥이로 물속에 도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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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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