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립 K. 딕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일생을 보냈다. 미숙아로 태어난 직후, 쌍둥이 누이를 잃는 등 불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안전강박증에 시달렸고 마약에 중독되었으며,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불안한 삶을 살았다. 1952년에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36편의 장편소설과 100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딕은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렸고, 죽기 몇 년 전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블레이드 러너>로 처음 영화화되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결국 198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원작소설들이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 <임포스터> <컨트롤러> 등의 영화로 재탄생하면서, 오늘날 딕은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딕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초능력과 로봇, 우주여행, 외계인과 같은 기존의 SF 소재와는 차별된 암울한 미래상과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며 끊임없이 인간성의 본질을 추구해왔다. 1962년에 『높은 성의 사내』로 ‘휴고상’을, 1974년에 『흘러라, 내 눈물, 하고 경관은 말했다』로 ‘존 캠벨 기념상’을 수상했다.
1983년, 그의 이름을 딴 ‘필립 K. 딕 상’이 제정되었다.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출판사들에게 외면당했던 그의 삶을 기린 이 상은 페이퍼백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름은 없지만 가능성 있는 작가의 작품을 선정하는 ‘필립 K. 딕 상’의 첫 수상작은 바로 ‘사이버 펑크의 성경’으로 불리고 있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이다.
■ 옮긴이 _ 김상훈
서울 출생. 필명 강수백. 번역가이자 SF 평론가이며 시공 그리폰 북스와 열린책들 경계소설 시리즈, 행복한책읽기 SF 총서의 기획을 담당했다. 주요 번역 작품으로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드림 마스터』,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 그렉 이건의 『쿼런틴』,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 버너 빈지의 『심연 위의 불길』, 필립 커의 ‘베를린 누아르’ 3부작, 필립 K. 딕의 『화성의 타임슬립』『죽음의 미로』 등이 있다.
『작년을 기다리며』는 태양계로 진출한 지구가 인류의 먼 조상으로 판명된 릴리스타 제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곤충을 닮은 외계인 리그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래가 배경이다. 지구에 가혹한 요구를 해오는 동맹 때문에 악전고투하는 지구 대표 지노 몰리나리와,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탈출하고자 몰리나리의 주치의를 자원하는 의사 에릭 스위트센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에릭의 아내가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며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마약 JJ-180에 중독되고, 그것이 릴리스타인들의 음모임이 밝혀지면서 에릭의 부부관계는 지구의 운명을 건 사건으로 비화된다. 인간의 본성과 미래에 심각한 회의를 품은 듯하면서도 인간성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는 필립 K. 딕의 통찰력을 만날 수 있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딕이 본서 『작년을 기다리며』를 집필한 것은 히피 운동이 전 세계 청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노골화되던 1963년의 일이었다. 사생활 면에서는 세 번째 아내인 앤과의 결혼 생활이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약물 과용에서 비롯된 극심한 울증(鬱症)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최악의 시기이기도 했다. 딕은 각성제인 암페타민을 '연료 삼아' 하루에 A4용지로 6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지만 워낙 박한 고료 탓에 생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먹고 살기 위해 또다시 암페타민에 의존하며 글을 쓰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다. 누가 보아도 극단적(혹은 병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는 딕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딕 작품들이 내포한 절실한 계시(啓示)의 감각과, 인간 현실에 밀착한 용어-여기에는 SF의 클리셰도 포함된다-로 그 감각을 표현하는 경탄할 만한 작가적 역량은 딕이 왜 'SF작가 중의 SF작가'로 불리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_김상훈(SF 평론가)
『작년을 기다리며』는 1940년과 50년대의 관객을 매료한 최상의 누아르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스릴과 수수께끼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영화와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면, 점점 복잡해지고 불길함을 더해가는 우주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악전고투하는 사람은 하드보일드 탐정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독자들도 같은 상황에 빠진다. _《가디언Guardian》
『작년을 기다리며』는 SF의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작가였던 필립 K. 딕 특유의 강박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현란한 입문서이며, 그를 모르던 독자들에게도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설 것이다. _《인피니티 플러스 Infinity Plus》
다중적인 현실과 편집증적인 반전으로 점철된 『작년을 기다리며』는 거장 필립 K. 딕의 작품세계의 최상의 전형(典型)을 제공해준다. 딕은 끊임없이 독자의 허를 찌르며, 등장인물들의 절절한 고뇌와 편집증적인 망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특히 시간여행약이 그들에게 어떤 효과를 끼치는지 묘사한 대목은 압권이다. _《SF 사이트 SF Site》
딕은 20세기의 미국문학이 낳은 진정한 몽상가이다. _《LA 위클리L.A. Weekly》
문학사상 가장 독창적인 작가 중 한 사람. _《선데이타임스Sunday Times》
필립 K. 딕의 소설이 자전적인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환각 체험의 박진성이 인상적이지만, 단순히 마약에 취해서 쓴 비현실적인 모험이 아니다. 딕이 쓴 최상의 작품들은 현실성과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는 미국문학의 전통에서는 보기 드문 환상성과 초현실성을 겸비하고 있으며, 비평가들은 그런 그를 보르헤스, 카프카, 칼비노에 곧잘 비견하곤 한다. _《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 줄거리
서기 2055년. 태양계로 진출한 지구는 인류의 먼 조상으로 판명된 릴리스타 제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곤충을 닮은 외계인 리그인들과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UN 사무총장이자 통일 지구 정부의 실질적인 독재자 지노 몰리나리는 패색이 짙은 이 전쟁에서 가혹한 요구를 해오는 릴리스타인들과 동맹 반대파들 사이에서 악전고투한다. 인공장기 이식 전문의인 에릭 스위트센트는 아내 캐시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탈출하고픈 일념에 몰리나리의 주치의를 자원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환락을 좇던 캐시는 새로운 환각제인 JJ-180을 복용한다. 그러나 JJ-180은 현실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금단의 마약이었고, 그 배후에는 지구를 장악하기 위해 암약하는 릴리스타 제국 정보부가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우리는 매일 환상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 최초의 음유시인이 먼 옛날에 일어났던 전쟁에 관한 서사시를 처음으로 읊었을 때, 환상이 우리 세계로 파고들어왔다. [일리아드]는 건물 포치에서 우표를 교환하는 로번트 어린애들과 마찬가지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과거를 잊지 않고 그것에 현실성을 부여하려고 애써왔다. 그런 행위 자체는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다. 과거 없이는 연속성 또한 없고, 지금 이 순간밖에는 남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으면 순간-현재-은 거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 54쪽
애당초 인간의 삶 자체가 은총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개중에는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다. 지노 몰리나리에게 삶은 악몽이었다. 이 사내는 병들었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있으며, 전혀 성공할 가망이 없는 엄청난 노역을 짊어지고 있다. 동포인 지구인들의 신뢰를 전혀 못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릴리스타인들의 존경이나 신뢰나 예찬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에 더하여 아내의 돌연하고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시작해서 최근 그를 엄습한 복통에 이르기까지 개인사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게다가 - 에릭은 갑자기 직감했다 - 그 이상의 고민거리가 있다. 몰리나리밖에는 모르지만, 남에게 밝힐 의사가 없는 모종의 결정적인 요소가. - 85쪽
캐시는 윗몸을 일으켰다. "에릭, 나를 버리고 간 대가는 꼭 치르게 할 거야." 그녀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무슨 뜻인지 알지?"
"응." 그는 대꾸하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일생을 바쳐서라도 그러고야 말겠어." 캐시가 침실에서 말했다. 이젠 살아갈 이유가 생겼으니까 말이야. 마침내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가슴이 다 두근거리네. 몇 년이나 그토록 무의미하고 추악한 삶을 살아오다가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느님, 정말이지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행운을 빌게."
"행운? 난 행운 따위는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건 노련함이고, 난 그걸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 그 약이 효과를 발휘했을 때 난 많은 걸 배웠어. 그게 어떤 경험이었는지 알려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에릭, 그건 성말 상상을 초월하는 약이야 - 우주를 받아들이는 감각 전체를 바꾸고,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바꿔버리지. 다시는 같은 눈으로 볼 수가 없게 돼. 당신도 그걸 써보면 좋을 텐데. 도움이 될 거야."
"그 무엇도 내게 도움이 될 수는 없어."
이 말은 그의 귀에 묘비명처럼 들렸다. - 108~109쪽
"또 뭔가?" 몰리나리는 고함을 질렀다. "그놈의 시간여행 약을 먹고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자네 앞에서 작고 하찮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어? 옆이나 뒤가 아니라? 혹시 작년이 다시 되돌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거야?"
에릭은 손을 뻗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작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시 와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 3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