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환상을 넘나드는 관찰과 성찰
스핑크스도 모른다에 실린 각 단편들의 가장 지배적인 인상은 여행에 근거한 서사라는 점이다. 시베리아, 울릉도, 교토와 후쿠오카, 이집트, 실크로드와 돈황, 인도와 히말라야 등 작가는 다채로운 장소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하지만 이 책의 단편들은 단순히 여행에서 보고 들은 현지의 풍물을 소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쉽게 씌어진 시> 같은 널리 알려진 시의 제목이나 시구를 차용한 제목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작가를 이런 장소들로 이끈 것은 장소에 대한 매혹 이전에 문학 텍스트에 대한 매혹이다. 또한 「스핑크스도 모른다」에서는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왕』이, 「그가 내게 티카해주었다」에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쉽게 씌어진 시」에서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가 여행의 목적, 작품의 플롯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노인들의 상큼하고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 「하늘은 왜 파란가」에서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작품의 주제를 상징하는 기호로 제시된다.
책의 말미에서 해설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책에서 여행은 ‘여행을 추동했던 문학 작품과 여행에서 만나는 공간을 겹쳐놓고 읽고 쓰는 행위’이다. 여행지에서 이루어지는 작가의 관찰은 내면적 성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로 통합된다.
『스핑크스도 모른다』의 단편들에는 환상이 마치 일상처럼 개입한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화자는 춘원 이광수의 『유정』에 나오는 최석의 부인이다. 20세기 초반 소설 속 등장인물이 21세기 시베리아 문인 여행단의 일원으로 최석이 사라진 시베리아를 기행하며 수많은 문학적 텍스트의 기반이 된 시베리아의 매력을 들려준다. 동화풍으로 씌어진 「스핑크스도 모른다」는 지리산 기슭에 사는 할아버지한테 어느 날 갑자기 종이비행기 한 대가 날아와 창문을 두드리고 신화와 전설의 나라로의 초청장이 적힌 그 종이비행기를 타고 이집트로 훌쩍 날아가 그곳의 시인을 만나 스핑크스의 유명한 질문을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섬에 그녀가 산다」에서는 울릉도에 놀러간 화자가 태풍으로 배편이 끊겨 민박집 여주인한테서 육지에서 울릉도로 오게 된 내력과 그녀의 남편을 바다로 영영 떠나보낸 이야기를 듣는데 사투리 강한 여주인의 말투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또렷한 표준말 어투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화자가 30년 전 조사차 왔을 때 오징어를 팔던 북창동에서 왔다던 여자를 떠올리며 민박집 주인과 그녀가 동일 인물로 오버랩되는 환각을 경험한다.
이런 일상적 환상, 또는 환각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지만 이런 것들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침투하면서 심상한 환상이라고 부를 만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논리적 인과관계나 시공간의 자유로운 이동, 동일인물이 사투리와 표준말을 오가는 사실주의로부터의 일탈은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대신 일종의 소외 효과로 작용해 작품의 주제와 의도에 대해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노인 선언 - 나이 든 화자의 시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품 활동을 더 이상 안 하는 소설가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김승옥이 주옥같은 단편들을 쏟아내던 시기는 이십대 중반의 5년 남짓에 불과했으며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최인훈도 마흔 이후에는 소설 창작에서 손을 떼고 설화라는 통시적인 주제를 다룬 희곡들만을 드문드문 발표했다. 젊어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던 많은 작가들이 나이 들면서 급격히 조로하는 현상은 어느덧 일반적인 한국 문학의 현상이 되었다. 급변하는 한국 사회는 작가들의 유통기한을 그만큼 단축시켰다. 그래서 한국 단편소설에서 화자로 나이 든 사람을 찾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송하춘의 많은 단편들에서 정년퇴직했거나, 노인대학을 다니는 화자가 등장하는 것은 그래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이 화자들을 통해 반갑게도 지금 현재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
실버들의 사랑을 다룬 하늘은 왜 파란가는 작가의 이런 희귀한 시선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하늘은 왜 파란가」의 화자는 ‘내가 본 것 즈이들이 보고, 즈이들이 아는 것 내가 다 아는데, 왜 할애비는 구세대고, 즈이들은 신세대라지?’라고 물으며 성찰 없는 신구 세대 구분을 거부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사랑이 핑크빛이라면 실버의 사랑은 황홀을 의미하는 주황이라고 역설한다. 그들은 (당연히도!) 젊은 시절 트위스트도 춰봤고, 장발도 해봤고, 미니스커트도 입어봤고, 맘보바지, 핫팬츠를 입어봤다. 육이오를 겪었고, 4.19, 5,16를 통해 혁명과 쿠데타도 겪었다. 격동과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그들의 눈으로 봤을 때 요즘 젊은이들의 길거리에서의 대담한 사랑 표현은 아직 풋내를 벗지 못해 유치하다.
인사동, 삼청동, 도심의 고궁을 무대로 펼쳐지는 노인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지만 담백하고 아기자기한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전화기를 타고 들려온 ‘그녀’의 부고로 상실된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두 사람이 찻집에서 나누고, 젊음을 상징하는 작가 하루키도 이제 육십이 넘었음을 이야기하고, 하루키가 상실한 단어 ‘사랑’을 그것이 ‘우리 시대에는 실종된 낱말’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릴 때, 우리는 사회적인 편견이 가둬버린 노인들의 모습에서 벗어난 현대적이고 주체적인 노인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베버리힐즈 서울사이트」의 나이 든 경비원은 아이돌 그룹 에치오티의 숙소를 찾아 남해에서 상경한 어린 학생들의 ‘에치오티 오빠들처럼 그냥 보고 싶어서 자다가도 문득문득 눈이 떠지는 그런 사람’이 어렸을 때 있었냐는 질문에 백일장 대회에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던 ‘아이돌’, 소설가 김동리와의 두근거리는 만남을 이야기한다. 물론 아이들은 김동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런 아이들을 상대로 나이 든 경비원은 작가를 직접 대했을 때의 설레임을 전달하려 애쓴다. 「스핑크스도 모른다」에서는 한때 잘나가는 동화작가였지만 이제는 어린 독자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할아버지가 시대가 변했음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위주의 독서를 하는 요새 영악한 아이들의 취향에 자신의 동화 이야기가 호소력이 없다는 것을 자인한다. 하지만 그 패배의 인정은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작품 속 화자는 성내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사람의 인생을 암시하는 수수께끼를 낸 것으로 유명한 스핑크스를 찾아가 왜 어린 독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책을 읽지 않는지 질문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스핑크스도 모른다’.
사회 구성원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년층을 대변하는 예술적 화자의 목소리가 드물어진 작금의 한국 문학 속에서 이번 송하춘 단편집 화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반갑다. 청춘들은 젊기라도 하니 사회는 그들에게 관심을 쏟고 위로를 주려 한다. 그에 반해 노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부담스럽다’는 데 몰려 있다. 작가 송하춘은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예술과 현실 사이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수제화공처럼 무두질을 하고, 붙이고, 꿰매고, 공글러’ 구두를 만들 듯이 담백한 단편들을 만들어냈다. 저자가 노년층 화자의 시선으로 전달해주는 이야기들은 얼핏 심심해 보이지만 요란한 치장을 걷어낸 창작의 수수한 맨얼굴을 보여주는 듯하다.
■ 작품 소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춘원 이광수의 유정의 주인공 최석의 아내가 시베리아로 사라진 최석의 발자취를 밟으려 21세기에 문인들과 함께 시베리아 여행사 투어에 따라나선다. 과묵한 현지 가이드 때문에 여행단 사람들은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최석의 아내는 현지 가이드한테서 시베리아에 대한 묘한 인상을 받는다. 혁명과 자유의 역사를 가진 시베리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최석의 아내는 최석을 매혹시키고, 춘원 이광수를 매혹시킨 시베리아의 마술을 체험한다. 그리고 문득 그 마술에 걸린 사람들과의 추억이 아름다운 사랑과 같은 말임을 깨닫게 된다.
「하늘은 왜 파란가」
노인대학의 생활체육반에서 같이 요가를 배우는 나와 박형과 그녀는 친한 사이다. 어느 눈이 오는 날 나는 박형을 따돌리고 그녀와 인사동에서 만나 전통차를 마시고 삼청동을 산책하며 즐거운 데이트를 한다. 삼각관계에서 박형을 제치고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는 사실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여자아이의 마음이 친구한테 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씁쓸한 열패감을 만회시켜 주는 그윽한 쾌감이다. 그녀를 둘러싸고 나와 박형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듣게 된다.
「그가 내게 티카해주었다」
대학의 국문과 교수인 그는 삼장법사와 혜초의 실크로드 여행길에 사왔던 디브이디 <돈황>을 재생하려다가 디브이디가 전혀 작동을 안 한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난다. 그러면서 돈황 예찬자인 여인 유라를 떠올린다. 어느 날 오래전에 자기 밑을 떠난 제자 강민종이 문예지에 발표한 시를 읽게 되고 그 시를 계기로 제자들과 날선 공방을 벌이고 유라를 찾아 여수로 향한다. 실크로드와 인도와 카트만두에서 삶의 질문들을 껴안고 방황하던 그의 여행과 대학에서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느낀 인간적인 고민들이 바흐의 두 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처럼 병렬 진행된다.
「베버리힐즈 서울사이트」
고급 주택가의 경비원인 나는 어느 날 주위를 서성거리는 중학생들을 보는데 그들은 에치오티의 숙소를 보려고 남해에서 상경한 소녀들이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소녀들에게 자신이 문학소년 시절 우상(아이돌)이었던 소설가 김동리를 짧게 마주친 추억을 이야기해주지만 아이들은 그런 소설가에 관심이 없다. 그런 와중에 거기에 살던 한 노인이 자식들의 유산 다툼 틈바구니 속에서 돌보는 이 없이 홀로 쓸쓸이 죽어 나간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해군 소속 1만 톤급 대청함의 당번병인 나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함장을 좋아해 성심성의껏 수발을 든다. 함정에는 윤 작가가 타고 있고 그를 위해 배는 내일 독도를 통과할 예정이다. 간밤의 술자리와 배멀미로 컨디션이 엉망인 윤 작가의 모친 사망 소식이 들려오고 그는 다음 기항지인 괌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가 썼다는 『리슌신뎐』을 함장은 비상한 집중력으로 읽어간다.
「그 섬에 그녀가 산다」
정년퇴직을 한 나는 30년 전의 추억을 간직한 울릉도 도동항에 내린다. 그리고 태풍 경보가 내려 뱃길이 꽁꽁 묶여 오도가도 못한다. 민박집 여주인은 어차피 쉬러 온 사람이 뭐가 걱정이냐며 며칠 푹 쉬었다 가라고 하며 울릉도에서의 삶과 설화 속 아기장수처럼 늠름했던 먼저 떠난 남편 이야기를 펼쳐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오징어 씹기를 좋아하던 30년 전의 나의 ‘오드리 헵번’과 오징어를 팔던 ‘북창동 여인’을 떠올린다.
「스핑크스도 모른다」
한때 잘나가는 동화작가였던 석준은 지리산에 살며 상계동에 사는 손녀 아차와는 떨어져 있지만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핸드폰으로 언제든 연락도 할 수 있으므로 한가족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요새 어린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슬프지만 똘똘한 아차를 통해 요새 어린 독자들이 왜 자기의 동화를 좋아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어느 날 신화와 전설의 나라로 초대한다는 초대장이 적힌 종이비행기가 석준 씨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그는 그 비행기를 타고 아차가 읽고 있는 이집트 신화의 고장 카이로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이집트의 시인을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가 없는 이집트인들의 사상이 피라미드라는 엄청난 건조물을 가능케 했다는 것과 스핑크스에게 자신의 책을 왜 요새 어린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는지 질문을 던진다.
「오감도를 조감하다」
<고도를 기다리며>을 연상케 하는 부조리연극의 대본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이상의 「오감도」를 모티프로 아동성폭력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불륜의 결과인 아이를 둘러싼 남녀의 설전, 황사에 대한 두려움 등을 통해 지금 현재 우리를 불안케 하는 것들을 언급한다.
「쉽게 씌어진 시」
오사카에 공부하러 와 있던 나는 어느 날 불현듯 친구 이탁이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스무 날이 넘는 지중해 여행을 마치고 서울 가기 전에 잠깐 들렀다는 이탁과 함께 나는 교토로 간다. 교토는 두 사람이 학창 시절 함께 공부했던 재일교포 양일순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양일순과 함께 일본어를 공부하며 그녀에 얽힌 추억을 갖고 있다. 금각사를 둘러보고 난 뒤 호텔방에서 술을 마시며 이탁은 술기운을 빌려 양일순에 대한 나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질타하고 나는 그런 이탁의 질타가 자신을 향한 질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모다 후미요의 연애방정식」
나는 후쿠오카에서 겨울방학을 보내다가 시모다 후미요로부터 후쿠오카로 세미나 참석차 온다는 연락을 받는다. 세미나의 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살다가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살아가는 일본인인 자이니치 재패니즈 문제. 나는 3년 전 그녀를 교토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와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지만 그뿐 더 이상 발전되지는 않는다. 세미나에 참석한 나는 자이니치 재패니즈의 증언을 들으면서 묘한 친근감을 느낀다. 하지만 시모다 후미요는 나의 느낌이 감상적이고 민족적이라며 몰아붙인다. 시모다 후미요의 다소 격한 반응을 보며 나는 3년 전 그녀로부터 식민지 시절 서울에 살았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실을 떠올린다. 시모다를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나는 선배인 김무조 교수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시모다 후미요가 일본인 남편과 사별한 뒤 김무조 교수와 재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작가의 말에서
선집을 엮겠다고 내 평생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선(選)을 할 때도 나는 이 창작집을 위해 2000년도 이후에 쓴 단편들은 따로 아껴두었다. 그동안 모아둔 작품과, 그 사이에 발표한 작품들이 밀린 숙제처럼 쌓여갔다. 그 가운데 딱 10편을 추려 이번에 다섯 번째 창작집을 엮는 것이다.
꽤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써왔지만, 그래도 나는 이 작품들에 더 애착을 느낀다. 단편소설을 쓸 때 나는 유난히 손으로 구두를 만들어 파는 수제화공이 되고, 내가 진짜 문학에 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 모은 단편들이야말로 내 손으로 무두질을 하고, 오려 붙이고, 꿰매고, 공글러 만든 아직은 수제품임을 나는 좋게 여긴다.
■ 본문에서
주고받는 푸념까지도 그녀 앞에서는 즐거웠다. 실버가 은빛이라면 실버들의 사랑은 어떤 빛깔일까. 젊은 사랑의 빛깔은 핑크빛이라는데 실버들의 사랑도 핑크 빛깔일까. 사랑도 늙는 걸까. 늙은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 ‘황홀’의 색깔은 주황이라고 들었다. 젊은 사랑의 빛깔이 핑크빛이라면 그의 사랑은 주황이고 싶다. 그렇다. 지금 그의 세상은 온통 주황이었다. 눈앞이 주황이고, 가슴속이 주황이었다. ‘삼가연정’이 황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창출한 마법의 공간, 그녀가 ‘삼가연정’을 연출하였다. 그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 안에 갇히고 싶었다. -「하늘은 왜 파란가」p47
질문은 딱 두 사람이 주문하였다.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이 진정 잘 사는 길인지, 물어주십시오.
답변은 금방 돌아왔다.
-믿음을 갖고 언제나 바르게 살라고 말씀하신답니다.
그도 그렇겠지. 가이드 아가씨의 가르침을 따라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 그는 전생에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왕세자님, 전생에 저는 무엇이었습니까.
답변은 또 금방 날아왔다.
-그건 알아서 뭣할라고?
검은 박쥐 한 마리가 보리수나무 잎사귀처럼 천장에 매달려 노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가 내게 티카해주었다」p47
괜찮심더. 이런 일은 섬에서는 늘 있는 일이라예. 내, 이 나이 먹도록 살았어도, 당신 태풍에 갇혔소, 하면 에이 덕분에 잘됐다 하지, 누구 하나 큰일 났다는 사람은 못 봤다 아입니꺼. 세상에 죽고 살 일은 없는 기라. 안 되면 죽을 것 같다가도 진짜 안 되고 나면 마음이 되레 편안해지는가 보더라. 샘도 시방 태풍에 갇힌 심정이 그렇지예? 내 마음이 시방 안 그런교? 어서 왔으면 좋겠다, 후딱 보고 싶다가도, 태풍 때문에 발이 묶였다 항께는 되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라예.‘ - 「그 섬에 그녀가 산다」 189p
그날 밤, 석준 씨의 방으로 난데없이 종이비행기 한 대가 날아들었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난 뒤였습니다. 어둠이 짙었으므로 창문을 열어 봄꽃 향기를 조금만 빨아들이고, 그러고는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똑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일어나 커튼을 젖히자 웬 종이비행기 한 대가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하였습니다. 석준 씨는 반갑다고 창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종이비행기는 초광속으로 열린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머리 위의 천장을 서너 바퀴 빙빙 돌다가는 그만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조난당한 병사를 보살피듯 석준 씨는 종이비행기를 주워 펼쳤습니다. - 「스핑크스도 모른다」 220p
처음 일본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누군가 일본 까마귀에 대해 들려준 말이 있었다. 4월이었는데, 교토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으슬으슬 춥더라. 마을 근처에 절이 많고, 절 바로 옆에 커다란 공동묘지가 있는데, 거기서는 또 유난히 까마귀가 울더라는 것이다. 마을과 공동묘지와 까마귀와 비, 그것들을 한 줄로 꿰면서 나는 내가 가는 일본이 바로 그런 곳이라고 우리 아이들 앞에서 겁준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무시무시한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떠올리며, 무서운 이야기 속을 걸어 들어가는 작중인물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어느 날 나는 까마귀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어느새 일본에 와 있었던 것이다. - 「쉽게 씌어진 시」 27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