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존재들에게 곁을 내주며
존재의 고유한 방식대로 감각하려는 가없는 노력
첫 번째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에서 “스무 살의 어린 신神”을 탄생시켰고, 두 번째 시집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에서는 하얀 유령들에게 눈부신 몸을 내어주었던 안미린 시인은, 이번 세 번째 시집 『희소 미래』에서는 미지의 존재에게 기꺼이 다가서며 그 존재를 온몸과 마음으로 감각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시집은 연작별로 묶여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희소 미래’ 연작에서 시인은 여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미지의 존재들을 부른다. 그의 부름에 응답한 “눈사람 형태의 미행성”의 존재를 인식한 후 “그 성분을 조사하고 검토하고 사랑하고”(「희소 미래 1」) 마침내 “이름을 불러”주며 “흰 청력의 눈사람 언어”(「희소 미래 3」)를 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2부 ‘ *’ 는 눈송이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내 옆의 “눈사람에게 전해진 / 연한 온기”(「*」)와 기쁨을 통해 시인과 그 주변의 변화를 드러내고, 3부 ‘유사 미래도 없이’에서는 다시 ‘희소 미래’ 연작을 이어가며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을 연장시킨다.
함부로 흰 눈밭 함부로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마음, 미지의 존재를 ‘나’의 방식이 아니라 ‘사색의 시간에서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고유한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너른 수용의 태도, “희고 부드”러운 시인의 목소리가 녹아든 이 시집은 곧 우리에게 당도할, 아주 희소해서 특별한 미래, 낙관의 의지로 단단해진 꿈의 세계를 미감의 시어와 이미지로 펼쳐 보이고 있다.
“도착하고 있어요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닌 채로”
Q : 당신에게 ‘시’란 무엇인가요?
A : 깊은 밤 유리 수조에 띄우는 은빛 우주선, 열쇠가 스치기만 해도 열리는 외계, (……) 꿈의 미로에 떨어진 꿈의 운석들, 그 모든 일기를 번역한 지도와 그 모든 지도를 번역한 일기…….
― 안미린, ‘세계 시의 날’ 기념 답변 中
독보적인 언어 감각으로 빛의 결을 따라 새로운 세계를 직조해나가는 시인 안미린, 그가 그려낸 시 세계 속 이미지는 섬세하고 투명한 유리구 같다. 시어에 빛을 비추면, 시어는 여러 갈래로 내뻗는 물살처럼 빛을 반사하며 내뿜는다. 특히 『희소 미래』에는 독특한 시간대인 ‘미未미래’와 ‘비非미래’가 등장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미미래’와 미래가 아닌 미래 ‘비미래’. 시인의 시곗바늘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닌 미미래와 비미래 사이의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범박한 언어로는 감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시간의 틈 속에서 미래는 깊어지다가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닌 채로” 현재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다.
꿈과 시간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미래의 빛을 감지하며 고요히 따라가는 그의 시편들은 우리가 딛고 선 땅 위의 오늘과 여기의 의미, “슬픔이 전부일 리 없는”(「희소 미래 6」) 삶의 다정한 기척들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Ⅹ』는 봉주연, 김연덕, 안미린, 유선혜의 개성을 담은 시집을 분기별로 선보인다. 젊고 세련된 감각으로 한국 시 문학이 지닌 진폭을 담아낼 이번 시리즈는 비주얼 아티스트 강서경 작가의 표지 작업과 함께해 예술의 지평을 넓혔다.
에세이 「청레몬의 고요함」은 작고 어린 ‘청레몬’ 한 알에서부터 시작해 끝없이 확장되는 시인의 단상을 투명한 이미지로 그려낸 짧은 에세이다.「청레몬의 고요함」에서 시인은 해변의 유령이 되었다가 눈사람이 되기도 하고, 희고 깨끗한 침대 밑에서 우연히 청레몬 한 알을 발견하는 여행자가 되기도 한다. 정제된 언어와 이미지로 구축되어 시로도 소설로도 읽히는 이 특별한 에세이는 마치 “아직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장르”처럼, 갓 굴러 떨어진 어린 청레몬처럼 청신하고 고요하다.
본문 중에서
눈사람의 첫 심장이 씨앗의 모든 것일 때
눈이 녹으면 심장을 돌려받는 것
― 「희소 미래 4」 부분
입김 서린 유리에 하트를 그려두는 것, 하트가 사라질 때까지 사랑스러워하는 것, 어린 영혼처럼 하트와 심장을 구별하지 않는 것
― 「희소 미래 7」 부분
어디선가 유리 종이 울리고
아마도 그것은 정오를 알리는 것이었지만 종이 멈추고 종소리가 남겨질 때
도착 없는 희수가 말해주었다
이 기억은 미래였구나
흰 금이 간 자리에
착지된 미래
― 「희소 미래 8」 부분
잠든 눈사람을 녹여서 비워두는 자리, 레몬 향을 풍기는 차고 투명한 신이 숨어드는지도 몰라서, 초여름에 얼린 과일들, 얼린 것이 열리는 겨울들, 첫눈으로 첫 눈사람을 만들자던 약속을 끝내 지키고 싶었는지도 몰라서
― 「 *」 부분
기억은 계절을 잠그고 다니는구나
겨울의 미래가 여름이듯이
― 「*」 부분
눈이 멈추지 않는 일기를 읽는다 눈의 일기에 적힌 숲의 주소를 믿는다 흰 숲의 주소를 향해 눈사람 사냥을 막으러 간다 눈사람 사냥이라니 믿을 수 없었지만 가없이 가엾게도 사냥이 일어나는 겨울 이 밤은 눈사람도 어둡구나 희고 어둡구나
― 「희소 미래─가없는 가엾음」 부분
멀리 내게 도착한 듯한 눈사람을, 천사인데도 유령인 척하는 윤곽을
그저 부드러운 기척의 마지막 눈사람을
여린 비에 깎이는 눈의 살결을, 눈사람에게 흰 볕은, 흰 늪은
눈의 눈꺼풀이 녹아내리는 꿈이라는 것을
― 「희소 미래─빛의 늪」 부분
……미래의 빛 속에서 옅은 그림자를 말아 쥘 때, 첫 단추를 놓치며 심장이 흔들렸을 때,
― 「희소 미래─어린 한국 시인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