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경계를 허물고, 비로소 내가 되는 연대의 기록

이서수 연작소설
몸과 고백들
이 책에 대하여
이서수의 『몸과 고백들』은 이미 출간되어 “문제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현대문학 핀 소설선 44 『몸과 여자들』을 비롯, 『현대문학』에 실린 세 편의 중·단편과, 새로운 단편 「몸과 금기들」을 함께 엮은 연작소설집이다. 이 연작소설집은 다양한 양태의 섹슈얼리티(논-바이너리, 동성애, 양성애, 범성애, 무성애 등)를 다루고 있으며 여성의 몸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넘어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과 방황하면서도 한 걸음씩 내딛는 ‘몸’의 여정, 해방의 감각을 열리게 하는 ‘몸’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깃들어 있다.
공감을 넘어 문제의식으로, 성별을 넘어 ‘나 자신’으로
마침내 육체성을 넘어서며 횡단하는 섹슈얼리티의 자유
“나는 글을 왜 쓰는가?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라는 작가 패티 스미스의 고백처럼, 이서수의 인물들도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터져 나오는 고백을 이어간다. 그동안 남성-여성, 이성애라는 “단순한 도식”이 “강제 점유해온 몸‘들’의 역사”에 “이채로운 생명과 사랑의 고백‘들’을 덧칠”하며. (민가경) 「몸과 여자들」은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어야 했던 곤경의 기억과 폭력의 역사를 반추하며 익숙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더해 『몸과 고백들』의 깊이를 더한 사유는, 여성과 남성, 육체성마저 넘어 자유롭게 횡단하는 섹슈얼리티의 ‘무경계 지대’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리하여 생물학적 성性,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gender를 넘어, 마침내 다른 종種과의 연결을 통해 ‘인간’의 차원을 초월하며 새로운 형태로 발화한다.
“태양의 성별이 무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저에겐 그저 태양이었습니다,”
―「몸과 무경계 지대」
“성별과 나이 등을 사회적 기준에 맞춰 분류하거나 정의하는 일에서 멀어진 (……) 저는 버섯인간이었고, 그건 혼종의 상태를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몸과 비밀들」
이서수는 “존재 그 자체를 느끼고 싶다”는 절박한 고백에 이어 “이미 네 안에 너 같은 사람의 우주가 다 들어 있어. 그걸 알면 되는 거”(「몸과 우리들」)라고 답한다. 그에 응하듯 이서수의 인물들은 비로소 자연과 연결된 새로운 존재, ‘혼종’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하여 ‘몸’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자유로이 횡단하며 모든 경계를 지워나가는 것이다.
‘공감’을 넘어서 ‘문제의식’으로 향하는,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조차 도약하는 힘. 그것이 바로 작가 이서수가 가진 저력이다.
단 한 번, 단 하나뿐인 고백을 당신에게 건넵니다
‘나’의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의 이야기를 만드는 고백과 경청의 연대
두 번째 소설 「몸과 우리들」에 등장하는 ‘유미지’는 같은 반 동급생인 ‘류은하’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며 자신은 남자도 여자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영화 <동방불패>의 임청하를 동경하는 류은하 역시 <동방불패>의 무림기서인 『규화보전』을 언급하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싶다고 응한다. 그들은 고백을 주고받음으로써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고백’이 성립되려면 그것을 들어줄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실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가만히 들어”달라는 말로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시작된다. 부끄러움을 딛고 소리 내어 말한 것을 누군가가 “경청”할 때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고백과 경청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 세계가 “포섭할 수 없”는 “이채로운 생명”들은 새롭고 자유로운 ‘몸’을 얻는다.
이제, ‘단 한 번’뿐이라고 말한 고백의 장에서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세 줄거리
「몸과 여자들」 : 1983년생 ‘나’와 1959년생 어머니 박미복. 두 여성은 서로 다른 ‘몸’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말라빠진 몸’으로서 온갖 부정의 경험을 겪어야 했고, 박미복은 ‘아름다운 여성의 몸’으로서 대상화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 성인이 된 ‘나’가 이혼을 선언하자 어머니는 ‘이혼한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냐’는 발언을 한다. 나는 더 이상 ‘내 몸’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행동’으로서 말해지는 존재라고 각성한다.
“나는 내 몸이 아니라 그냥 나야. 나는 내 몸으로 말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행하는 것으로 말해지는 존재야.”
「몸과 우리들」 : 여성으로서, 남성으로서, 어떠한 성별로도 규정되기를 원하지 않는 주인공 미지. 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논-바이너리인 류은하를 만난다. 영화 <동방불패>의,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모하는 주인공 임청하를 동경하는 두 사람. 그러나 아버지의 폭력을 당하던 은하는 아버지의 아들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고. 그런 은하와 달리 ‘나’는 여전히 남자도 여자도 아무것도 아닌 성별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너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랑 자는 거야?”`
「몸과 금기들」 : 어린 시절 ‘나’는 옆집에 사는 친구 ‘기정’과 비밀스럽게 자위행위의 경험을 나눈다. ‘나’는 기정과 ‘나’가 서로 자세는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던 (쾌락의) 지점은 같았다고 회고한다. 학원 여자아이들을 성추행하는 남자아이들을 역으로 추행할 만큼 소위 ‘발랑 까진’ 여자로 자란 나는, 섹스를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탐닉하며 그저 몸을 ‘제대로 쓰는’ ‘기능적인’ 섹스를 즐기는 사람이 된다.
“십자가 대신 텔레딜도닉을 짊어지고 저는 어디까지 가볼 수 있을까요.”
「몸과 무경계 지대」 : 레즈비언 커플인 ‘단밤’과 ‘나’는 특별한 섹스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위해 이태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이태원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곳에서 자신의 첫사랑‘들’을 회상한다. 트랜스젠더였던 귀족 언니, 유난히 여성스러웠던 소련에서 온 소년, 미군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나. 이들은 모두 경계에 선 자들이다. 그들을 가르는 모든 경계를 지우는, 경계가 없는 ‘무경계 지대’ 이태원을 헤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태양의 성별이 무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저에겐 그저 태양이었습니다. 단밤과 첫사랑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몸과 비밀들」 : 어릴 적부터 가난하게 살던 ‘나’는 이모의 권유로 화류계에 들어선다. 일을 시작한 업소에서 손님으로 온 남장여자 ‘요영’을 만난 ‘나’는 자연스럽게 요영에게 끌린다. 어느 날 손님에게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옆구리에선 버섯이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와 요영은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버섯’의 존재를 받아들이며, 버섯 채집에 나선다.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닌 ‘버섯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진화를 시작한다.
“부디 고백을 마친 모두가 평안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추천의 글
당신의 몸이 당신의 굴레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면. 몸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훌쩍 벗고 날아오르고 싶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서수 작가의 작품을 열렬히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젠가 눈부신 해방의 도구가 될 우리들의 몸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게 되기를. 이서수의 사랑스럽고 신비로우며 매혹적인 주인공들과 함께, 마침내 사랑의 도구, 예술의 도구, 마침내 해방의 도구로 날아오를 우리들의 몸을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정여울(작가)
차례
몸과 여자들 · 007
몸과 우리들 · 093
몸과 금기들 · 153
몸과 무경계 지대 · 083
몸과 비밀들 · 235
작품해설 · 281
작가의 말 · 302
추천사 · 306
작품해설
모든 형태의 고백‘들’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발화자에 의해 직접 수행됨으로서 발화자 자신을 가장 먼저 위로해왔다. 그것이 애초에 겨냥했던 것은 진실도 아니요, 인정의 쟁취도 아니요, 단일한 지배 기반을 찾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고백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기 ‘안’의 이야기를 자기 ‘바깥’에 스스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니 자꾸만 더듬거리고, 주저하며, 중단되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군가의 고백 앞에 우리의 행위와 소리 일체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니던가. 고백은 결국 누군가와의 연결을, 단지 당신의 상관을 필요로 한다. 특히 잠자코 경청하는 일이 ‘네 말이 맞다’는 신용을 상대에게 보태주는 일이라면, 그리하여 경청되는 사건이 어떤 목소리에 권력을 덧대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이 고백들은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머잖아 정치적인 급진화의 형태로 도래할지 모를─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침묵해온 몸‘들’의 재배치라는 당면 과제 앞에서 이서수는 경청의 장을 여는 일로 자기 몫을 넉넉히 보탰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겐 무엇이 남았을까.
그건 아마 이런 것들이겠다. 네가 그동안 해오지 못한 ‘그 말’을 내게 조금 더 해달라고 말하는 일. 나의 ‘몸’을 그 발화 장소로 내어주는 일. 목소리‘들’의 재분배를 실천하는 ‘몸’-되기. 그러니 다시금 요청건대, 독자여, 단 한 번, 그리고 단 하나뿐인 이 고백에 경청을 요한다.
-민가경 「작품해설」 중에서
책 속에서
영석 언니, 사람들은 섹스를 마음껏 즐기는 게 건강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나처럼 섹스가 싫은 사람도 존재해.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은 폭력으로 느껴져. 섹스에 내 몸을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까.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깊은 잠을 자는 것 엔 내 몸을 실컷 사용하고 싶지만 섹스엔 사용하고 싶지 않아. 나 는 그런 사람이야. 만일 내가 섹스를 한다면, 나하고만 하고 싶어. 내 몸에 상처 입히지 않고, 내 마음을 깊이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 「몸과 여자들」 中
성별로 인한 혼란스러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저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애인이 어머니에게 해준 말들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어머니는 저를 토닥이며 말했습니다. 미지야, 너는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면 돼.
― 「몸과 우리들」 中
혹시 신이 우리에게 벌을 내린 거라 생각하시나요?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은밀히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아니었습니다. 신은 우리의 놀이를 거의 태초부터 알고 있었을 테니 화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른들이나 화를 내는 법이지요.
― 「몸과 금기들」 中
저에겐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들’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유년 시절에 사랑한 이들이 다소 많습니다. 제일 처음 반한- 첫사랑은 귀족 언니, 그다음은 붕괴된 소련에서 온 아이, 마지막은 기지촌에서 술집을 운영하던 어머니와 주한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주나였습니다. 저는 그들 모두를 과감히 첫사랑이라고 통칭하려 합니다.
― 「몸과 무경계 지대」 中
혼종이 되면 우리가 거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심지어 지대와 금기와 비밀과도 연결될 수 있어요. 금기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 금기와 연결되는 것이고, 비밀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비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지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대와 연결되는 것이지요. 여자들, 타인들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과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몸은 그것 자체로 우리입니다.
― 「몸과 비밀들」 中
지은이 이서수는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 『엄마를 절에 버리러』, 중편소설 『몸과 여자들』, 장편소설 『마은의 가게』, 『헬프 미 시스터』, 『당신의 4분 33초』 등이 있다. <젊은작가상> <이효석문학상>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