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식인의 문학과 철학, 예술에 대한 사유
시대와 삶을 관통하는 냉철한 성찰!
불문학자이자 평론가로 한국문학과 반세기를 함께 해온 정명환의 『인상과 편견』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2011년 1월부터 2012년 3월까지 총 15회에 걸쳐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던 「인상과 편견」을 재차 다듬어 출간한 것으로, 실존적 문제의식과 냉철한 비평의식으로 60여 년의 세월에 걸쳐 기록한 문학과 삶, 문명과 세상을 통찰하는 내밀한 단상들을 모았다.
시대의 재발견이라 할 이 주옥같은 단상들은 삶과 사유에 관한 학자의 끊임없는 탐구로서 시대마다의 예리한 통찰의 기록이다. 문학에 대한 고찰과 그 연구의 필요성, 텍스트 읽기의 접근방식이나 그 가능성에 대한 필자의 문학론이 명료하게 담겼다. 지성의 깊이를 체험하게 하는 이 열린 단상들은 예술을 향유하는 절제의 미학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사유의 역동성으로 문학의 기반 위에서 예술과 철학, 그리고 사회문제 전반에 천착하는 광대무변의 지평을 보여준다. 특히 서구의 몰락을 초래할 자유와 체제,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려,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관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비판, 절대적 타자로서의 자연예찬, 본질에서 벗어난 종교에 대한 가차 없는 엄격함 등 쾌도난마의 비판적 통찰로 통쾌한 감흥을 선사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보다 지적 발견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한다.
우리 시대의 준엄한 스승이며 올곧은 지성 정명환의 문학, 철학, 언어, 예술에 대한 통찰이 담긴 이 단상들을 통해, ‘성찰과 그에 따른 끝없는 문제의식과 문제제기’라는 사유방식을 통해 가장 주관적이어서 가장 객관적일 수 있는 저자의 창조적 자유정신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끊임없는 방황과 모색
장 구분도 제목도 없이 시대별로 저자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사르트르부터 푸코,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상가들의 실존주의 철학과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 현 시대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피, 종교에 대한 갈등 등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초월적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저자의 방황과 모색의 시간을 읽을 수 있다. 일상생활, 책읽기, 지인, 가족과의 관계를 통한 사유마저도 저자가 얼마나 치열하게 삶과 대면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한 예로, 일견 비논리적이고 모순투성이인 듯 보이는 어린아이의 노래를 통해 체계와 의미 이전의 순수한 언어 창조의 기쁨을 깨닫게 한다.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이나 대화에서는 다정다감한 산문의 미학까지 엿볼 수 있다.
죽음을 대하는 새로운 시선, 열락을 향유할 수 있는 최상의 음악감상법, 포스트모던 시대 철학의 한계 등 예지가 빛나는 지식인으로서의 사유와 고뇌가 곳곳에서 번뜩인다. 또한 반체제 지식인들이나 이데올로기에 관한 냉철한 분석에서 문학, 철학, 예술분야를 막론한 총체적인 인문학에 관한 간략한 비평, 진지한 사유에 곁들인 엽편소설 같은 삶에 관한 은유와 풍자는 단상의 묘미를 더욱 드러나게 한다. “삶과 여건에 대한 냉철한 성찰, 그 여건에 대한 끝없는 이의제기”라는 저자의 문학관을 확고하게 한 실존적 문제의식과 비평의식, 그 사유의 발자취인 것이다. 그것은 사유의 세계를 지리멸렬하게 하는 이 부끄러운 시대에 우리의 영혼을 불러일으키고,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 문학관, 학문관이 온전히 개화하지 못했던 한국 지성의 빈곤이라는 태생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지성으로서의 모색, 비판은 자유로운 영혼이자 올곧은 학자이기에 가능했다. 세계 문학과 사상의 체계를 정밀하게 분석해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적 세계사적 현실의 한 구성적 가담자로서의 열정과 애정, 지식인으로서의 윤리 등을 고민하는 학자이자 굴곡 많은 시절을 살아야 했던 한 개인으로서의 심상이 간결하면서도 심도 있게 정리된 이 기록들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에게는 더없이 귀한 양식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누구에게나 세계를 읽는 깊은 사유와 진정한 견해를 유발하게 할, 그것을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종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내 존재로서의 삶을 더욱 깊이 탐구한 한 원로 학자의 치열한 이 삶의 궤적은 한국이란 토양과 시대를 관통하는 도저한 사유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인 것에 큰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살아 있는 지성의 목소리를 통하여 한국 문학과 철학이 지나온 험난한 길을 비로소 되돌아보며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본문 중에서
나의 어린 외손 경은과 한명漢明에게 “나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답으로서 모기, 퍼리, 새, 나비, 바행기 등이 나왔다. 그러자 한명이 덧붙였다. “해와 달.”
해와 달이 난다는 것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한명은 무슨 뜻에서 그렇게 말했을까? 그의 밑에 깔려 있는 원초적 인식은 무엇일까? 그 애의 인식은 나의 상상을 자극했다. 지상에서 떨어져 하늘에 걸려 있는 것들은 모두가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와 달이 새나 나비와 마찬가지로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저녁이 되면 매일 땅으로 다시 내려앉아 고이 잠들고 이튿날 아침이면 종달새처럼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해와 달…….
나는 그 애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일부러 안 물어본 것이다. 연전에 국어교육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한 참고문헌으로서 프랑스 소학교의 저학년용 언어교육 지침서를 살펴보았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의 말이 적혀 있었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들이다. 교사는 그것에 대해서 절대로 합리적 설명을 해서도 안 되고 또 어린이에게 그런 설명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상상의 나래를 꺾어버리는 짓이다.” 초현실주의는 어린이의 현실주의이다.
-본문 129~130p
개인으로서의 근원적인 욕망(예컨대 사랑, 앎, 창조, 놀이, 죽음, 초월)의 발현으로서 문학을 생각하지 않는다. 좀 난폭하게 말해보자면 그들은 추상적 개념을 다루는 학자가 되기 위해서 무수한 개인의 그런 근원적 욕망의 실존적 중요성을 등한시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사회학적 접근이 있다면, 그것은 한 시대나 사회가 어떤 특정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그런 욕망에 내포된 보편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가령 19세기 전반기에 낭만주의자들이 보여준 초탈의 지향이 자본주의 성장기의 소산이긴 하지만, 초탈의 지향은 인간의 본연적 욕망의 한 가지이며 속악한 자본주의 성장기라는 시대였으니까 언제보다도 특출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문학은 자폐적인 아카데미 내에서의 연구로부터 다시 실존적 체험의 장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삶에 대한 치열한 질문과 결부되지 않은 문학연구는 한 전문적 직업에 불과하다. 더구나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의 세계에서는 처량한 처지에 빠진 직업에 불과하다.
-본문 151~153p
욕망의 해방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해방은 윤리적 요청의 배척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사실, 개인적 욕망은 공생을 위한 윤리적 요청에 의해서 완전히 초극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는데 그 억압이 축척되면 반사회적으로 폭발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욕망의 배출이 이루어지도록 고려하고 허락한다. 그리고 예술의 기능의 하나는 바로 그 배출의 승화에 있다. 따라서 윤리와 예술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반대로 공존관계가 성립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윤리를 위한 욕망의 통제와 예술을 통한 욕망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요청 사이의 줄타기―여기에 현실적인 지혜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문 174p
어느 철학자에게 음악을 자주 듣느냐고 물어보았다. 시간이 아까워서 잘 듣지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아아, 불쌍도 하여라! 그런 철학자는 대개의 경우 독창성 없는 해설자이거나, 기껏해야 하류의 분석철학자이거나 관념론자이다.
이런 철학자에 대한 반증이 될지 모르지만, 니체의 경우에는 음악은 생채 있고 약동하는 철학으로의 길을 연다. “음악은 정신을 해방하고 상념에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음악가가 되면 될수록 더욱 철학자가 된다는 것에 주목한 사람이 있었던가? 추상이라는 잿빛의 하늘은 번개의 섬광에 의해서 전율하는 것 같다.”
-본문 240~241p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의 차이는 동일화identification와 원격화distantiation의 차이이다. 음악이 표상하거나 상징하는 것을 ‘나의 세계, 나의 욕망, 나의 감정’ 속으로 끌어들일 때 대중음악이 있고 음악의 대중화가 있다. 반대로 소리의 세계가 나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면서도 그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힐 때 (마치 말라르메의 ‘창공’처럼) 고전음악이 성립한다. 그 음악이 표상하려는 것이 노예의 합창이건 천사들의 화성이건 간에, 그 가락에서 슬픔이나 기쁨을 느낀다 해도 그것은 내가 체험하지 못했고 또 체험할 수도 없는 순수한 슬픔과 기쁨이며 따라서 그것은 숭고하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그러한 승화된 순수감정의 체험을 허락하지 않는다.
-본문 243~244p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극히 초기의 암이긴 하지만 식도 바로 밑에 생겨서 내시경 수술이 불가능하고 외과수술로 위 전체를 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말이다. 별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산다는 것은 다만 연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소 우울하다. 염담恬淡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되뇌면서 자신을 달래본다.
수술 날짜까지 약 3주 남아 있다. 그 시간이 황량한 사막처럼 펼쳐져 있다. 수술 후 괴로움을 겪을 때는 이 사막이 마치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화원처럼 그립겠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읽으면서 그 사막과 같은 시간을 채워보려고, 며칠 전부터 읽어 내려오던 쿤데라의 『농담』을 계속해 읽었다. 한 권의 소설을 끝까지 읽은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도 철저한 페시미즘이, 이렇게도 신랄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겠는가? 모든 일이, 모든 인물이 하나도 맞물리는 일이 없다. 모든 것이 착오의 연속이다. 인생의 디테일 하나하나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뜻 없고 부조리하게 만드는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카의 절망을 극단까지 몰고 간 듯한, 현대문학 최대의 걸작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나 개인으로서는 생명을 좌우하는 큰 수술을 목전에 두고 그 페시미즘의 에센스와 만났다는 것이 또한 쓰디쓴 농담이다.
-본문 327~328p
프롤로그 중에서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니체의 단장斷章들을 읽는다면, 그 단장 하나하나에 그의 삶의 철학의 완전한 체계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일은 비단 니체만이 아니라 라 로슈푸코나 파스칼, 또 근자에는 아도르노의 경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단상들은 그런 종류의 깊은 체계와 견주기는 어림도 없다. 또한 그것들은 나의 사상적, 내면적 성장의 기록조차 아니다. 내 생각과 관심과 체험은 일정한 방향으로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 표현들은 변덕스러우며 서로 모순되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나는 옛 공책들을 들추어 보면서 그 점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평생을 두고 정처 없이 떠돈 나의 방황의 궤적, 그것이 이 단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