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건너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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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회

책상에 어른거리던 빛이 사라진다.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벌써 어둠이 가까이에 온 걸 보니 정말 겨울이구나 싶다. 아스팔트에 내리는 소낙비가 반갑고 낮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여름도 좋지만 모든 자연물이 다가올 계절을 대비하며 한 템포 쉬어가는 겨울도 나는 무척 좋아한다. 발밑에서 산뜻하게 부서지는 낙엽 소리나 밟으면 투명해지는 눈도 그중 하나이지만 한 해의 끝과 시작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 나 자신을 곰곰이 되돌아보게끔 만드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 좋거나 나쁘다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을 떠나서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받아들이고 숨을 고른 뒤 가지치기하는 순간들. 당장은 작별하지 못하더라도 떠나보내야 할 기억을 추리기도 하고 더 오래 남기고 싶은 장면은 한 번 더 살펴보기도 하면서 내 몸에서 자란 기억을 차분하게 정돈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 과정이 나에게도 쉽지만은 않다. 하나의 기억은 그리 단순하지 않으니까. 그 안에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있고 무한한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직 더 듣고, 이어 가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섣부른 판단으로 그 가능성을 전부 닫고 잘라버리는 건 아닌지.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지 나도 모르게 망설이게 된다. 만약 기억이라는 거대한 나무를 볼 수 있다면 내 나무는 숙련되지 않은 초보 정원사가 열심히 가꾸었으나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고 제멋대로 뻗어나간, 어설픈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면 아무리 좋은 구석이 많은 겨울일지라도 감기에 든 것처럼 몸과 마음이 추울 때가 있다. 장갑을 껴도 어쩐지 손끝이 시린 것 같고, 머릿속이 소란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길어지면 나는 본격적으로 겨울을 건너갈 채비를 한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겨우내 먹을 모과청을 담는 것. 모과 몇 알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가는 거긴 하지만 꽁꽁 얼어붙은 생선이나 붉은 바구니에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는 귤, 대야에 담겨 있는 곡식을 구경하며 실컷 거닐다 보면 몸에 활기가 도는 것 같다. 모과를 사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덤으로 조금은 뿌듯한 마음도 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 작은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먹고사는 데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느라 정작 나를 돌보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거나 그마저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일수록 나의 기분과 건강이 우선시되는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한다.

검은 봉지에서 모과를 꺼냈더니 배즙과 비슷한 향이 부엌에 은은하게 퍼진다. 큰 그릇을 꺼내 모과 다섯 알을 담아놓고 미지근한 물에 깨끗이 씻어준다. 식초나 소금, 베이킹소다를 살짝 이용해 모과에 묻은 점액을 닦아주는 것도 좋다. 준비가 다 끝났다면 이제는 씨앗을 제거하고 채를 썰 차례. 숭덩숭덩 적당한 크기로 모과를 등분해 씨앗을 덜어내고 채 썰 듯 여러 번 칼질하면 사실상 모든 과정을 해낸 셈이다. 채칼을 사용하면 품이 덜 들긴 하지만 나는 느리더라도 천천히 칼로 써는 방식을 택한다. 분주히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잡념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리드미컬해지는 도마 소리를 듣다 보면 둔해졌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채를 다 썬 다음에는 설탕과 꿀을 아낌없이 반반 비율로 부어주고, 꿀에 설탕이 완전히 녹을 때까지 저어주면 완성! 취향에 따라 대추나 생강을 더해도 되지만 나는 모과 본연의 맛을 즐기는 걸 선호해 다른 재료를 추가하진 않았다.

행주로 도마를 깔끔하게 닦아준 다음 찬장에서 유리병을 조심히 꺼낸다. 작고 둥근 유리병은 한때 무화과잼이 담겨 있던 것이었고, 넓이가 일정한 큰 유리병은 얼그레이 밀크티가 담겨 있던 것이었다. 언젠가 쓸 곳이 생기진 않을까 싶어 모아 온 유리병들. 나의 비밀 찬장에는 유리병 외에도 꽃다발을 감싸던 크림색 포장지나 종이 완충재, 꽃이 그려진 쇼핑백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정리해서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선물을 건네준 이들을 떠올리면 작은 것일지라도 아까운 마음이 든다. 다소 미련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습관은 예상외로 실생활에 보탬이 될 때도 많다. 오늘처럼 모과청을 옮겨 담을 공병이 필요할 때나 급하게 선물을 사고 따로 포장하지 못했을 때 나의 습관이 만들어 낸 찬장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소독을 끝낸 유리병에 모과청을 나누어 담았다. 티스푼에 살짝 찍어 먹어보니 단맛이 향긋하게 올라왔다. 큰 병에 담긴 모과청은 겨울이 끝날 때쯤 동이 날 것이고 작은 유리병에 담긴 모과청은 친구에게 전해줄 것이다. 노랑 빛깔이 아름답게 감도는 이 작은 유리병 속 모과가 친구의 긴 밤을 조금은 밝혀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주가 되면 모과는 꿀과 어우러져서 한층 더 깊은 맛을 낼 것이다. 작년과는 또 다르게. 계절이 한 알 한 알 살뜰하게 가꾸었을 열매를 떠올리며 나라는 과실도 잘 보살펴볼 생각이다.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잎을 틔우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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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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