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건덕후는 아니지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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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

우주시대를 다룬 SF

건담은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계의 가장 유명한 상징 중 하나다. 건담을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은 많겠지만, 건담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에반게리온을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은 많겠지만(나도 그중 하나다), 에반게리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듯이.

1979년에 최초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의 세계는 어느 미래에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수를 인류가 넘어서서, 인류 다수가 우주로 이민해 살게 되었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인류가 유사 지구환경을 구축하는 스페이스 콜로니라는 거주구를 건설한 첫해를 우주세기(Universal Century, U.C.) 원년으로 제정하고, 서력 대신에 우주력을 사용하는 우주시대가 열린다. 우주 이민자=스페이스노이드들은 지구 주변에 설치된 수백 기의 스페이스 콜로니 속에서 살아간다.

수많은 건담 작품 중 이러한 설정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은 우주세기 건담이라 불리며, 모두 작품명에 ‘U.C. 0000’과 같은 식으로 어느 무렵의 이야기인지를 표기해두고 있다. 이러한 설정을 공유하지 않는 건담 작품은 비우주세기 건담’ ‘건담등으로 따로 분류해서 취급한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이야기를 해둬야 비로소 작품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번거롭게도 알아둬야 할 것이 많은 시리즈이긴 하다.

 

배경 이야기

최초의 건담 작품인 기동전사 건담1)U.C. 0079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온 공국과 지구 연방 사이에서 일년전쟁이 벌어진 해이다. 이 전쟁에 우연히 휘말리게 된 주인공 아무로 레이를 비롯한 소년소녀들이 겪는 전쟁의 비극이 건담의 주된 내용이다.

첫 반세기가 지난 우주시대, 지구 연방과 스페이스 콜로니 집단 사이는 경제 및 정치 문제에서 불평등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스페이스노이드 중에는 자치권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대부분 묵살당했다. 이런 와중에 지구에서 가장 먼 사이드32)의 정치가 지온 즘 다이쿤이 뉴타입론을 주창하고 스페이드노이드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사이드3은 지오니즘 아래 규합되고, 마침내 지구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며 지온 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는 지구 연방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니었고, 갈등은 심화된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지온 즘 다이쿤은 급사하고, 후사를 데긴 자비가 이어받으며 자비 가문이 지온 공국을 이끈다. U.C. 00791, 지온은 지구 연방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이것이 일년전쟁, 또는 지온독립전쟁이라 불리는 우주 대전의 대략적인 배경이다.

주인공 아무로는 지구 연방의 기술 사관인 아버지 템 레이를 따라 사이드7로 이주한 지구 출신의 소년이다. 사이드7은 지구 연방의 기술 연구소 건설지로 내정되나, 지온의 정찰대가 선공하여 순식간에 초토화된다.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사이드7의 거주민들은 신조 전함 화이트베이스에 탑승하게 되고, 아무로도 살아남기 위해 우연히 연방의 비밀 병기인 건담의 파일럿이 된다.

 

지난 애니메이션들과는 달랐던 작품

당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로봇 만화의 다수는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고, 정의로운 주인공이 탑승한 로봇이 멋지게 합체하고, 주인공 로봇이 동료들과 함께 시련을 딛고 악에게 승리하는, 우렁차게 필살기를 외치는,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세계평화를 지키는 내용이었다. 기동전사 건담은 과도기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주인공 로봇이 (애매하지만) 합체도 하고 적도 있긴 하나, 정의의 편과 악의 편으로 이분하기에는 애매하고, 주인공은 내성적이고 퉁명스러우며 전투에 나가기를 싫어한다. 이렇듯 건담에는 로봇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이 익히 보아왔던 익숙한 요소도 있지만 낯선 요소도 뒤섞여 있어, 어린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작품이었으리라 생각된다.3) 주제가 또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여느 로봇 애니메이션처럼 정의롭고 우렁차지만4) 실제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우울하다.

전쟁 속에서 선과 악은 분명하게 나뉠 수 없었고, 어린 주인공들은 악을 뿌리 뽑는 정의의 사도이기보다는 원치 않는 전투에 떠밀리는 전쟁의 피해자였다. 로봇들은 천하무적이 아니었고, 인간과 똑같이 총포에 맞으면 쉽게 부서지고 터져 나갔다.

 

민간인과 소년병들의 피해, 살인 체험

사이드7의 위기 상황 속에서, 방치된 건담에 제멋대로 탑승하면서 아무로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험을 한다. 지온군 병사 데님을 살해하는 대목이다.5) 데님이 탑승한 지온군의 로봇 자쿠II가 폭파하여 사이드7에 더 이상의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스페이스 콜로니가 부서지면 콜로니 안의 공기와 사물들이 우주로 빨려 나가니까), 아무로는 빔샤벨(빔을 검의 형태로 출력한 무기)로 콕핏(조종석)을 노려 파일럿만 죽이려 시도한다. 극장판을 기준으로 이 최초의 살인 장면은 침묵 속에서 20초가 넘게 지속된다. 건담은 확인 사살을 위해 빔샤벨을 찌르고, 비틀고, 자쿠II는 꿈틀거리다 쓰러진다. 아무로는 심적 압박과 공포에 빠진 얼굴이다. 전쟁이 평범한 소년을 급작스레 살해의 현장으로 내몬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와 비극은 건담이 집중적으로 환기하는 주제이다. 극의 시작은 연방군의 군사 연구소 건립 예정으로 사이드7에 살던 시민들이 대피 명령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무로와 함께 일년전쟁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하야토 코바야시는 아무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발언을 하며 첫 등장 한다. “아무로의 아버지 같은 군사 기술자가 여기에 안 왔으면(우리가 내쫓길 일도 없었을 텐데).” 그 말대로 사이드7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 지역이 되고, 화이트베이스에 탑승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은 모두 죽고 만다. 주인공 일행은 생존을 위해, 또한 브라이트 노아와 같은 군인의 협박으로 인해 전쟁에 투입되고, 아무로는 원치 않는 전투를 무리하게 수행하다가 PTSD에 시달리게 된다.

 

로봇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드라마

위에서 편의상 로봇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건담에 출연하는 기체들은 작중에서 로봇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파일럿이 탑승해 조종하는 탈것들은 크기와 형태 등에 따라 모빌슈트(Mobile Suit, MS)’ ‘모빌아머(Mobile Armor, MA)’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데, 직역하면 기동복, 기동갑옷 정도가 되겠다. 인간이 전투를 위해 강화복을 입는다는 개념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건담은 로봇 대 로봇이 싸운다는 느낌보다도 인간 대 인간이 싸운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준다. 강화복을 입은 인간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파일럿들은 전투 중에 아군뿐만 아니라 적과도 끊임없이 대화하고, 말다툼하며, 연출상으로는 로봇의 위에 파일럿의 얼굴이나 표정을 컷인으로 삽입하는 기법이 자주 활용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서로 기체에서 나와 총을 들고 다투는 장면도 많다.

토미노 요시유키가 감독을 맡은 건담 시리즈는 토미노가 가진 이상한 센스 탓에 대사가 전반적으로 독특하다. 문장이 끝까지 제대로 이어지거나, 평범하게 대화가 오가는 경우가 드물 정도다. 주어가 빠진다거나, 말끝이 생략된다거나, 서로의 말을 비꼬면서 트집을 잡는다거나, 서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다거나, 뜬구름을 잡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팬들은 토미노부시(富野節, 토미노 화법)’라고 칭한다. 토미노부시를 통해 영화나 소설 속 가공된 문장이 아닌, 일상 대화와 같은 생생함이 생기는 것이라고, 팬들은 토미노부시를 설명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도 전혀 일상에서 쓰일 만한 화법은 아니다. 가령 극의 후반부, 세기의 라이벌인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이 에페를 들고 검투를 벌이는 대목을 살펴보면 이렇다.

             

아무로: 지금 라라아가 말했어. 뉴타입은 살인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고…….

샤아: 현재로선 인간은 뉴타입을 살인의 도구로밖에 쓰지 않아. 라라아는 죽어갈 운명이었던 거다.

아무로: 네 녀석도 뉴타입이잖아!

 

샤아가 저 하고 싶은 말로 받아치는 대목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 있어도, 이에 대한 아무로의 응답은 이상하다. “네 녀석도 뉴타입이잖아!”라고 외치는 아무로의 말을 올바른 맥락으로 읽자면, “너도 뉴타입이면서 라라아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냐? 그럼 너를 믿고 따르다 죽어간 라라아는 뭐가 되냐?” 정도일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말해도 될 텐데, 발끈하는 한 문장으로 완전히 압축해버린 것이다. 그나마 나은 상황도 이 정도이기에 건담은 종종 대화에서 그 행간 사이에 숨은 뜻을 읽어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를 통해 생기는 약간의 난해함은 건담의 단점인 동시에 개성이다. 이 토미노식 어법에는 기묘한 맛이 있어, 자꾸 듣다 보면 괴식에 빠지듯이 중독되고야 마는 것이다.

 

주인공이 정의의 편도, 민중의 영웅도 아닌 이야기

기동전사 건담은 정의가 승리하는 이야기도, 영웅이 찬양받는 이야기도 아니다. 아무로 레이는 지구 연방의 편에 서서 지온의 병사들을 학살하지만, 이는 지구 연방이 정의의 편이어서가 아니며 아무로가 그것을 원해서도 아니다. 지온군에게 연방의 하얀 악마라 불리는 아무로는, 그저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어른들의 전쟁에 투입된 희생양에 불과했다.

이는 아무로 레이가 최초의 뉴타입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점과 대비되며 더욱 비극적인 색채를 띤다. 지온 즘 다이쿤이 주창한 이론에서 유래된 뉴타입, 타인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우주 시대의 신인류를 뜻한다. 이들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 정신과 영혼으로 교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이들이다. 이러한 특성상 뉴타입은 보통 사람들보다 감각이 예민한데, 전쟁은 평화를 위해 등장한 신인류마저 병기로 사용한다는 것이 건담의 핵심 주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이 전쟁을 그려내는 것으로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모순이 생긴다는 점이다. 건담 시리즈는 전쟁의 끔찍함을 주제로 내세우지만, 그러는 와중에 이 참혹한 전쟁은 작품을 통해 멋지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작품에서라면 진지하고 참혹하게 그릴수록 아름다워지는 것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몸이 찢어지지 않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전쟁이란 그저 아름다운 불꽃놀이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좋은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망원경을 들고 전쟁 구경을 하러 나왔던 사람들의 일화처럼 말이다. 이 왜곡증은 콜로니 테러를 유성우에 빗대는 스타더스트 메모리와 같은 작품을 지나며 갈수록 심해져, 마침내 2015년 작품인 철혈의 오펀스에서는 더없이 끔찍한 모양새가 되고 만다.

적으로 규정된 것들을 모두 죽이면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는가? 영웅은 찬양받고 행복해지는가? 기동전사 건담이 이러한 질문이라면, 후속작인 기동전사 Z 건담은 그에 대한 대답이다. 지구 연방에 의해 위험인물로 간주되며, 교외의 어느 저택에 갇힌 채 우울하게 살아가는 아무로의 모습은 그의 희생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1) 팬들은 퍼스트 건담이라고 칭한다. 이 글에서도 편의상 다른 건담과 동시에 이야기할 때는 퍼스트로 칭한다.

2) '사이드는 스페이스 콜로니가 군집된 지역을 구별하는 지역 단위로, 각 사이드는 우주의 국가 내지 주로 보면 적당할 것이다.

3) 본 방송 시청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후일 재방송과 완구, 극장판이 성공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위상의 토대가 마련된다.

4) 불타올라라 건담/그대여 달려라/아직 분노에 불타는 투지가 있다면/거대한 적을 쏘아라/정의의 분노를 발하라 건담/기동전사 건담” -기동전사 건담주제가 가사.

5) 정확히는 데님을 죽이기 전에 이미 데님의 부하 진이 탑승한 자쿠II를 일도양단하여 폭파시키지만, 어쩐지 건담에서는 기체의 파괴와 파일럿의 살해를 구분 짓는다. 기체가 파괴되면 대부분의 경우 파일럿이 죽는 건 당연하지만, 이쪽은 전쟁 중이니 어쩔 수 없이 병기를 파괴한 것이지, 파일럿을 죽이려고 한 건 아니다라는 합리화가 작동하는 것도 같다. MS 격추가 아닌, 사람을 직접 죽이는 대목에서 주인공들은 주저하거나 감정에 혼란을 겪는다.

6) 그리고 이 토미노부시는 훗날 역습의 샤아를 통해 팬들 사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떠도는 이야기를 낳는다. 이 이야기는 역습의 샤아를 다루면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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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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