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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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

“덕후 일기를 써주세요.”
이 연재는 이런 제안과 함께 시작된다. 참으로 난감한 점은 내가 ‘덕후(오타쿠)’가 아니란 점이다. 그러나 종종 덕후로 오해받는 것 같다. 게임을 하니까?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니까? 가끔 음악 이야기를 해서? 그밖에 잡다하게 서브컬처에 속하는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으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덕후가 아니다.

 

대강 201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오타쿠 인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듯하다. 오타쿠 문화가 힙스터/레트로  문화와 뒤섞이며 인플루언서들이 스스로를 덕후라고 칭하고, 소위 ‘인싸’들이 「귀멸의 칼날」을 보며 너도나도 ‘오타쿠 되기’에 동참하려는 작금이지만 어쨌든 나는 오타쿠가 아니다.
여기엔 어떤 겸손도 경멸도 도피도 없다. 오타쿠인 게 부끄러워서 숨기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자칭 오타쿠들이 너무 많아져서 ‘오타쿠 되기’를 피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기준으로 볼 때, 내게는 오타쿠가 되기에 필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어서 그렇다.
내 생각에 오타쿠란 그저 일본산 서브컬처 문화를 즐긴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타쿠 문화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으로 굴러가지 않고 ‘팬덤 문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을, 작품을 사랑해야 하고, 공통된 것을 사랑하는 이들끼리 이를 나눠야 하는 것이다.
내게는 오타쿠가 될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능력이 없다. 어쩔 수 없게도 성정이 그렇다. 좁고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얕고 넓게 걸쳐 있기를 더 선호하는 편이고, 파고드는 순간에도 그것에 애정을 쏟거나 열광하지 못한다. 알게 된 것들을 굳이 전파하려고 ‘영업’하지도 않고, 관련 커뮤니티에서 활동하지도 않는다. ‘나만 알고 싶다’ 같은 마음 때문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마음이었으면 더 나았을 것 같다. 그런 마음에도 사랑은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저 게으르고 아무 생각이 없을 뿐이다. 뭔가를 깊게 사랑하지 못하는 성정은 덕후 되기에 있어 큰 걸림돌이다.

 

덕후. 오타쿠에서 ‘오덕’으로, ‘오덕’에서 ‘덕후(=덕)’로, 그 단어가 조금씩 부드럽게 뭉개지면서, 부정적인 뉘앙스가 옅어지는 만큼* 그 단어가 따라붙는 영역도 넓어져왔다.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피규어 등에 열광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정도를 넘어, 요즘은 뭔가에 ‘홀릭’해 있으면 다 덕후라고 한다. 아이돌덕후, 책덕후, 음덕후, 연뮤덕, 성덕, 식물덕, 철덕후, 겜덕후, 컴덕후, 금융덕후……. 하, 정말이지 끝도 없다. 야, 나는 너희들이 솔직히 부러워. 무언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
여러 장르의 이러저러한 작품들을 둘러보고 알아보는 것. 내게 그것은 덕질이라기보단 그저 시간을 죽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에 불과하다. 아, 시간이란 늘 너무나도 부족한 동시에 견디기 어려울 만큼 넘쳐나는 무엇이다. 늘 시간이 있기를 갈구하면서도 막상 눈앞에 시간이 있으면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지?’ 하는 막막함뿐인 인생. 나는 그런 시간을, 인간을 만나는 데 쓰거나 성공을 위해 투자하는 대신에 그저 죽이기로 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런 쓰레기 인생!
이 글은 내가 시간을 죽이는 데 동원한 군대들에 관한 일지이다. 인간을 만난 시간보다는 작품을 만난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많으니까, 친구가 많은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작품들을 경험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말고.) 어쨌든 내가 보고 들어온 여러 분야의 작품들에 관해 제멋대로 쓴 감상문이라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될 것 같다. 어떤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이라도 알고는 있는 유명 작품일 것이고, 어떤 작품은 아는 사람이나 아는 초마이너한 작품일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아마 내가 좋아하는 70-80년대 ‘유물’들 위주일 가능성이 높은데, 사정이 이렇기에 ‘덕후 일기’가 아니라 ‘노인정 일기’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덕후가 아닌 사람이 쓰게 된 덕후 일기라서, 진짜 덕후 여러분들께는 미안하게 됐다. 덕후분들은 글이 자기가 아는 것과 다르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비판하면 좀 화를 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덕후는 얼마 없을 것 같지만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미리미리 사과를 드린다.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관해 함부로 말해서, 기분을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연재 중에는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음악, 영화 등등 장르 구분 않고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을 예정이라 좀 두서가 없어 보일 것 같다. 혹시라도 나중에 책으로 엮게 된다면 잘 정리해서 내놓을 터이니, 중구난방으로 보이더라도 적당히 봐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시작될 연재의 몇 회분이 통째로 건담 시리즈 리뷰인 것도 어쩐지 좀 미안하다. 여러모로 많이 미안한 시작이다.

 


* 오타쿠는 멸칭으로 쓰여왔다. 그 어원은 불분명하나, 게임·만화·애니메이션 등을 좋아하는 이들끼리 ‘댁(=님)’이라고 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에서는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으로 사회에 널리 알려지며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졌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일본 국어사전상으로 “하나의 취미·사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만, 다른 분야의 지식과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이라 정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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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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