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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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회

냉장고가 녹아내리고 있다.’

북극이 아닌 냉장고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티브이 다큐멘터리 프로나 신문 기사를 본다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냉장고가 생기고 음식을 나눠 먹는 인심이 사라졌다고 한다. 냉장고 발달사는 맘을 편치 않게 한다. 초대형 냉장고가 아닌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작은 냉장고는, 미국이 덥고 습한 월남 땅에서 전쟁을 치르며 급속히 발달했다. 전쟁 때문에 발달한 생활용품이 어디 냉장고뿐일까. 그렇지만 냉장고는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하루 세 끼, 끼니때마다 문안을 올려야 하는 분이 냉장고다. “덥지는 않으셨는지요?”냉장고는 방에 모시고 살 정도로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 먹는 것만 따진다면, 냉장고는 가족 구성원인지도 모른다. 이제 냉장고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 삶에 깊이 뿌리박혀 김치 전용이라고 갈래를 치기도 하는 냉장고에서는 전쟁의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냉장고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과 교전 중이다. 냉장고의 수뇌부는 한겨울이고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말단은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다. 냉장고는 미니 영안실이다. 냉장고 자체가 부패를 지연시키는 방부제 공화국이다. 냉장고 속에는 부패할 권리를 박탈당한 동식물들의 비명이 신선하게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냉장고에게 감사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당면해 있다. 식물들을 수직으로 키워 올리던 흙이, 아파트 하중을 받아 수직의 힘에 짓눌리고 있는 이 터전에서의 삶. 그러한 삶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냉장고는 유용한 문명의 이기적 산물이기도 하다. 냉장고 덕에 자주 시장을 보러가지 않아 시간을 벌 수 있고 음식물 낭비를 막을 수 있어 경제적이기도 하다. 더운 여름날 갈증을 풀어주는 차가운 음료수들. 한마디로 우리는 냉장고 덕분에 그 계절 플러스, 겨울을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냉장고들이 갑자기 파업을 한다면, 우리 삶은 상상만 해보아도 끔찍해진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냉장고를 고마워해서만도 안 된다. 왜냐하면 냉장고는 보다 큰 의미의 냉장고인 지구, 그 지구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현행범이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려면 음식물 공급이 수월해야 하는데, 요즘 우리 입장에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옛날처럼 집집마다 텃밭이 있다면 야채나 과일을 필요에 따라 즉시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또 우리 욕망은 계절을 넘어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한겨울에 딸기를 구해다주고 효자가 되긴 다 틀려먹은 세상이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산초기름이 생각났다.

인삼 장사하며 시 쓰는 종정순 선생이 갖다 준 손두부를 놓고 어떻게 먹을까 궁리 중이었다. 두부와 함께 가져온 음식이 많았다. 만두도 끓여 먹고 잡채와 전도 먹다 보니 냉장고에 넣어둔 두부를 깜박 잊고 있었다. 두부는 간수 담긴 비닐봉지에 들어 있었다. 두부는 표면이 매끌매끌한 게 상하기 직전 같았다. 서둘러 두부를 맑은 물에 씻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다행히도 상하지는 않았다. 두부의 삼분지 일을 잘라 더운 물에 데쳤다. 나머지는 물 채운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김치에 싸 먹는 두부는 옛 맛 그대로 고소하고 담백했다. 이리 맛있는 두부를 썩혀버릴 뻔했다니. 특별히 생각하고 두부를 준 이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나머지 두부는 어떻게 먹을까. 두부 넣고 돼지고깃국을 끓여볼까. 두부를 골패 모양으로 썰어 넣고 무와 대파 그리고 고춧가루를 왕창 넣고 벌겋게 끓이면 되는데. 아니면 며칠은 두고 먹어도 되게 간장에 조려놓는 것은 어떨까. 두부를 얇게 썰어 냉동보관 해놓고 오래 두고 먹을까. 냉동했다가 먹으면 수분이 빠져나가 유부처럼 되지만 쫄깃쫄깃한 독특한 맛이 나기도 하니까.

 

두부를 어떻게 먹을까 궁리하다 심하게 기침을 했고 그러다가 냉장고에 넣어둔 산초기름을 떠올렸다. 지난 가을 강화풍물시장에서 산초기름을 샀다. 이 홉, 한 병에 사만 원이었다. 참기름 두 배 가격도 넘었다. 시장에 갈 때마다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산초기름 없냐고 습관적으로 물어보았다. 참기름, 들기름 대여섯 병 놓고 좌판을 벌인 할머니들이 손사래를 치며 그런 거 요새는 없다고 했다. 냄새가 나 기름집에서 아마, 짜주지도 않을 거라고 설명을 덧붙이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날도 기름집을 지나며 빈말로 산초기름 없냐고 물어보았었는데 의외로 있다는 답을 들었다. 기름집 주인은 그것도 국산이고, 향이 진하다고 했다. 소 지라나 두부를 튀겨 먹으면 해수에 좋다고 하며 한 달에 한 병씩 사 가는 단골도 있다고 기름 자랑을 늘어놓았다.

 

산초기름 냄새가 난다. 두부 튀겨지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쏟아진다. 두부를 뒤집개로 누른다. 두부를 뒤집는다. 노릇노릇 익은 두부가 미각을 자극한다.

어려서 산초기름을 참 많이 먹었다. 아버지는 해수기침이 심했다. 한번 기침이 시작되면 아버지가 온통 다 기침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불이 관 화로에 삼발이가 자리를 잡고 그 위에 무쇠 프라이팬이 올려지고 산초기름이 둘러졌다. 두부 익는 냄새가 방 안에 진동을 했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불러 앉히고 두부를 먹어보라 했다. 뜨끈뜨끈한 두부에 배어 있는 알싸한 향이 나는 싫지 않았다.

가을이면 산초를 따 멍석에 널어 말렸다. 덜 익어 붉은빛을 띠던 산초도 익으며 검은빛으로 변했다. 산초 열매는 햇볕에 마르며 반들반들 윤이 나 빛났다. 마당 가득 산초향이 괴어 있다 바람에 날렸다. 산초기름을 짜, 됫병에 담아 팔거나 겨우내 먹었다.

 

산초기름에 튀긴 두부를 민간장에 찍어 먹는다. 산초기름 향이 예전 기억에 못 미친다. 톡 쏘는 맛이 싱겁다. 콩기름이 섞이지나 않았나 의심이 갈 정도다. 그래도 혀를 자극하는 알싸한 맛이 살아 있긴 살아 있다.

방에 외풍이 있어 비닐로 유리창을 가리고 겨울을 났다. 담배를 많이 피우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방에 살다 보니 기침이 심했다. 한밤중에 멈추지 않는 기침을 하다 보면 이웃집에 미안한 맘이 들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도 기침을 하는데 그 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결핵이 아닐까 싶어 병원에 가 엑스레이도 찍어보았다. 기관지에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기침이 멎기를 바라며 두부를 천천히 먹는다. 가끔 산초가루를 추어탕집에서 먹어보기는 했으나 기름을 먹어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산초는 위하수, 해수, 치통, 설사, 회충 구제 등에 민간요법으로 쓰여왔다. 나는 민간요법을 크게 신뢰하는 축에 속한다. 약초꾼 최진규는 민간요법의 소중함을 설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치료법인 약초요법, , 기공요법이 어째서 대체의학이 되었단 말인가.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의학을 대체한 서양 현대의학이 대체의학이고 약초요법이나 기공, , 뜸 같은 것이 정통의학이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의학을 본의학이라고 부르고, 생긴 지 얼마 안 된 서양 현대의학을 대체의학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산초나무 비슷한 나무로는 초피(젠피, 제피)나무가 있다. 초피나무는 봄에 꽃을 피우고 열매가 붉은빛을 띠며 익는 점이 산초나무와 다르다. 일본 사람들이 초피나무를 산초라 부르면서 초피나무나 산초나무나 다 산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초나무는 너덜겅이나 산 계곡에 많다. 나무가 단단해 도낏자루나 쌍망이 자루로 썼다. 산초나무로 자치기 대를 만들면 다른 나무에 비해 멀리 나가고 쪼개지지 않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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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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