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혹은 연금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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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

연재를 시작하며, 라는 말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의식의 흐름은 연금술로 가닿았다. 아마도 ‘시작’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 모든 화학의 기원인 연금술을 연상케 했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면 한때 나는 연금술에 관한 한 거의 전문가급의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마법, 외계인, 4차원 세계 등 온갖 기이한 현상들에 자주 매료되곤 했지만, 좀 다른 이유로 인하여 연금술 전문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때는 대학교 1학년 3월. 약대에 입학한 후 처음 들은 수업은 ‘약화학’이었다. 이름이 약화학이지, 일종의 일반화학 비슷한 과목인데, 쉽게 말하면 고등학교 때 배운 것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화학 전반에 걸친 기초 지식을 다시 복습하는 정도였다고 할까. 약학과에서는 생물학, 물리학, 해부학, 임상병리학, 수학 등등을 모두 배우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약학의 기본은 화학이라 할 수 있다. 약대를 가려면 무조건 고등학교에서 화학과 생물(요새는 생명과학이라고 하지만 그땐 그냥 심플하게 생물이었다)을 선택했고, 덕분에 입학하고 보니 과 전체에서 화학 대신 물리를 공부하고 들어온 사람은 나까지 단 세 명뿐이었다. 
화학에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던 나는, 오래전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슬프게도 그 조언은 나중에 틀린 것으로 밝혀졌지만) 원소주기율표만 외운 채로 첫 수업에 임하였다. (이것 역시 나중에 안 거지만, 아무리 고등학교 때 화학을 선택했더라도 주기율표를 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화학의 기본은 원소주기율표라고 주장하고 계시긴 하다.) 어쨌거나,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수업을 꾸역꾸역 들으며 나는 점차 중간시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얼마 후 시험 범위가 나오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화학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없고 우울하고 단순하고 지루한 과목이었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내 고질병인 쓸데없는 호기심까지 도지고 말았다. 결국 난 첫 단원 ‘화학의 역사’의 첫 번째 챕터인 ‘연금술과 화학’만 공부하다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 도서관 5층에 틀어박혀 연금술에 관한 모든 책을 찾아 읽었고 열심히 메모했으며 연금술사들의 계통도를 그리고 연금술법에 대해 숙지했으니 말이다. 마음속으로는 ‘이러면 안 돼. 얼른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고’라고 중얼거렸지만, 방대하고 흥미진진한 연금술의 세계에서 헤어나기는 이미 불가능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시험 당일이었고, 화학책의 나머지 부분은 전혀 모르는 채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뭐, 당연한 일이지만 연금술 문제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난 대학에 들어가서 본 첫 시험을 보기 좋게 망쳐버렸다. 
처음엔 별다른 아쉬움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서 이 재미없는 약학을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봐서 기계공학과나 천문학과로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기에 성적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학과 사무실 복도 앞 게시판에 붙은 성적표를 보는 순간, 내 다리는 얼어붙었고 나는 두 눈을 의심하며 손으로 비벼보기까지 하였다. (요즘은 그러지 않겠지만 당시 우리 과는 그런 식으로 모두의 성적을 공개했는데) 바로 내가, 약화학 중간시험에서 꼴찌를 했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꼴찌를 해본 것은 달리기 빼곤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거다. 
나는 조용히 복도를 빠져나와 학교 건물 뒤쪽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걸어갔다. 왠지 약화학 꼴찌에게는 그런 어두운 그늘이 어울릴 것만 같았다. 응달에 있는 낡고 오래된 벤치에 앉아 심각하면서도 슬프고 약간은 지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건너편 건물을 보았다. 아,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기분이 이런 거구나, 따위의 감상에 젖어 꽤 오래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런 내가 어찌나 불쌍해 보였던지 지나가던 선배들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때 그 이끼로 뒤덮인 응달에서 난 이렇게 한탄했던 것 같다. 이런 제길, 거대한 천체망원경으로 몇십 억 광년 떨어진 별을 봐야 할 내가 고배율 현미경으로 세균 수나 세고 있다니. 뭔가 이상해. 앞뒤가 안 맞는다고. 그래, 관두자, 당장. 이 지겨운 벽돌 건물과 재미도 없는 화학책과는 영원히 안녕인 거야.  
그런데 무슨 연유로 나는 약대를 계속 다녔던 것일까? 천문학이나 기계공학에 대한 열망이 자퇴 신청서에 이름을 쓸 만큼 높고 크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천문학은 그저 별만 보는 것이 아니고, 기계공학을 공부한다 한들 곧바로 ‘로보캅’을 만드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차차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한 번 더 공부하고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던 걸지도. 
하지만 지금은 약학을 공부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라 여기고 있다. 아픈 사람에게 약을 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서 최고로 좋은 일이니까.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는데, 어떤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뇌세포에 새로운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그에 관한 기억은 재배치된다고 한다. 또 우리가 ‘연금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신경세포의 돌기 어딘가를 자극하고 그 자극은 뇌 속에서 일파만파 파도를 일으키며 과거와 현재, 심지어는 미래까지 출렁이게 만든다고도 한다. (‘연금술’만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내는 모든 단어가 그런 작용을 한다. 안 믿긴다면 한번 시험해보시길.)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연재를 시작→시작→기원→화학의 기원→연금술, 이런 식으로 흘러간 뭔가가 뇌의 가장 깊은 곳을 흔들었고, 거기서 과거-현재-미래를 넘나드는 수많은 이야기가 떠올랐다는 것. 이제 그것을 풀어놓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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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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