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보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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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

 

Believing is not seeing.
Croire, c’est ne pas voir. 

믿는다고 보일까? 

 

 

유럽의 긴 겨울은 봄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 남겨 놓는다. 가로 수 잎들이 움트고, 거리에 봄볕이 채워지기 시작할 때 망각의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몸이 간직하고 있던 봄이다. 해가 길어진 저녁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확실히 삶은 곱절이 된다. 이런 계절이 되면 동면冬眠이 끝난 동물처럼 사람들은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학교에서 아이와 아이의 단짝인 알릭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 느긋하게 두 정거장을 걷는 것도 따뜻한 봄햇살 때문이다. 아라고 대로Boulvard Arago 의 너도밤나무 가로수 잎들이 연한 초록빛으로 무성해졌다. 나뭇잎들이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가릴 때면 이곳에 여름이 온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라스파이Raspail가 쪽에서 버스가 오는지 고개를 내민다. 변덕스러운 배차시간 때문에 10분 이상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한적한 정류장에 우리보다 먼저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한 노인이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지그시 쳐다보다 나에게 물었다

저 애들의 엄마는 아니죠?”

금발 머리 알릭스 때문이었을까?

왜요?”

엄마가 되기엔 좀 어려 보여서요.”

아마 내가 아이들의 보모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방인의 나이를 가늠하는 건 어느 쪽에서나 쉽지 않다.

저 중 하나가 내 아이예요. 저보다 큰 딸도 있어요. 이래도 나이가 좀 있다고요.”

웃으며 대꾸했더니 노인이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7개월 후면 나도 80인데.”

그 말에 마치 무례함을 허가받은 듯 노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투명한 피부와 맑은 눈빛을 가진 노인이다.

어머, 정말 세월이 안 보이네요.”

그럼요. 80이 되려면 아직도 7개월이나 남았는데.”

노인이 잘라 말했다.

맞아요. 아직도 7개월이나 남았는데.”

노인과 나는 서로 쳐다보고 웃는다. 노인 옆으로 커다란 기둥같이 생긴 물건이 비닐에 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예요?”

천체망원경.”

저걸로 뭘 보세요?”

달도 보고, 목성도 보죠. 목성은 참 아름다워요.”

노인이 말했다.

맞아요. 목성은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프로방스에서 천체관망대에 올라간 적이 있다. 관망대의 잔디에 누웠을 때 시야에는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밖에 없었다. 2백만 광년 이상 떨어져 있는 안드로메다 갤럭시를 눈으로 봤을 때, ‘라는 존재와 구체성이 광활한 우주에 빠져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천체여행보다 더 효과적인 여행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저걸로 명왕성도 보여요?”

아이가 물었다.

명왕성은 작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저걸로는 볼 수가 없어.”

알릭스가 물었다.

저 망원경은 얼마쯤 해요? 비싸요?”

비싸다고 할 수도 있고 싸다고 할 수도 있지.”

“1000유로?”

그것보다는 비싸고.”

1900유로?”

아이가 또 물었다.

음 뭐 그 정도.”

내가 묻는다.

그러니까 당신은 저녁 식사를 하고 발코니에 나가 매일 하늘을 보는 게 취미란 말이죠?”

아이들과 나는 노인을 가운데 둘러싸고 수사관처럼 캐묻는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는다. 7개월 후면 80이 되는 이 노인이 자그마치 300만 원이 넘는 천체망원경을 사가지고 들어가는 길이다. 별을 자주 보면 저렇게 맑은 웃음을 짓는 걸까?

밤 발코니에서 매일 천체여행을 떠나는 노인이라니……. 내가 아는 지구인들은 하늘을 쳐다볼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사람들뿐이다.

그때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에 사람들이 많아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아이들이 냉큼 올라타고 말았다. 무거운 망원경을 들고 어떻게 하나 돌아봤더니 노인은 버스에 타지 않은 채 운전사에게 묻는다.

뒤에 있는 당신의 동료는 지금 당신과 몇 분 거리에 떨어져 있나요?”

별 사이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는 방식일까?

“4분 거리입니다.”

버스에 올라타면서 노인을 돌아본다. 노인은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마치 지구에서 마주친 그 한순간의 우연을 음미하는 듯해 보였다.

80이 되려면 7개월이 남아 있는 노인을 정류장에 남겨 놓고 버스가 출발했다.

 

 

 

Mere figments of our lack of imagination.

Que les produits de notre manque d’imagination.

모두 궁핍한 상상력의 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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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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