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에서 드디어 행복을 찾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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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

나는 어려서 타잔 영화를 끔찍이도 좋아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매주 토요일 어머니가 저녁상을 차려 들여올 무렵이면 어김없이 시작하던 그 타잔 영화를 나는 거의 빠짐없이 다 보았다. 텔레비전 화면에 두 눈을 모두 빠뜨린 채 밥알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시원한 나무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늘 반라의 미녀와 함께 살며 손만 뻗으면 잘 익은 바나나며 파인애플들이 흐드러진 곳. 천국이 있다면 아마 저런 곳이리라 생각했다. 흑백텔레비전이었지만 내 눈에는 온갖 색들의 꽃들이며 과일들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열대에 내가 첫발을 들이밀게 된 때는 타잔네 동네를 동경하기 시작한 지 20년이 족히 지난 후였다. 내게는 마치 사방이 40리나 되는 성에 겨자를 가득 채워 넣은 뒤 100년에 한 개씩 꺼내어 겨자가 다 없어져도 그치지 않는다는 그 겁과 같은 긴 기다림이었다. 1984년 여름 중미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나라 코스타리카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 전해에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생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 한 학기를 마치자마자 나는 이른바 열대생물학이라는 학문에 입문하기 위하여 10주간에 걸쳐 코스타리카의 여러 지역을 돌며 현장학습을 시켜주는 여름학교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어느 봄날 날아든 입학통지서에는 열대로 뛰어들기 전에 맞아야 할 예방주사 목록과 준비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소풍가방을 챙기는 아이처럼 나는 일찌감치 그 많은 준비물들을 꼼꼼히 마련하여 차곡차곡 배낭 속에 넣어두고 떠날 날만을 기다렸다.

당시에는 아직 미국에서 코스타리카로 가는 직행항로가 개발되지 않았던 터라 나는 여름학교가 시작하기 이틀 전 늦은 밤에 보스턴을 떠났다. 새벽녘 마이애미에 도착하여 공항 대합실에서 몇 시간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동이 트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파나마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파나마가 분명히 더 남쪽에 있는 나라지만 그땐 그렇게 돌아가야만 했다. 파나마시티에서 코스타리카의 수도 산호세까지는 비행기로 그저 한 시간 남짓한 거리였다. 산호세공항에 내리자 서산의 해는 이미 길게 동쪽으로 드러눕기 시작했다. 집 떠난 지 거의 스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미리 연습해둔 스페인어 몇 마디를 구사하며 용케 집합 장소인 시내 호텔에 도착했다. 말이 호텔이지 널찍한 타일 바닥의 뜰을 뺑 둘러 2층까지 사방으로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일종의 유스호스텔이었다. 별나게 후줄근해 보이는 주임교수에게 신고를 마치고 미리 도착한 다른 대학의 대학원생 몇몇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일찍 나는 잠에서 깨었다. 열대에 온답시고 새로 장만한 슬리핑백이 낯설어서인지 밤새 뒤척였다. 건물 뒤쪽 벽에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수도꼭지를 틀고 이를 닦고 간단한 세수를 했다. 얼음같이 찬 물이었다. 새벽 공기 역시 조금 춥다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열대라도 산호세가 고원지대에 있기 때문이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있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어젯밤에 만난 주임교수가 벌써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나는 오늘 정글에 가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는 열대가 처음인 모양이군, 하며 내 등을 툭 쳤다. 잠을 설치게 만든 건 낯선 슬리핑백뿐만이 아니었다. 20년을 기다려온 내 가슴이 이젠 하루도 더 기다릴 수 없다며 칭얼대고 있었다. 드디어 내가 타잔네 동네 근처에 온 것이다.

한데 웬 놈의 입학식이 그리도 긴지.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해야 했고 코스타리카대학의 교수로부터 코스타리카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강의도 들어야 했다. 오전 열한 시가 넘어서야 겨우 준비된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산호세 시내를 벗어난 지 두 시간도 채 안 돼 포장도로는 끝이 났다. 아스팔트 위를 달릴 때에도 덜컹거리던 버스가 비포장도로에 들어서자 온갖 관절이 다 쑤시는지 신음 소리가 요란했다. 길이 너무 좁아 한쪽 바퀴가 벼랑 아래로 떨어질 듯 비칠거리기도 하고,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다리가 떠내려간 곳에서는 모두 내려 다리 옆 냇물을 건너야 하기도 했다. 버스도 혼자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냇물을 건넜다.

그렇게 해서 저녁 무렵 우리가 도착한 곳은 라셀바La Selva라는 전형적인 열대우림지역이었다. 커다란 통나무집 안에 아무렇게나 배낭들을 던져 넣고 모두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 메뉴는 간단하게 쌀밥과 검은콩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라셀바 열대연구소 소장의 간단한 인사말씀이 있었다. 연구소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수칙들과 주변 정글에 출몰하는 위험한 동물들에 대한 주의사항들이었다. 주로 독사와 독충, 그리고 재규어에 대한 얘기였다. 재규어? 언젠가 어느 동물원 철책 안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홰홰 어치렁거리던 그 점박이 표범 말인가? 보고 싶었다. 철책 없는 정글 안에서 보고 싶었다.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물방울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건 결코 무서움이 아니었다. 언젠가 공항에서 혼자 먼 여행을 하고 돌아오던 아내를 맞이하며 느꼈던 그런 뜨거움이었다. 문득 미국에 두고 온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산호세에서 엽서라도 한 장 띄우고 올걸.

저녁이 끝나자 이어서 열대에서의 첫 밤을 기념하기 위한 파티가 벌어졌다. 음악이 쏟아지고 술이 흘렀다. 캔자스대학에서 온 여학생의 요청으로 한바탕 몸을 흔들고 난 다음 나는 슬며시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재규어가 보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가 배낭 속에서 간단한 도구들을 챙겼다. 미리 마련해 온 작은 전조등을 이마에 두르고 나는 숲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섰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파티의 음악 소리가 희미해질 만큼 들어갔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몸을 돌려 소리가 났던 쪽으로 전조등을 비춰보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전조등은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빛이 쏟아지는 작은 원 안만 밝게 보일 뿐 그 주변은 오히려 더 깜깜해 보였다. 전조등을 꺼버렸다.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온 정글을 삼키고 말았다. 두 눈은 분명히 있는 대로 치뜨고 있었지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려서 강릉 시골집에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한밤중에 정랑에 가던 기억이 났다. 정랑은 강원도 사투리로 뒷간을 말한다. 달이 없는 밤이면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여 툇마루를 거쳐 마당으로 내려선 뒤 감나무 밑을 돌아 닭장 옆에 있는 정랑에 들어서야 했다. 정랑에 얽힌 귀신 얘기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였는지 그런 밤의 어둠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전조등을 끄고 맞은 정글 속의 어둠은 어쩐 일인지 전혀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려서 맞닥뜨리던 정랑의 어둠은 늘 와락 내 목을 졸랐다. 그런데 정글의 어둠은 포근하기까지 했다. 그곳은 재규어는 있어도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사람이 없으면 귀신도 없거니. 나는 그곳에 그렇게 서서 한참이나 자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렴풋이 나뭇잎들의 윤곽이 실루엣처럼 드러나기 시작했다. 꿈에도 그리던 타잔네 동네는 결국 또 흑백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 화려한 열매들과 꽃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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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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