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위한 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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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회

이렇게 인간 특유의 네 가지 욕망의 결정체로서 내가 좋아하는 동요를 예로 들었으니 나의 모든 이야기가 한바퀴 돌아서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 같군요. 왜냐하면 이 강의를 시작할 때 나는 어린 시절의 문학체험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다시 한 동요를 결론으로 삼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마치고 여러분 각자가 그동안에 내가 한 말을 참고로 해서 여러 작품을 직접 대해 나가기만 바라면 될 것 같군요. 그러나 여러분과 헤어지는 것이 어쩐지 섭섭하고 또 늙은이라서 그런지 자꾸만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어지는군요. 그래서 몇 마디 사족蛇足을 달아볼까 합니다.

우선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한 가지 크게 잘못된 견해에서 여러분이 해방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해두고 싶습니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과 인생을 위한 예술을 구별하고, 전자는 사치품에 불과하며 후자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구별은 19세기 중반에 서양에서 생겼습니다. 예술은 인간의 도덕적·사회적 교육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당시의 실용주의적 주장에 대하여, 추악한 사회현실에서 떠나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표현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라는 주장이 맞선 것입니다. 한데 모든 주장은 적어도 그 시초에 있어서는 과격합니다. 기존의 지배적인 관념을 어떻게든지 깨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도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원조인 고티에Gautier는 이렇게 과격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아무 소용도 없는 것만이 진실로 아름답다. 유용한 모든 것은 추하다.”

여러분은 이 선언이 옳다고 생각하나요? 정말로 아름다움은 아무 소용도 없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살펴본 아름다운 동요는 소용이 없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지 않고 그것이 유용한 것이라면 더러운 것이 되나요? 이렇게 물어나가면 고티에의 말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실용성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이단異端으로 보이는 자신의 주장에 강한 인상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용성이라는 말의 뜻을 아주 좁혀서 의식주衣食住와 같은, 혹은 권선징악과 같은 협의의 유용성을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그런 좁은 뜻에서만 유용성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가 주장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의 예술만이 아니라, 우리가 네 가지 욕망의 항목에서 다룬 모든 주제들이 소용없는 것이 되죠. 거기에서는 속된 말로 밥도 안 나오고 떡도 안 나오니까요. 그러나 유용성이라는 말의 뜻을 넓혀서 삶의 현실을 반성하고 그 현실에 의미를 주고 또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 일체를 포함한다면 (그것이 옳은 용법입니다), 이른바 인생을 위한 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의 구별은 무의미해집니다. 삶의 현실과 멀다고 느껴지는 순수한 아름다움, 고티에 자신이 다듬은 주옥과 같은 시만이 아니라, 우리의 그 동요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 어찌 인생과 무관하겠습니까?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 없이 어떻게 인생을 견뎌나가겠습니까? 아름다움을 규범으로 삼지 않고 일상적 현실과 사회를 어떻게 비판해나가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예술을 그런 식으로 두 가지 상반된 것으로 구분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짐작이 갈 겁니다. 존재하는 모든 예술은 오직 인생을 위한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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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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