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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습지

이혜경 -
9788972759911
2019년 05월 25일
144쪽 | 104*182 | 사륙변형
11,200원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열네 번째 책 출간!

시골 작은 마을에 낙향에 살고 있는 필성은 어느 날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김’을 이웃으로 맞는다.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동네 사람들의 의심에는 아랑곳없이 필성은 그를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고 곁을 내준다. 몇 차례의 교류 이후 필성은 자신이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김 역시 북파공작원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둘 사이에 묘한 연대감이 생긴다.

 

노인뿐이던 마을에 베트남 새댁이 시집을 오며 마을은 잠시 활기를 띤다. 필성은 새댁이 자신이 월남전에서 한때 마음을 줬던 여인 응웬과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왠지 모를 설렘을 느낀다. 그날 이후 필성은 잊었던 베트남 말을 하나씩 복기하며 응웬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필성이 ‘퐁니’에 주둔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 응웬은 그와 거리를 두고, 대대적인 민간이 학살이 퐁니에서 자행된 건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였으나 이런 오해를 풀 길이 없어 필성은 답답하기만 하다.

 

마을에 무료로 영정 사진을 찍어주는 행사가 열리고 필성은 그 자리에 김을 초대하지만 김은 자신의 장례식에 올 사람 하나 없다며 마땅치 않아 한다. 못 이기는 척 마을회관에 온 김은 필성의 옷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고, 모처럼 제대로 된 밥상을 받으며 사람들의 온기를 느낀다. 하지만 며칠 후 다시 찾은 마을회관에서 허수아비 취급을 받은 김은 필성을 찾아 불만을 토로하고, 나라를 위해 북파 공작원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제대로 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자기의 처지가 떠올라 서글프기만 하다.

 

한국에 정착하고자 읍내 한국어 교실에 나가는 등 이국의 외로운 삶을 달래고 있는 응웬은 자신을 향한 시어머니의 시선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 홀연 사라지고 마는 많은 이주 며느리들을 봐온 시어머니이기에 응웬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조심스럽고 위태로울 뿐이다. 그런 가운데 베트남 말로 인사를 해주는 필성은 응웬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만 필성이 퐁니에 주둔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할 뿐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 ‘필성’, 북파공작원 ‘김’, 결혼해 한국으로 이주한 베트남 새댁 ‘응웬’, 이 세 명의 인물은 역사로부터 피해를 입었으나 역사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역사가 가하는 소외의 냉혹함을 일깨우며 망각의 역설과 싸우고 있다.”(정홍수). 세 명의 주인공의 삶을 통해 그 소외와 맞서는 문학의 자리를 살펴볼 수 있는 소설이다.

 

 

표4

 

역사로부터의 소외와 맞서는 문학의 자리

 

반드시 어떤 신념이나 ‘진리’의 자리를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우리는 역사를 ‘필연성의 형식’ ‘필연성의 경험’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역사가 그렇게 인간의 집단적 실천과 개인적 실천 모두를 엄혹하게 한계 짓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사를 망각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이혜경의 『기억의 습지』가 가슴 아리게 알려주는 대로, 많은 이들은 바로 그 역사로부터 피해를 입으면서 역사로부터 소외된다. (……) 이혜경 소설은 역사가 가하는 그 소외의 냉혹함을 일깨우면서 망각의 역설과 싸우고 있다. 『기억의 습지』는 그 싸움이 ‘개인’의 악몽을 넘어서는 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섬세하게 증언한다.

-정홍수,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그들이 사는 면으로 가기 전, 읍내의 장례식장에 들렀다. 철규가 나와서 장인 장모를 맞았다. 새댁의 엄마는 검정 양복을 입은 사위를 보자 가슴을 치며 울었다. 새댁의 동생도 형부를 보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 한쪽 팔로 엄마의 얼굴을 감싼 채. 장례식장 입구에서 모녀는 울었다. 새댁의 영정 사진 앞에 향을 사르고, 그리고 엎어져서 울 뿐이었다. 그에겐 익숙한 향 냄새였다.

-10-11쪽

 

흩어지는 연기를 멍하니 보며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부산항에서 배에 올랐다가 이듬해 가을

에 부산항으로 되돌아왔다. 20대 초반이었으니 4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돌아왔지만 돌아온 게 아니었다. 처음엔 눈만 감으면 월남 땅으로 가 있었다. 꿈속에서 늘 전쟁터에 가 있었다. 깨어나면 고향 집의 작은 방이었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잠드는 게 무서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도 꿈도 옅어졌다. 가끔 월남으로 가 있는 꿈을 꾸곤 했지만, 오늘처럼 생생하게 느껴진 건 오랜만이었다. 길지 않은 낮잠결의 꿈이 40년 넘는 시간을 한순간에 치워버렸다.

-16-17쪽

 

“아, 이건 특수 임무를 맡는 부대야. 그래서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회사라고 하는 거야. 회사니까 회사의 우두머리는 사장님, 그래서 사장님이라고 그냥 부르는 거야. 일단 그 사장님 따라가면, 자네 인생이 펴이는 걸세. 지금 나라 사정이 어려워서 밥 굶는 사람도 쌔고 쌨는데, 가면 밥도 주고 제대할 때면 목돈도 주니까 자네도 이만한 가게 차리는 건 일도 아닐 거야. 나만 믿게나.”

-72쪽

 

한국, 꿈에 그리던 나라였다. 베트남에서 살 때, 나는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거기 나오는 한국 남자들은 다들 잘생기고 자상했다. 여자에 대한 배려가 철철 넘쳤다. 드라마 속 가족들은 다들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었다. 나는 국제결혼을 주선하는 브로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소개받아 남편이 될 남자를 만났다. 나보다 스무 살 많은 건 문제가 안 되었다. 남들 하는 대로, 베트남에서 식을 올리고,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비행기를 타는 건 즐거웠다. 그리고 시댁이 될 시골로 와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시골 풍경은 내가 살던 베트남과 비슷했다. 그래서 더 친밀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사진을 보내드렸다.

-92-93쪽

 

김의 표정으로 미루어,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김은 그림자 취급을 받고 그냥 나왔을 것이다. 김의 표정이 그로 하여금 방에 가서 먹던 과자 봉지를 꺼내 오게 했다. 김은 과자를 집는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말없이 재떨이를 밀어주었다.

김은 그림자 취급에 조금 질린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말이야, 내가 들어가도 인사 한마디가 없었어, 하고 푸념을 했다. 그런 뒤엔 이 사람, 저 사람 끄집어내서 흉을 보았다. 길에서 인사하려 해도 외면하는 박, 밭에서 일하는데 인사 건넸더니 대꾸도 안 하는 정가 등등.

-113-114쪽

 

문밖에 발짝 소리가 난다. 포장이 안 된 도로라서 소리가 안 나는데. 어쩐 일인지 발짝 소리가 들렸다. 김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본다. 가녀린 여자, 월남 새댁이다. 갑자기,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그와 말을 섞는 이는 그처럼 혼자 사는 사람, 필성이뿐이다. 그는 문을 연다. 여자가 깜짝 놀라 걸음을 빨리한다. 외국에서 온 여자까지 나를 멸시하다니, 아니, 무서워하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약이 올랐다.

-119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열네 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60년대 출생 작가, 1980년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 25일 발간)

015 임철우(근간)

016 최 윤(근간)

017 이승우(근간)

018 하성란(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정희승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정희승

1974년 서울 출생. 홍익대 회화과 졸업. 런던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 사진학과 학사와 석사과정 마침.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를 비롯한 국내와 뉴욕, 런던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 개최.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박건희문화재단 다음작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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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Author: Juan Lee (Seung 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