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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의 꿈
El sueño de los héroes(1954)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송병선
978-89-7275-865-5
2018년 02월 12일
400쪽 | 126*194 | 사륙판 변형
14,000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선구자,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최고의 작품

■ 책 속으로

 

“[…] 마네글리아는 수없이 나를 속였지만, 나는 최소한의 불평도 늘어놓을 기회도 없었고, 난 그게 몹시 못마땅했어. 그 부정한 속임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나를 이기기 시작했을 무렵, 뚱보는 자기 카드를 뒤집어서 보여 주었어. 에이스와 4, 그리고 5였어. 그는 ‘스페이드 플라워야’라고 소리쳤지. 그러자 나는 ‘커트 플라워’라고 대답하고는, 에이스 카드를 집어서 카드 모서리로 얼굴을 베어 버렸어. 뚱보는 콸콸 피를 쏟으면서 사방에 피를 튀겼어. 심지어 빵과 밀크잼도 피로 물들었지. 나는 천천히 테이블 위에 있는 돈을 모아서 내 주머니에 넣었네. 그러고는 한 움큼의 카드를 쥐고서 뚱보의 피를 닦고, 그의 주둥이 부위를 훔쳐 주었어.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나왔고 아무도 내 앞을 막지 않았어. 얼마 후 죽은 뚱보는 친구들 앞에서 나를 욕하면서 내가 카드 아래 주머니칼을 갖고 있다고 말했지. 그 불쌍한 마네글리아는 모두가 자기처럼 날렵한 손재주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_ 1장, 21쪽

 

[…] 가우나의 관심을 끈 것은 여행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마법사의 말에서 그는 미지의 세계, 아마도 박사의 용감하고 향수에 젖은 세계보다 더 매혹적인 세계를 얼핏 보았던 것이다.

타보아다가 계속 말했다.

“그 여행에서는(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불러야 했기 때문에) 모든 게 좋은 것도 아니고, 모든 게 나쁘지도 않네. 자네를 위해서건 다른 사람을 위해서건 그 여행을 다시 하지는 말게. 그건 아름다운 기억이고, 기억은 바로 삶일세. 그걸 파괴하지 말게.”

가우나는 다시 타보아다에게 적개심을 느꼈다. 또한 불신도 느꼈다.

_ 13장, 72∼73쪽

 

“헤픈 계집애라고? 내가 그의 뼈를 모두 부숴 버리겠어.”

“그보다는 주근깨를 부숴 버려요.” 클라라가 진지하게 제안했다. “얼굴에 주근깨가 너무 많아요. 하지만 그냥 놔둬요. 가증스러운 존재니까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녀는 꿈꾸는 표정으로 이렇게 밝혔다. “나는 바다의 여자예요. 그 작품은 어느 스칸디나비아 사람, 그러니까 외국인의 것이에요.”

“왜 국내 작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않는 거지?” 가우나는 공격적으로 물었다.

“블라스테인은 가증스러운 인간이에요.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예술뿐이에요. 당신이 직접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좋을 것 같네요.”

가우나가 말했다.

“내가 정부라면, 모든 감독들에게 국내 작가의 작품을 상연하라고 요구하겠어.”

_ 14장, 81∼82쪽

 

발레르가 박사는 아주 심각하게 가우나의 눈을 쳐다보고서 그를 향해 약간 몸을 기울였다. 가우나가 나중에 말한 바에 따르면, 그 순간에 그는 영국에서 배로 실어 나른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하수도 청사가 자기에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발레르가가 물었다.

“카니발 기간에 흥청망청 쓰고서 얼마나 남았나?”

“한 푼도 없어요!” 가우나가 화를 내며 대답했다. “한 푼도 남지 않았어요.”

그들은 그가 마음대로 투덜거리며 항변하도록 놔두었다. 모든 불평을 내뱉자 그의 마음도 차분해졌다. 이제는 더 힘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빌어먹을 5페소 지폐 한 장도 남지 않았어요.”

“500페소 지폐겠지.” 안투네스가 한쪽 눈을 감으면서 고쳐 주었다.

침묵이 흘렀다. 가우나가 분노로 얼굴이 하얘져서 물었다.

“내가 경마에서 얼마나 벌었다고 생각해?”

페고라로와 안투네스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됐어. 그만해.” 박사가 명령했다. “가우나는 사실대로 말했어.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 채소 도살자가 되려는 인간도 마찬가지야.”

_ 16장, 98∼99쪽

 

“가우나가 말하는 용기는 중요하지 않아. 남자가 지녀야 할 것은 일종의 철학적 관대함, 즉 어느 정도의 숙명론이지. 그래야 명예의 기사처럼 어느 순간에라도 모든 걸 잃을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거든.”

가우나는 존경심을 금치 못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 당시 타보아다는 두 사람에게 약간의 수학과 천문학, 식물학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좁은 생각을 넓혀 주기 위해서였다. 클라라 역시 공부했다. 그녀의 지성은 가우나나 라르센보다 훨씬 유연한 듯했다.

“그 친구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거야.” 언젠가 가우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만일 내가 장미 한 송이를 공부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면.”

그러자 타보아다가 말했다.

“자네 운명은 바뀌었네. 2년 전에 자네는 발레르가 박사가 되려는 과정에 있었어. 클라라가 자네를 구해 준 거야.”

“클라라뿐만 아니라……” 가우나가 인정했다. “장인어른 덕분이기도 합니다.”

_ 30장, 211쪽

 

운명이란 인간이 만든 아주 유용한 발명품이다. 몇몇 사건들이 다르게 일어났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 만다는 이 겸손하고 수수한 교훈이 지금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이야기에 보잘것없지만 투명한 빛을 비춘다. 그러나 나는 가우나와 클라라의 운명은 마법사가 죽지 않았다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다. 가우나는 다시 플라텐세 카페를 자주 들르기 시작했고, 거기서 다시 박사와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과 만났다. […]

_ 35장, 244쪽

 

“1927년 카니발 기억나지?” 가우나가 물었다. “거리는 해적 행렬로 가득 찼었어.”

“아직 8시도 되지 않았어.” 마이다나가 말했다. “그런데 모두가 잠든 것 같아. 살아 있지 않고, 축제의 정신도 찾아볼 수 없어. 절망적이야.”

“그래, 절망적이네.” 박사가 동의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게 뒷걸음치는 것 같네. 심지어 카니발까지도 말이야. 쇠퇴와 몰락밖에는 없어.” 잠시 후 그는 천천히 덧붙였다. “시커먼 몰락만이 있어.”

_ 40장, 273쪽

 

[…] 가우나는 술잔을 드는 순간, 누군가를 보았다. 바 옆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했듯이, 그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링컨 차에서 내린 청년들 중 하나였다. 1927년에 바로 그 장소에서 모습을 보였던 머리가 큰 금발이었다. 가우나는 조금 더 찾아보면 나머지 세 사람, 즉 팔자로 굽은 다리에 권투 선수 자세를 취하고 싸우려 했던 사람과 크고 창백한 사람, 그리고 그로소의 책에 나오는 독립 영웅과 같은 얼굴의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다시 비웠다. 그렇게 두 번을 반복했다. 하지만 1927년 밤에 그 젊은이들이 누구와 함께 아르메논빌에 도착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데 깜짝 놀라서 믿지 못하는 가우나의 눈 앞에 한 여자가 있었다. 바로 똑같은 바에 오른쪽으로 기대고, 1927년에 입었던 것과 똑같은 자루옷 복장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녀는 그가 찾던 가면 쓴 여자였다.

_ 47장, 342∼343쪽

 

■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Adolfo Bioy Casares, 1914∼1999

“나에게 문학은 삶 안에 있다, 그것은 삶의 일부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는 라틴아메리카 문단에서 과학소설, 환상소설, 탐정소설을 혁신한 ‘합리적 상상력의 소설’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사회 정치적 요인들을 비판하고, 사랑과 정체성, 인간의 본질이라는 주제를 광범위하게 탐구한 작가이다. 그는 1914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풍부한 문화적 수혜를 누리며 자란 그는 스스로 “읽기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일찍이 문학에 관심을 보였다. 열한 살 때 첫 소설을, 열네 살에 첫 단편소설을 완성했으며, 열다섯 나이에 첫 책을 출간했다.

1932년 열여덟 나이에 그는 서른두 살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처음 만나 지적이고 문학적인 모험의 동반자로 평생 교류한다. 1940년 동료 작가 실비나 오캄포와 결혼한 그는 같은 해 『모렐의 발명』을 발표하면서 큰 명성을 얻고, 192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생생하게 재현한 『영웅들의 꿈』(1954)을 통해 아르헨티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선다. 이후 『돼지 전쟁 일기』(1969), 『햇빛 받으며 잠자기』(1973), 『라플라타 어느 사진사의 모험』(1985), 단편집 『위대한 세라핌』(1967), 『환상 이야기』(1972), 『러시아 인형』(1991) 등 유머와 아이러니, 기이한 환상 요소가 어우러진 다수의 독창적인 작품과 더불어 보르헤스와 함께 쓴 여러 편의 탐정소설을 발표한다.

‘비오르헤스’라 불릴 만큼 비오이와 보르헤스는 수많은 문학 활동을 함께하며 환상문학 역사의 새 지평을 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오이는 거목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1986년 보르헤스가 타계하자 비로소 재조명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작가협회 대상,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멕시코 알폰소 레예스상 등을 수상했고, 1990년 스페인어권 최고 권위의 문학상 세르반테스상을 받았다.

 

 

■ 옮긴이 송병선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했다. 콜롬비아의 카로이쿠에르보 연구소에서 석사 학위를, 하베리아나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전임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울산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모렐의 발명』 『픽션들』 『알레프』 『칠 일 밤』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거미 여인의 키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꿈을 빌려드립니다』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염소의 축제』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등이 있다. 제11회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등과 함께 ‘붐 소설’을 주도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선구자이자, 과학소설, 환상소설, 탐정소설을 혁신한 ‘합리적 상상력의 소설’을 통해 환상문학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작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대표작 『영웅들의 꿈』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되던 제국주의 언술을 대체하고 해체하려는 의식적인 창작 행위로서 라틴아메리카 문단이 새로운 소설을 시도하던 시기, 비오이 카사레스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작가”(카를로스 푸엔테스)였다. 추리소설 형식의 탄탄한 플롯과 스토리로 지어진 ‘모험 이야기’와 인간사의 다양한 문제들을 끌어안은 ‘환상 세계’가 결합된 그의 소설은 쇠락하는 경제 속에서 혐오와 불안이 만연했던 당대 아르헨티나 정치 사회를 풍자했고, 사랑과 정체성, 인간의 본질이라는 주제들을 광범위하게 탐구했다. “우리가 사물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환상소설을 쓴다”라고 밝힌 그는 일상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현실을 밝혀내는 장치로 ‘환상’을 추구함과 함께 실존주의 소설, 고딕소설 등 여러 경향에 관심을 보이며 스펙트럼 넓은 작품을 선보였다.

비오이는 생전에 모두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보르헤스 및 아내 실비나 오캄포와 공동으로 집필한 탐정소설, 환상소설, 그리고 10여 권의 단편집과 여러 시, 에세이, 극본들을 남겼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작품은 세 권으로(『모렐의 발명』, 단편집 『러시아 인형』, 보르헤스와 함께 쓴 탐정소설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아직 많은 주요 작품이 소개되지 못한 이유 중에는 오랫동안 세계 문학계에서 작가가 보르헤스의 제자로 오해받았다는 배경이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보르헤스와 명확히 구별되는 비오이의 현실과 밀착된 환상문학은 ‘사랑’의 감정을 주요하게 다루며, ‘간결한 대화’ ‘짧은 문장’ ‘전지적 화자’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독특한 ‘냉소적 유머’가 두드러지고, 현실에서 환상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전개가 보르헤스보다 더욱 세밀하다고 평가된다.

보르헤스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사에 남긴 업적의 상당수는 ‘비오르헤스’(비오이+보르헤스)에게 그 공을 돌려야 한다고 재평가되는 현시점에서, 수많은 비평가와 작가들이 꼽은 비오이 최고의 소설 『영웅들의 꿈』의 국내 출간은 특히 더 큰 의의를 지닐 것이다. 이 책을 출간한 현대문학에서는 올해 <현대문학 세계문학단편선>으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를 소개할 예정이며, 앞으로도 그의 다양한 문학 작품들을 발굴해 알릴 것이다.

 

192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펼쳐지는 삶과 우정, 사랑

우아한 유머와 예언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운명과 숙명, 필연에 대한 메타포

 

『영웅들의 꿈』(1954)은 비오이 카사레스의 세 번째 장편소설로, 전작인 『모렐의 발명』(1940)과 『도주 계획』(1945)에서 머나먼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한 것과 달리 192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대를 옮긴다. 저자는 구어체적 언어와 변두리 지역의 속어를 사용하면서 당대의 생활상을 생생히 재현하고, 나아가 소설이 발표된 1954년 당시, 지식인을 탄압하고 폭력적인 민족주의로 변질되어 갔던 페론주의가 도래하던 분위기를 암시한다.

주인공은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는 스물한 살의 청년 에밀리오 가우나다. 이야기는 1927년, 카니발이 한창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우나가 경마로 1,000페소의 큰돈을 따며 시작된다. 존경하는 발레르가 박사와 친구인 청년들과 함께 카니발을 즐기며 그 돈을 모두 써 버리기로 결심한 가우나는 사흘 동안 술집과 가장무도회와 사창가를 전전하면서 흥겹게 지낸다. 그리고 사흗날 밤, 술에 취한 그는 가면 쓴 여자와의 만남과 숲속에서 벌인 칼싸움 등 흐릿한 기억들을 마지막으로, 호숫가 낯선 집에서 홀로 잠을 깬다. 그날 이후 그는 마치 “이타카로 돌아온 율리시스나 황금사과를 떠올리는 이아손처럼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상실감으로 가득”한 채, 희미하게 떠오르는 사흗날 밤의 체험이 “자기 인생의 절정의 순간”이라 믿으면서 그 기억을 되찾고자 한다.

모두 55개의 짧은 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크게 ‘1927년 카니발의 사건’(1~5장), ‘카니발 이후 변화된 가우나의 삶과 클라라와의 사랑’(6~39장), ‘다시 시작되는, 1930년의 카니발’(40~55장)로 나뉜다. 1930년 카니발이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 3년여의 시간 동안 가우나는 불쑥 마주하는 뜻밖의 사건들을 통해 수면 아래 잠겨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건져 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조각이 꿰맞춰지면서 드러난 진실은, 상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나타나면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를 몰아간다.

 

■ 몽환적인 환상으로 채색된, 1927년 카니발의 마지막 밤 ―꿈과 현실의 상호 작용

 

1927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의 카니발 기간에 에밀리오 가우나의 삶은 처음으로 신비의 절정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정해진 끔찍한 종말을 예견했는지, 아니면 멀리서 일련의 사건들을 바꾸었는지 그 답을 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사흗날 밤이 끝날 무렵에 가우나가 흘낏 보았던 것은 그가 그토록 갈구했던 마술적 대상, 즉 어느 대단한 모험에서 얻었다가 잃어버린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그 경험을 조사하면서 되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항상 이것을 대화의 주제로 삼았고, 그럴수록 친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_ 1장, 9∼10쪽에서

 

전지적 화자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소설은 첫 문단에서 앞으로 펼쳐질 불가사의한 모험의 개요를 서술한다. 사흗날 밤, 가우나는 스스로도 그 정체를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이 갈구했던 무언가를 보았고, 그 때문에 그날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그날을 떠올리는 순간들은 때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라 표현되는데, 이렇게 그 모험의 기억은 꿈과 실제 경험의 모호한 경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오이 카사레스는 「저자의 말」에서 자신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꿈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믿을 때 느끼는 불안감”이었다고 말한다. 1927년 카니발의 사흗날 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라진 과거의 ‘미스터리’와 ‘환각적 환상’이 교묘히 뒤섞이며 전개되는 소설을 통해서 화자는 꿈이라는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 혹은 잠재된 그 기억이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한다.

 

■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목에서 부딪히게 되는 딜레마 ―진정한 ‘용기’와 ‘행복’이란 무엇일까

작중에서 갓 스물한 살이 된 청년 가우나에게는 두 명의 영웅이 존재한다. 한 사람은 청년들에게 “경마와 정치와 용기”에 대해 말하는 ‘발레르가 박사’이며, 다른 한 사람은 “수학과 천문학, 식물학을 가르쳐” 주는 ‘마법사 타보아다’다. ‘박사’와 ‘마법사’라는 풍자적인 칭호부터 두 사람은 대립하는데, 맹인 악사, 절름발이 경비원 등 무기력한 약자들에게 폭력적인 행위로써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는 박사가 ‘독재와 야만’을 대표하는 반면, 마법사는 바로 ‘문화의 세계’를 상징한다. 저자는 청년의 두 가지 인생 모델로 제시되는 이들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소중한 가치인지 돌아보게 한다.

한편 마법사 타보아다는 가우나에게 그 ‘모험’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조언하며, 청년은 마법사 그리고 마법사의 딸 클라라의 영향을 받아 잠시 기억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시절을 누린다. 그러나 청년들이 지겹게 들어 온 탱고의 한 노랫말처럼―운명과 맞서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어― 1930년, 운명은 그를 다시 카니발로 데려가고, 가우나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개인의 행복을 누리는 삶과 남성적 용기를 찬양하고 집단의 뜻을 우선하는 모험적인 삶의 기로에 선다.

 

■ 사랑의 감정이 우리에게 불러오는 변화 ―공감각적 이미지와 세밀한 언어로 빚어진 세계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그 변화에 따라 다채로운 공감각적 이미지를 배경에 투영한다. 똑같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1927년의 카니발은 빨리 감기처럼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듯 돌아가는 데 반해, 1930년의 카니발은 자세하고 명료하게 사건의 전말을 보여 준다. 질식할 것 같은 달콤한 연기 냄새가 맴도는 협곡, 동틀 녘 추상적인 연보랏빛으로 물드는 공원, 요란한 음악이 울리고 춤추는 가면 쓴 사람들로 가득한 클럽 등 생동감 있게 묘사되는 1930년 카니발의 장면들은 마치 꿈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던 3년 전 모험의 현장이 현실로 소환된 듯 또렷이 재현된다.

이러한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요인 중 하나는 가우나가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면서 “끝없이 강렬한 생동감을 주는” 일상 세계를 드디어 발견하게 되는 등 “이해력”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든 이야기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주제, 즉 사랑은 주인공에게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때로는 낭만적이고 때로는 비극적인 그 감정은 독특한 유머를 통해 가볍게 누그러뜨려진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이야기는 독해를 거치면서 다양한 의미를 생성시키는 텍스트성이 어느 작품들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사랑과 마술로 빚어진 환상적 분위기 속에서 그려지는 한 청년의 모험 『영웅들의 꿈』은 텍스트 곳곳에 숨겨진 ‘운명’에 대한 말들이 영생과 죽음, 시간이라는 명제들과 밀착하여서 삶에 대한 묵직한 생각거리를 던져 주며, 나아가 결말에 이르러 놀라운 반전의 요소로 작용한다. 한편 비오이 카사레스 작품 대부분은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에서 영화 및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영웅들의 꿈』은 1997년 세르히오 레난 감독에 의해 아르헨티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우리의 운명은 마치 강물처럼 미래를 향해 흘러가지.

그게 바로 우리가 이곳 아래서 상상하는 거야.

미래에는 모든 게 있네. 모든 게 가능하기 때문이지.

거기서 자네는 지난주에 죽었고, 거기서 영원히 살고 있네.”●

 

 

 

■ 작가의 말 & 옮긴이의 말

세르반테스상을 받기 얼마 전, 마드리드에서 열린 ‘작가 주간’에서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소설 중에 어떤 작품이 가장 만족스러웠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영웅들의 꿈』이라고 대답했고, 이 작품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탄탄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선택에는 가장 똑똑한 내 친구들의 의견이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그들은 항상 내 다른 작품들보다 이 작품을 좋아합니다. _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저자의 말」에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모렐의 발명』이다. 그러나 문학비평가와 작가들은 그의 세 번째 소설인 『영웅들의 꿈』을 최고로 꼽으며, 라틴아메리카 소설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라는 데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영웅들의 꿈』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생생하게 재현하는데, 이런 점에서도 보기 드문 아르헨티나 문학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_ 옮긴이 송병선(「작품 해설」에서)

 

 

■ 추천사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는 나의 진정한 그리고 비밀스러운 스승이었다. _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비오이 카사레스는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작가다. 그의 독특한 재능은 비할 데 없다. _ 카를로스 푸엔테스

 

비오이 카사레스는 보르헤스와 더불어 우리 시대 문학의 위대한 장인이다. _ 카밀로 호세 셀라

 

비오이 카사레스가 다루는 주제는 세상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이다. 즉 상상의 육체에 우리는 모든 종류의 환상을 가질 수 있다. _ 옥타비오 파스

 

비오이는 보기 드문 문체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비사실적이고 꾸밈없이 보여 줄 줄 알았던 독창적인 작가다. _ 알바로 무티스

 

‘환희’는 비오이 카사레스 문학을 정의하는 정확한 단어다. _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

 

아르헨티나의 모든 소설가 가운데 가장 광대하고 영속적인 작품을 남긴 것은 바로 비오이다. _ 오스발도 소리아노

 

비평가들이 보르헤스의 작품보다 당연히 먼저 읽었어야 할 비오이의 비범한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이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_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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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Author: Juan Lee (Seung 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