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과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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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회

또 한 가지 첨가해두고 싶은 말이 있군요. 나는 여러분이 앞으로 문학을 전공할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런 것은 지금 큰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앞으로 혹시 문학을 전공하게 되더라도 내 생각에는 그 시발점은 역시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입니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의 원초적인 존재 이유는 나는 왜 살아야 하고 삶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라고 개개인이 던지는 실존적 물음에 대답하려는 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볼 때 매우 해로운 문학교육이 있어 왔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기로 하죠.

이십여 년 전의 이야기니까 여러분은 다행히 이런 잘못된 교육의 희생자가 아닐지 모르죠. 하여간 잠깐 들어보세요. 당시 고등하교 상급반 학생이었던 내 딸과 나 사이에서 하루는 다음과 같은 엉뚱한 문답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 앙드레 지드는 무슨 주의자예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런데 그걸 왜 묻니? 모든 시인이나 작가는 무슨 주의에 속한다고 배웠어요. 그러니까 앙드레 지드도 무슨 주의자라야 한단 말이에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지드는 특히 그렇게 분류될 수 있는 작가가 아니란다. 아버지, 그렇지만 만일 지드가 무슨 주의자냐고 시험문제에 나오면 어떡하죠? 그런 문제야 나오지 않겠지. 만일 나오면 모른다고 쓰려무나. 그럼 점수가 깎일 거예요. 아버지, 이것 보세요.” 그리고는 내 딸은 국어교과서를 펼쳐보였습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문예사조사가 기술되어 있었고 과연 모든 대표적인 서양문인들의 이름이 고전주의로부터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몇몇 주의의 항목으로 나뉘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물고기들을 그 색깔이나 종류에 따라 몇 개의 물통 속에 나누어 잡아넣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가장 유명한 현대작가의 한 사람인 지드가 어느 한 주의에 속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그것을 묻는 문제가 나올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내 딸은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한국문학에서 비슷한 예를 들자면, 이광수는 계몽주의, 염상섭은 자연주의, 김동인은 낭만주의, 김기린은 모더니즘, 한용운은 또 무슨 주의라는 식의 추상적 지식을 갖추는 것과, 그들이 무슨 주의자이건 간에 그들의 작품을 직접 읽으면서 감격하거나 충격을 받거나 혹은 때로는 내던지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을 여러분은 택하겠어요? 나는 전자前者가 전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지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문학이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길을 도리어 스스로 가로막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위지자僞知者밖에는 못 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가령, 이광수를 계몽주의자로 치부해야 할지, 또 김동인이 과연 낭만주의자인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뜻에서인지 하는 따위의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문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의 천착에 맡겨두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수양대군을 읽고 어느 쪽의 역사적 해석이 타당한지, 또 한 걸음 나가서 역사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지 고민해보세요. 그리고 다시 또 한 걸음 나가서,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행위는 남들이 보여주는 이질적異質的인 삶 앞에서 나 자신을 활짝 여는 행위이며, 따라서 부단한 이의제기와 자기개혁의 행위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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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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