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욕망의 결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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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회

이런 동요를 부르면서 행복을 느낀다니 여러분은 내가 정서적情緖的으로는 결국 유아상태로 퇴행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방금 희한한 이미지를 동요에서 발견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했지만, 그런 것이 특히 아이들의 경우이니까요. 프랑스의 어느 교육학자의 말에 의하면 어른들이 터무니없다고 내던지기 쉬운 초현실주의의 시를 아이들은 무척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내가 다른 동요보다도 유난히 그 동요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린이가 향유享有하는 순수한 감수성을 내가 줄곧 지녀왔다거나 혹은 늙으면서 되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런 감수성보다는 덜 순수한 동시에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그 노래에서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인간의 네 가지 욕망, 즉 창조, , 놀이, 구원을 향한 욕망의 결정체結晶體를 찾아보고 좋아하는 겁니다.

 

우선 여기에는 구원의 욕망과 관련된 말들이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엄마이며 또 하나는 병아리와 미나리로 상징된 자연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릴 때에 체험한 바와 같이 어머니는 아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구원의 원리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을 때, 그 손을 잡고 있을 때 아이는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악으로부터 보호받는다고 느낍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TV가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끔찍한 지진을 보도했습니다. 그중의 한 장면으로, 나는 건물더미 밑에서 몇십 시간 만에 구조된 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 다시 안기는 감격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상처투성이의 아이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한데 그 영상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이 이름다운 동요를 상기시켰습니다. 내가 아이러니컬하고 또 심지어 무정한 사람이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그 미소는 어머니라는 종국적終局的 구원을 되찾은 아이의 크나큰 기쁨의 표현이며 나도 그것을 추체험追體驗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애가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다 해도 그 순간에 어머니에게 안기지 못했다면, 그 구출이 그를 도리어 당황하게 하고 다시금 공포로 떨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지진이라는 자연의 처참한 이변 앞에서, 병아리를 놀게 하고 미나리 파란 싹을 돋아나게 하는 자연, 일체의 생명을 잉태하는 자연이 도리어 기적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기적과 같은 자연이, 흔히 말하듯이 사악한 의붓어미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애로운 친어머니로서의 자연이 무릇 존재를 태어나게 하고 지켜주기를 바라면서.

 

둘째로 이 동요는 앎의 욕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앎의 세계로 유도하려고 합니다. 텍스트를 곧이곧대로 읽자면, 아이가 어머니를 부르거나 어머니의 손을 끌고 들로 나서서 엄마, 이것은 병아리고 저것은 미나리야하고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겁니다. 도리어 어머니가 아이에게 병아리, 미나리, 파란 싹, 그리고 아마도 하늘과 땅을 가리켜 보일 겁니다. 한데 이렇게 사물을 가리키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것을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어린아이 앞에는 마치 태초의 일처럼 삼라만상이 혼돈으로부터 깨어납니다. 구원의 원리였던 전능全能의 어머니는 이제 전지全知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아이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물을 발견하고 이름짓는 것처럼 꾸며져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내 생각에는 아이에게 능동성能動性을 부여함으로써 자진해서 앎의 세계로 달려가기를 촉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앎을 향한 욕망의 자발성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죠.

 

셋째로 이 동요에는 이중의 뜻에서 놀이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병아리가 논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병아리가 삐악거리면서 종종걸음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은 진정한 놀이가 아니라 어떤 생체적生體的인 반응이거나 욕구일 겁니다. 적어도 우리가 전에 살펴본 것과 같은 인간의 놀이와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생각에서는 동물과 그 자신 사이에는 놀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하여 일체성이 성립됩니다. 동물은 자기와 똑같이 유희를 통해서 삶의 약동과 기쁨을 느끼는 존재이며 또한 함께 놀아주는 상대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가 볼 때는 병아리도 강아지도 또 개구리도 노는 데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놀이와의 관련에서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시가 언어의 유희를 특별히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그 칠오조의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잠시일망정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행복과 평화는 시의 언어에 거센 소리가 없기 때문에 더욱 부드럽게 와닿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거센 소리가 꼭 한 군데 있으니까요. ‘파란 싹가 그것이죠. 한데 이 거센소리의 역할은 참으로 희한합니다. 그 소리가 들어 있는 파란이라는 형용사는, 병아리의 노란색으로 상징된 평화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힘이며 색깔이며 소리입니다. 여기에서 이 말은 반드시 파아란이라고 입을 크게 벌리면서 길게, 그러나 너무 강하지 않게 발음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소리와 더불어 미나리 싹이 싱그럽게 그리고 다소곳이 돋아납니다. 부드럽고(‘엄마 엄마’) 율동적인(‘뿅뿅뿅’) 소리를 배경으로 삼고 예쁘게 솟아오르는 이 파란이라는 형용사,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의 행복한 결합`그 모든 것이 생명의 찬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동요가 상상의 산물, 즉 창조를 향한 욕망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겠군요. 우리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 즐깁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끌고 들판으로 나갔다는 것 자체가 좀 의심스러웠는데, 더 일목요연一目瞭然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가사를 보자면 병아리떼가 놀고 가자 미나리 싹이 쑤욱 돋아났고 아이는 그것을 모두 본 것처럼 되어 있는데, 과연 현실적으로 그럴 수가 있을까요? 놀고 간 병아리떼와 미나리 싹의 돋아남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나 선후관계라도 실지로 있단 말인가요? 혹시 그런 것을 보았다고 말하거나 그런 연관이 사리에 맞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머리가 좀 돈 것이겠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거짓말이 아이들의 현실인식에 해롭다는 핑계로 이 동요를 금지곡으로 만들겠습니까? 내가 두 번째 만남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여러분이 들어주었다면 절대로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문학작품이란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기능의 하나로 삼고 있다는 데 동의했을 테니까요. 석 줄밖에 안 되는 이 동요는 색깔, 소리, 이미지를 기막히게 아울러서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탄생시키고 있습니다. 따듯한 봄날에 푸른 하늘을 이고 들에 나타난 어머니와 어린아이, 그 앞에서 병아리가 놀더니 미나리 싹이 돋아나는 것을 바라보는 그들의 매혹된 시선`그 장면을 꿈처럼 그려보세요. 그것은 행복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더럽고 불안하고 다툼으로 얼룩진 현실에 대한 항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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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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