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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런던에서 발행되는 『더 타임즈』를 구독하며 아프리카에 관한 소식을 주의해서 보았다. 거기에는 아프리카의 “말할 수 없는 풍요함이 진취적인 자본가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선언하는 기사들과 함께 잔혹한 노예 무역 업자들이 아프리카인들,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버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리빙스턴의 기록들도 실려 있었다. 레오폴드의 마음속에는 노예 무역을 근절하려는 인도적 열정과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경제적 열정이 합쳐졌다. 그는 선교사, 지리학자, 시민 운동가들을 끌어들여 기독교와 과학, 인도주의를 대변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물론 그의 인도주의적 열정은 “거대한 아프리카 케이크의 한 조각”을 차지하려는 본래 목적을 위한 겉치레일 뿐이었다. 우선 유럽 각국의 지리학자들을 모아 거창한 회의를 주최하여 국제아프리카협회International African Association를 조직했다. 내막을 잘 모르는 많은 저명인사들은 열광했고, 찬조금도 많이 냈다. 레오폴드의 반反노예 무역 계획은 이 시대 최고의 인도주의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때 스탠리가 다시 한 번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탐험을 시도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동해안에서 출발하여 2년 반 동안 11,000킬로미터를 주파한 후 1877년에 콩고 강 하류에 도착했다. 이 여행은 실로 대단한 위업이었지만 그 내면을 보면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기 자신의 말대로 60-80곳의 마을을 공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전진했고, 일꾼들에게는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했다. 도착지 가까운 콩고 강 하류 지역에서는 특히 고통스러운 행군이 계속되었다. 일꾼들은 3톤짜리 카누를 계속 들고 이동해야 했다. 더 이상 카누를 이용할 수 없는 폭포와 급류 구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로서는 강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