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기帥字旗를 아시나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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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회

어재연 장군(魚在淵, 1823~1871) 수자기를 보러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는 내내 마음이 떨렸다. 그 떨림은 136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깃발을 직접 대할 수 있다는 단순한 문화적 호기심의 발동만은 아니었다.

전시되어 있는 수자기(430×413cm, 재질은 면과 마)는 상상보다 컸다. 나는 숙연한 마음이 들었고 수자기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 350여 명의 명복을 빌었다.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187161012시에 함대 포격을 시작하고, 2시에 상륙작전을 시도해, 4시에 지진草芝鎭을 점령했다. 이날은 음력으로 423일이다. 조금(음력 8, 23일은 반달이 뜨는 날로 물이 가장 적게 들어오고 적게 나가는데, 바닷가 사람들은 이 물때를 조금이라 부른다)날 미국 군함은 지진을 공격하였다. 김포와 강화 사이를 통과하는 염하(강화해협)의 물살은 세고 간만의 차가 크다. 물이 천천히 들고 나는 날을 미군들은 선택했던 것이다. 4월 조금날 물때로 보아, 미군들이 공격을 시작한 12시는 썰물이 두 시간 반 정도 진행된 시간이고, 상륙작전을 전개한 오후 2시는 물이 최대로 빠져 수심이 가장 낮을 때다. 이나 보앞에는 여(물이 밀려오는 만조 때는 물에 잠기는 바위)가 잘 발달되어 있어 배들의 접근을 막기에 용이한데, 미군들이 지진을 공격하였을 때는 물이 다 빠져나갔을 때라 여의 쓰임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적병들의 엄폐물이 되었고 뻘에 빠지지 않고 뭍으로 오를 수 있는 통로가 되었으리라.

 

몇 년 전 염하를 거슬러 지진까지 가는 배를 탈 기회가 있었다. 뱃놈도 아닌 나는 말할 것도 없었고, 배를 모는 선장도 행길이라서인지 얼굴에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진 근처는 여가 많고 물살이 세다. 겁이 나면서도 배를 탄 것은 프랑스, 미국, 일본이 침탈해 들어온 염하를 뱃길로 들어오며 꼭 한 번 강화도 해안선을 보고 싶어서였다. 선장은 물살이 느리고 약한 조금 근처 날의 밀물 때를 선택했고 배를 천천히 몰았다. 선장이 밀물 때를 택한 까닭은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기름을 절약할 목적도 있었겠지만 배가 물속 여에 혹시 걸려 움직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야 했기 때문일 거였다. 배가 여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다가도 밀물 때는 물이 차면 배가 다시 떠올라 움직일 수 있으나, 썰물 때는 물이 나며 배가 전복될 수도 있다. 동검도 앞 선상 검문소를 지나고 황산도 앞을 지나자 멀리 지대교가 보였다. 몇 번째 다릿발 사이를 통과해야 여를 피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을 때 대명리 포구에서 출발한 배가 지대교 아래로 달려오고 있었다. 배 뒤에는 그물 놓은 자리를 표시할 작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지진에 이어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들은 611일 광성보를 공격했다. 강화도를 지키는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 정상에 있는 손돌목돈대에 수자기를 내걸고 이들과 맞섰다. 미군은 함대 포격과 함께 이미 지진을 통해 상륙한 병사들을 침투시키는 수륙 양동작전을 펼쳤다. 조선의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막아섰으나 끝내, 남북전쟁을 치른 미 정예부대의 전투 경험과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 참패를 당했다. 어재연 장군과 조선군 350여 명이 순국했다. 그러나 미군 사망자는 겨우 세 명뿐이었다.

충장공 어재연 장군 수자기 귀환 학술대회에서 김재승 박사는 사상자 수가 현격하게 차이 난 원인을 조선정감의 실증 기사에서 찾아 제시해보였다.

면포가 총탄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실험하도록 하였다. 면포에 솜을 넣어두어 겹으로 만들었으나 탄환을 쏘니 모두 관통되었고, 열두 겹을 쌓으니 이에 뚫고 나가지 못했다. 드디어 면포 열세 겹에다 솜을 넣어서 배갑背甲을 만들고 머리에는 등 넝쿨로 만든 투구를 쓰도록 하여 포군을 훈련시키니 한여름에는 군사가 더위를 견디지 못해 코피를 흘렸다.”

이는 신미양요 때 조선군들이 솜 아홉 겹 놓은 핫 을 입고 있었다는 미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조선군의 피해가 컸던 원인을 김재승 박사는 이 배갑에 있다고 보았다. 총탄과 포탄에 맞아 불이 붙어 몸이 뜨거워 100여 명의 조선군이 염하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는 추론이 그것이다. 미군 기록에도 엄청난 수의 조선군이 물로 뛰어들어 염하가 피로 물들었다고 되어 있다. 조선군과의 싸움에서 이긴 미군은 철수하며 각종 무기와 수자기를 포함한 깃발 50여 기를 전리품으로 탈취해갔다.

 

그렇게 고국을 떠났던 수자기가 우여곡절 끝에 귀환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조상이 남긴 것이나, 우리 것이 아닌 미국의 것으로. 미군이 200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빼앗은 깃발 250여 점 중 가장 큰 기인 수자기가,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장기 대여되어 와, 눈앞에 전시되어 있었다.

강화도에서도 전시 계획이 있습니까?”

?”

광성보에 가지고 가 어재연 장군과 350여 명의 조선군 영혼을 위로해주고 한을 풀어줄 해한제 계획은 있나요?”

아직은, 강화도에 갈 계획이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강화도에 사는 주민이라고 소개하고 고궁박물관 안내소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내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20091. 광성보의 바람은 매섭고 찼다. 광성보 안해루와 용두돈대 보수공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왜바람에 들썩였다. 광성보 정문 안해루를 지나 중군 어재연 외 51명의 순절비신미순의총이 있는 산 언덕길을 올랐다. 길가에는 뿌리를 드러낸 소나무들이 우악스럽게 대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간혹, 복토覆土를 해줘야 하지 않겠냐는 문의가 들어오는지, 복토를 잘못하면 소나무가 죽는다는 안내 글이 박혀 있었다. 침엽수를 지나는 바람 소리가 머리로 파고들었다.

51인의 합동묘인 신미순의총 봉분 일곱 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봉분의 크기들은 작은 편이었고 애써, 좋은 으로 형상을 만들어보면 북두칠성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무덤가에는, 꽃 때 방아깨비 비린내를 풍기는 배롱나무 세 그루가 쓸쓸히 서 있었다. 어재연 장군 쌍충비에 참배하고 손돌목돈대에 올라보았다. 돈대 성벽에는 염하를 향해 대포 구멍 세 개가 나 있고 그 구멍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에는 잡목들이 끼어들어 있었다.

 

조선군은 근대적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슐레이, 기함에서의 45(1904) 중에서

 

신미양요 참전 미군의 기록을 떠올려보며 한동안 나는 찬 돌성벽을 더듬어보았다. 맹폭격을 당해 포연에 뒤덮인 돈대 안에서 조선 병사들이 움직이는 듯도 했고 화약이 폭발하는 열에 돌성벽이 뜨거워지는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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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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