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존재, 의식과 의식,
기억과 기억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틈새
그 틈새가 펼쳐 보이는 알레고리!
김솔의 신작소설 『행간을 걷다』가 핀 시리즈 쉰한 번째 소설선으로 출간되었다. 익숙한 장소와 인물을 등장시키는 듯하지만 특유의 낯설게하기 기법으로 독자를 전혀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김솔은 2012년 등단 이후 <문지문학상> <김준성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하며 그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다.
“언어가 아닌 여백으로 이야기를 완성해나가는,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이기호) “정교함과 분방함 사이에서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주행해온 그의 문장이, 어째서 여태 소수의 독자에게만 발견되어 일종의 비의秘儀처럼 읽혔는지 미스터리다.”(구병모)라는 평가를 받는 김솔의 이번 소설은 한 남자의 두 개로 나뉜 자아에 관한 이야기이다.
금고 제작자의 삶을 살다 환갑을 앞두고 뇌졸중을 앓게 되며 편마비가 온 남자는 마비된 한쪽 몸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권태와 회환에 빠질 것이라 예감한다. 죽음의 그림자를 품고 살게 된 남자는 마비된 몸과 온전한 몸으로 자아를 나누고, 마비된 쪽을 ‘너’(혹은 ‘쉥거’)라 지칭한 후, 그 안에 회환과 무력을 파묻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온전한 쪽만을 ‘나’라 여기고, 그 안에서 자기에게만 유효한 시간을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밝혀지지 않은 병의 원인이 몸속에 숨어 있다면 밝혀지지 않은 치료 방법 또한 몸속에 담겨 있을 것이라 여긴 남자는 매일 같은 시간에 하천을 따라 걷기로 결심한다. 매일 만나는 하천은 뇌졸중 환자의 시간처럼 느리게 흐르는 듯 보이지만, 고요한 그곳은 사실 군부 독재 시절 개발로 사라지고 인공 하천으로 거듭난, 뒤틀려진 욕망이 자리한 곳이다. 남자는 산책을 하며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과 미수에 그친 이야기 등을 떠올리며 자신을 둘러싼 욕망의 본질과 속성을 파헤치려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죽은 ‘너’와 살아 있는 ‘나’는 ‘우리’가 되고, 하천은 행간이 되고, 이야기는 물을 사이에 둔 길 위의 모든 것이 되며 영겁과도 같은 천변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시종일관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젖히며 생의 기쁨을 조잘거리는 이 소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일설하는 바는 명징하다. 삶의 생동과 진실이 약동하는 림보, 모순이 요동치는 여백, 모든 순간의 코리스모스가 살아 숨 쉬는 행간이 존재해야만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것. 그런 이중성의 시공간을 사유하며 ‘행간을 걷다’라는 현재진행형의 문장을 시인처럼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동어반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 특수한 양자적 진술의 세계야말로 모두에게 모순적이어서 공평한 이 시대의 보편적 정신이다.
-전청림(문학평론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하천을 따라 산책하는 주인공과 함께 소설이 던지는 화두를 함께 풀어가며 존재와 존재, 의식과 의식, 기억과 기억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틈새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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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솔은
1973년 광주에서 태어나 2012년 『한국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 『망상,어語』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유럽식 독서법』 『당장 사랑을 멈춰주세요, 제발』 『말하지 않는 책』, 장편소설 『너도밤나무 바이러스』 『보편적 정신』 『마카로니 프로젝트 』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 『부다페스트 이야기』 『사랑의 위대한 승리일 뿐』 등이 있으며, 〈문지문학상〉 〈김준성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표4
매번 결말이 달라지는 꿈,
입구와 출구가 모두 없는 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소설!
문장, 문단, 서사의 차원까지 모조리 양자의 비밀을 품은 이 소설은 “진리는 문자에 담기지 않고 여백에 담기”며 “그 안에서 쉴 새 없이 진실이 요동”친다는 책의 의미를 현시한다. 다시 말해 문자보다는 여백이, 여백보다는 그 안에 담긴 운동성이 진리에 더 가깝겠다는 것이다. (……) 이 소설에서 행간이란 텅 빈 공허가 아니라 물질로 가득 찬 요란한 요새이며, 모순되는 것들이 부글부글 끓는 채로 유지되는 시끄러운 침묵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걷는 행간은 한적하고 깊은 우물 같은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주객과 시공간과 인과율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팽팽한 힘줄 같은 것이다. (……) 이 소설은 남자가 자기 안의 모순으로 퇴행하듯, 이야기의 진행마저도 자꾸만 이야기 안으로 퇴행하는 기이한 균열을 현시한다. 행간의 장력 탓에 영원히 끝나지 않는 소설의 마법, 알레프의 저주이자 축복 같은 이 소설은 다시 하천의 이야기를 끌어내며 끝이 아닌 지속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전청림,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나는 둘로 나뉘었다. 오른쪽 절반은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왼쪽 절반에만 겨우 내가 남았다. 둘로 나뉘기 전까지 나는 오른손잡이였다. 그래서 나의 인생은 늘 오른쪽에서 시작됐다가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오른손은 모험을, 왼손은 균형을 담당했다. 그러니 왼쪽 절반에 유폐된 나는 권태와 허무 사이를 오가다가 여생을 소진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서 사라진 오른쪽 절반의 인간이 나는 몹시 그립다. 그는 나를 통째로 지배하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9-10쪽
* 오른쪽 절반이 나의 무덤이라면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회한과 무력감을 모두 그곳에 파묻을 것이다. 왼쪽 절반뿐인 나는 지금부터 어린아이나 성자의 삶을 살아가겠다.
-27쪽
* 그 하천에 사는 물고기 중에는 도나우강에서 길을 잘못 든 개체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살을 거슬러 올랐으나 그 하천이 시멘트 바닥에 뚫린 취수공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크게 절망했을 것이다. 몸속에 알이나 이리를 가득 품은 채 물 위로 떠오른 것들은 비닐봉지에 담겨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태워졌을 것이다. 어쩌면 아내도 이와 똑같은 상황인지 모르겠다. 모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어머니의 처절한 만류를 뿌리쳐가면서까지 너와 내게로 헤엄쳐 왔다가 뒤늦게나마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자신을 도와줄 어머니는 이미 살해당했고 탈출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금고마저 일 년째 열리지 않고 있으니, 그녀는 밤마다 정부의 품에 안겨서 자신을 산 채로 화장시켜 달라고 읍소하고 있진 않을까.
-82-83쪽
* 뱀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토록 잔혹한 폭력을 당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누구든지 허기를 느끼면 뭔가를 삼켜야 한다. 배가 부르면 동물들은 상대의 목숨을 탐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들은 허기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매일 죽이고 없앤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들의 행동을 모두 이성적이고 이타적인 것으로 윤색한다.
-97-98쪽
* 그러니 우리의 죽음은 오른쪽 절반뿐인 너의 뇌 속에 숨어 있는 죄악으로 인해 왼쪽 절반뿐인 내가 살해당하는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우리의 죽음에 수긍하려면 너의 죄악부터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따금 나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야 할 수도 있겠지. 막대자석을 아무리 작게 잘라내더라도 양극이 남는 것처럼 우리를 아무리 작게 나누더라도 모든 조각에는 너와 내가 똑같은 부피로 편재해 있을 것이므로 매 순간 너와의 투쟁과 협상은 불가피할 것 같다. 우리 안의 순수함과 사악함을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너를 쉥거라고 부르겠다. 네가 나를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127-128쪽
* 나는 쉥거를 죽이고 내 영혼과 육체의 유일한 주인으로서 오래 살 것이다. 아내의 임종까지 지켜본 뒤 법적 상속자가 내게 들려주는 주기도문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며, 나보다 먼저 죽은 자들을 향해 상스러운 저주를 쏟아부을 것이다. 기괴한 세계와 기구한 운명을 물려준 그
들에게 감사하거나 미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236쪽
* 하긴 아내도 한때 우리를 매혹했던 소녀였다. 그녀의 매력을 먼저 알아보고 열광했던 쪽은 내가 아니라 쉥거였고, 아내 역시 나보다는 쉥거에게 더 호감을 느꼈다. 어쩌면 우리와 아내의 결혼 생활을 파국으로 내몬 장본인은 아내와 쉥거 사이에 물혹처럼 박혀 있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아무리 애써도 그걸 터트리거나 잘라낼 수 없자 아내와 쉥거는 상대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판단됐을 때 쉥거는 슬그머니 내 뒤로 숨으며 자신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140-141
*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에 하천변을 마지막으로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금고 안에 우리의 남은 인생을 모조리 쑤셔 넣은 다음 치사량의 두 배가 넘는 수면제를 한꺼번에 삼키기로 동의했다. 현실과 꿈, 삶과 죽음 사이의 영토는 너무 푹신해서 누구도 걸어서는 건널 수 없고 망둥이처럼 배를 깔고 미끄러지며 나아가야 한다.
-167
* 불필요한 진실을 영원히 봉인하기 위해 죽음이 인간을 찾아온다. 조물주에게도 비밀을 영원히 숨겨둘 금고가 필요한 것이다.
-175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핀 소설>, 그 쉰한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분기별 출간하는 것으로,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출간되었거나 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2월 25일)
040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2022년 4월 25일)
041 한정현 『마고麻姑―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2022년 6월 25일)
042 이주란 『어느 날의 나』(2022년 8월 25일)
043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2022년 10월 25일)
044 이서수 『몸과 여자들』(2022년 12월 25일)
045 천희란 『K의 장례』(2023년 2월 25일)
046 문진영 『딩』(2023년 4월 25일)
047 임솔아 『짐승처럼』(2023년 6월 25일)
048 강화길 『풀업』(2023년 8월 25일)
049 김지연 『태초의 냄새』(2023년 10월 25일)
050 이장욱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2024년 1월 25일)
051 김솔 (근간)
052 김멜라 (근간)
053 안보윤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오세열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오세열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학고재 상하이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 및 그룹전을 가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프레데릭 R. 와이즈만 예술재단(미국 로스앤젤레스) 등 국내외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