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권력 욕망과 그 애환을 해학과 풍자의 거울로 본
한국 문단의 얼굴 윤흥길 작가의
『완장』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
“『완장』은 현대 한국의 속어 혁명을 통해 성장한 장편소설 중
가장 희극적인 동시에 가장 진지한 인간 사회의 우화다”
_황종연(평론가)
권력의 허구성을 풍자와 해학의 기법으로 표현한 작가 윤흥길의 대표작 『완장』이 출간 40주년을 기념해 장정을 새롭게 하고 문장과 표현을 다듬어 개정판으로 선보인다. 우리 문학의 해학적 전통을 계승하며 20세기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전형을 제시한 『완장』의 40주년 특별판은 세대를 거듭한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뜻깊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가 윤흥길은 초판 출간 후 40년 만에 다시 책을 펼쳐 손수 퇴고함으로써 『완장』의 새로운 ‘정본’을 완성했다. “출간한 지 40여 성상이 흐르도록 마치 늙은 호박을 밭에서 갓 거둔 맏물 수박처럼 줄곧 시원칠칠한 눈빛으로 대해주신 독자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의 염을 표하기 위함이다”라고 이번 특별판의 소회를 밝힌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을 향한 끝없는 애정과 열의가 느껴진다.
『완장』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 팽배했던 정치권력의 폭력성과 보통 사람들의 억울한 삶을 조명하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암울한 역사와 권력의 어두운 이면을 예리하게 짚어낸 작품이다. 특히 작가는 한국인의 권력의식을 ‘완장’이라는 상징물에 담아내고, 그와 얽혀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한국인의 권력 욕망과 그 애환이라는 심각하고 묵직한 문제의식을 해학과 더불어 남도 방언의 구수한 입말을 입혀 우리 문학의 저력을 보여준다.
“작가인 나를 일개 미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 거대 권력에 효과적으로 보복하는 길은 역시 작가의 펜을 무기 삼아 권력 그 자체를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으로 희화화함으로써 실컷 야유하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사실주의적 정공법으로는 독재 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어려운 시국이었다. 야유의 수단으로 풍자와 해학을 동원함으로써 당국의 검열을 우회해야만 했다. 이것이 장편소설 『완장』의 출생 배경이다. 이 소설을 씀으로써 나는 비로소 실의와 자괴지심을 딛고 재기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 소설이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렸던 나를 구원한 셈이다.” _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 작가의 말에서
“돈도 완장이고, 지체나 명예도 말짱 다 완장이여!”
한국 사회 저변에 깔린 권력의식에 대한 예리한 고발
땅 투기로 돈푼깨나 만지게 된 졸부 최 사장은 널금저수지의 사용권을 얻어 양어장을 만들게 되고, 저수지 감시를 이곡리의 한량 임종술에게 맡긴다. 감시원 완장을 두른 종술은 완장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부로 마을 사람들 위에 안하무인으로 군림하려고 발버둥친다. 작가는 완장을 두르면서 나타나는 종술이라는 인물의 변모를 통해 권력의 속성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비루한 삶을 폭로한다. ‘완장’의 속성을 통해 권력을 희화화하고, 희화화된 권력을 취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주인공을 내세워 권력을 더욱 풍자하는 격이다.
“해학적인 묘사를 깔면서 완장으로 상징되는 권위를 조소하고, 그러면서도 그 권위 앞에서 위축되는 선량한 ‘졸때기’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그것은 오늘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신동욱)라는 평으로 1983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완장』은 전통 패관문학이 담고 있는 해학과 풍자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채만식 작가의 해학적 전통을 있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의 정체성을 대표한다.
평론가 김병익은 『완장』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현실의 분명한 알레고리”를 가진 작품이라고 평하면서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정치 상황을 가늠하는 잣대”로 “제식훈련”을 차용했던 작가가 “한국인의 권력의식을 진단하는 도구”로 ‘완장’을 차용하고 있다고 짚었다. 또한 이 작품은 “권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심리적 반응과 효과를 요구해왔던가 하는 보다 심각하고 진지한 반성들을 이 하잘것없는 완장에 얽힌 숱한 사건들을 통해 제기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권력의식의 상황을 가장 첨예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평론가 이보영은 “윤흥길의 중요한 관심사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탄생과 죽음, 실존적인 고독과 절망 및 구원의 문제”라 보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완장을 통해서 나는 한번쯤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우리 시대의 한 징후를 다루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가 역점을 두고자 했던 것은 완장을 둘러싼 사람들을 통한 인간 본능의 탐구 쪽이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평론가 황종연은『완장』을 “한편으로 미친 듯이 권세를 쫓는 남자들의 어리석음과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하고, 다른 한편으로 폭력 없는 세상을 갈망하는 여성들의 메시아적 힘을 상기시킨다”고 진단하면서 “현대 한국의 속어 혁명을 통해 성장한 장편소설 중 가장 희극적인 동시에 가장 진지한 인간 사회의 우화”라고 극찬했다.
과거의 반성, 현재의 거울, 미래의 통찰이 되어줄 우리 시대의 고전
완장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꼭 한 번 읽어야 하는 책!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로 등단한 작가 윤흥길은 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꾸준히 창작 활동에 임하고 있는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원로 작가다. 윤흥길 작가의 작품은 각종 평론과 논문으로 많은 논자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고 있으며, 교과서 수록작 및 교육기관 추천작으로서 선정되면서 시대와 세대, 계층을 넘나들며 독자들과의 접점을 꾸준히 확장해가고 있다. 특히 문학작품의 영상화가 진귀했던 1980년대에 TV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전 국민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여전히 정치권이나 각종 언론매체의 사설 및 칼럼 등에서 종종『완장』의 내용이 인용되곤 한다. 그만큼『완장』이 우리 한국 문학사와 사회 문화 전반에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력은 상당하다.
윤흥길 작가의 『완장』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를 좀먹는 권력의 위선, 권력을 향한 인간 본성과 욕망 등을 그 뿌리부터 찬찬히 톺아볼 수 있고, 미래를 위한 질문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번 40주년 특별판 출간은 우리 안에 산재한 여러 갈등과 모순의 시원을 직시할 수 있는 ‘환기’이며 불행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말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 이치쯤은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호박에 새퉁스럽게 줄 죽죽 내리그어 세상에 다시 내놓는 까닭은 결단코 수박으로 위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출간한 지 40여 성상이 흐르도록 마치 늙은 호박을 밭에서 갓 거둔 맏물 수박처럼 줄곧 시원칠칠한 눈빛으로 대해주신 독자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의 염을 표하기 위함이다. ……그 무렵 나는 시국 사건의 여파로 본의 아니게 노고단 밑 심원마을에 들어가 한 달여 동안을 세상과 등진 채 혼자 지내야 했다. 그곳에서 자취로 생활하는 동안, 태생부터 잘못된 독재 정권이 휘두르는 폭압 앞에 벌레처럼 무력한 존재로 움츠러든 나 자신이 너무도 불쌍하고 처량해서 한 번도 거울 속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심심산골에서 오랫동안 자학의 시간을 견디던 끝에 나는 마침내 유일한 자구책을 만나 하산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작가인 나를 일개 미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 거대 권력에 효과적으로 보복하는 길은 역시 작가의 펜을 무기 삼아 권력 그 자체를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으로 희화화함으로써 실컷 야유하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사실주의적 정공법으로는 독재 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어려운 시국이었다. 야유의 수단으로 풍자와 해학을 동원함으로써 당국의 검열을 우회해야만 했다. 이것이 장편소설 『완장』의 출생 배경이다. 이 소설을 씀으로써 나는 비로소 실의와 자괴지심을 딛고 재기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 소설이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렸던 나를 구원한 셈이다.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제5판) 작가의 말’에서
그동안 『완장』의 내용이 인용된 사례들을 대충 훑어볼라치면 한 가지 기현상이 눈에 띈다. 여가 야를, 야가 여를 꾸짖고 보수가 진보를, 진보가 보수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의도하에 내 소설을 임의로 차용하는 경우 말이다. 한 편의 해학소설을 통해 꾀죄죄한 가짜 권력의 떠세하는 행태를 그려보임으로써 진짜배기 거대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을 끄집어 드러내고자 했던 내 창작 의도에서 한참 멀리 벗어나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거나 때로는 아전인수로 사용되는, 웃지 못 할 사례들이 종종 생겨나곤 한다. 만일 지금까지 칼인 줄 잘못 알고 남의 깃털을 무단히 가져다 아무렇게나 휘두르신 분들이 계시다면, 제발 그 보잘것없는 물건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으실 것을 이 자리를 빌려 간곡히 당부 드리는 바다. -‘제4판 작가의 말’에서
나는 『완장』을 집필하면서 많이 행복해 했다. 권력이 나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내가 권력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착각이 내가 느끼는 행복감의 원천이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꼬집고 할퀴고 옆구리와 발바닥을 간질임으로써 우스꽝스런 꼬락서니로 짓뭉개놓았노라고 생각했을 때의 그 쾌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제3판 작가의 말’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금의 우리 정치 현실을 두고 생각할 때 우리의 주인공 임종술과 김부월이 권력의지 앞에서 매우 착종된 태도를 보였던 저 80년대적 상황하고 전혀 다를 게 없기 때문에 매우 불행한 노릇이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제2판 작가의 말’에서
만약 독자들 가운데서 이 작품을 읽고 어느 정도 재미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작가의 계산된 의도에 따르는 재미라기보다는 우리네 시골사람들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성에서 비롯되는 재미일 거라고 말하고 싶다. 쓰는 동안에 내가 줄곧 의식했던 것은 바로 그 해학성이다. 우리의 고전문학 속 곳곳에서 보배처럼 빛나던, 그러나 채만식 선생을 마지막으로 이제는 거의 끊기다시피 한 우리 문학의 해학적 전통이 지난해에 나를 내내 사로잡고 있었던 셈이다. -‘제1판 작가의 말’에서
추천의 말
과거 한국의 장편소설 작가들은 톨스토이를 읽고 위대한 정신을 접했고, 발자크를 읽고 예술적 방법을 배웠지만 정작 창작에 성공한 것은 종종 한국어의 속어 표현과 민담 모티프의 능숙한 활용을 통해서였다. 훌륭한 증거가 20세기 전반에는 채만식의 작품 중에, 후반에는 윤흥길의 작품 중에 있다. 『완장』은 한국인의 권력 욕망과 그 애환이라는 주제를 농경 문화가 우세한 1980년대 작은 지방 사회를 배경으로, 저마다 입담 세고 넉살 좋은 사람들의 사연 속에서 풀어간다. 한편으로 미친 듯이 권세를 쫓는 남자들의 어리석음과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하고, 다른 한편으로 폭력 없는 세상을 갈망하는 여성들의 메시아적 힘을 상기시킨다. 『완장』은 현대 한국의 속어 혁명을 통해 성장한 장편소설 중 가장 희극적인 동시에 가장 진지한 인간 사회의 우화다. -황종연(문학평론가)
주요 내용
호남지방 야산개발 사업에 편승하여 벼락부자가 된 최 사장은 저수지 사용권을 따내어 양어장을 만들고 그 관리를 동네 건달 종술에게 맡긴다. 적은 급료였지만 완장을 차게 해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종술은 관리인으로 취직한다. “종술은 노란 바탕의 파란 글씨를 세 개의 빨간 가로줄로 장식하고 싶었다. 그리고 기왕 고치는 김에 아예 글씨도 어쩐지 약한 느낌을 주는 ‘감시’보다는 좀 더 권위가 있어 보이는 ‘감독’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가 새겨진 감시원 완장, 그 서푼어치의 권력을 찬 종술은 낚시질을 하는 젊은 남녀들에게 기합을 주기도 하고 고기를 잡던 초등학교 동창 부자를 폭행하기도 한다.
완장의 힘에 빠진 종술은 읍내에 나갈 때도 완장을 두르고 활보한다. 하지만 종술의 아버지는 종술과 같이 완장에 집착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었고, 종술의 어머니인 운암댁은 완장에 집착하는 종술을 두고 종술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완장에 미혹된 종술을 걱정한다. 완장의 힘을 과신한 종술은 급기야 자신을 고용한 사장 일행의 낚시질까지 막아서며 패악을 부리다 결국 관리인 자리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종술은 해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수지 주변을 맴돌며 봄 가뭄에 저수지 물을 빼려 하는 수리조합 직원, 경찰과 크게 부딪히게 되는데…….
책 속에서
그해 이른 봄부터 이곡리 일대를 온통 휘젓고 다니며 마냥 으스대는 종술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종술의 성깔을 익히 아는 이곡리 주민들은 그의 행패가 두려워서 감히 맞대놓고 그를 어쩌지는 못했다. 주민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그의 뒷모습을 겨냥하며 주먹으로 쑥덕감자를 먹이기도 하고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보이기도 할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구름 의자에라도 앉은 것같이 더욱 거드름을 피우고 다녔다. -23쪽
고단했던 생애를 통하여 직접으로 간접으로 인연을 맺어온 숱한 완장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종술의 뇌리를 스쳤다. 완장의 나라, 완장에 얽힌 무수한 사연들로 점철된 완장의 역사가 너울거리는 치맛자락의 한끝을 슬쩍 벌려 바야흐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종술의 가슴을 유혹하고 있었다. ……어느 시기나 다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보려고 몸부림치는 그의 노력 앞에는 언제나 완장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완장 앞에서는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이었다. 완장 때문에 녹아나는 건 늘 제 쪽이었다. 제각각 색깔 다르고 글씨도 다른 그 숱한 완장들에 그간 얼마나 많은 한을 품어왔던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완장들을 얼마나 또 많이 선망해왔던가. -35~36쪽
“못난 조상 만난 죄로 지 애비나, 애비에 애비나, 애비에 애비에 애비맨치로 한펭생 땅만 파먹고 살게코롬 맨들 수야 없잖겄는가? 가난이 웬수고 그놈 그 지긋지긋헌 가난이 도적이지. 여보게 종술이, 지발덕덕 좋은 일 조깨 허소!” -184쪽
이 세상에는 빛깔 다르고 소리와 냄새도 다른 수많은 완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땅도 완장이었다. 없는 땅, 처자식 먹여살리는 데 턱없이 부족한 땅 때문에 여태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려왔던가.
“돈도 완장이고, 지체나 명예도 말짱 다 완장이여.”
그런 것들도 틀림없는 완장의 한 종류였다.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 남들을 큰소리로 부리고 남들 앞에서 마냥 뻐겨댈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다 완장이었다. -190~191쪽
널금저수지와 거기에 딸린 모든 부속물 하나하나를 그는 마치 자기 소유인 양, 제 살점이나 다름없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처럼 끔찍이 아끼는 저수지를 같잖은 사장 나부랭이와 접객 업소의 여종업원 떨거지들로 하여금 손끝 하나도 건드리게 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는 최 사장 일행의 행동을 자신의 인격이나 자존심에 가해지는 일종의 모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263~264쪽
“잘 간수허소. 자네도 한번 맛을 들인 담부터는 완장이란 것이 어떤 물견인지 알게 될 것이네. 완장이 없으면은 어떤 놈이 권력 있는 놈이고 어떤 놈이 권력 없는 놈인지 사람들이 알어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기 땜시 세상에서는 표시가 나라고 완장 같은 물견을 맨들어서 권력을 분간허게코롬 규칙을 정헌다네. 똑같은 사람이면서 누가 누구 머리 우에 서고 누가 누구한티 큰소리를 친다는 게 그렇게 떡 먹딧기 쉬운 노릇은 아니니.” -283쪽
운암댁은 손녀의 볼기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쪼글쪼글 시든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 여인의 파란곡절 많았던 육십 평생이 뭉뚱그려져서 그대로 두 개의 작은 구슬 안으로 녹아든 그런 눈물 방울이었다. 비록 작은 눈물 방울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무게는 그니가 여태껏 지녀나온 보람과 고통과 자부심과 치욕과 희열과 회한과 사랑과 미움서껀 모든 체험의 무게하고도 충분히 맞먹을 만한 것이었다. -378쪽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자기는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완장 차고 댕기는 사장님이나 교수님 봤어?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 없이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줏어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 우리 둘이서 힘만 합친다면 자기는 앞으로 진짜배기 완장도 찰 수가 있단 말여!” -391쪽
운암댁은 물문 근처로 천천히 다가갔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돌팔매처럼 집어던지는 경멸에 찬 눈초리, 낄낄거리는 웃음을 함빡 뒤집어쓴 채로 완장은 물문을 향해서 흘러오고 있었다. 물문에 가까이 이를수록 점점 빠르고 거세지는 물살에 실려 완장 또한 걸음을 재우치고 있었다.
운암댁은 물문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들 때까지 아들의 완장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뗄 수가 없었다. -3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