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구라키 씨가 뭔 사고라도 쳤어?”
“그건 아직…….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얘기를 듣고 다니는 중이죠. 여기도 그렇고.”
“그러셔? 어떤 수사인지는 모르겠는데 구라키 씨를 의심하는 거라면 잘못짚으셨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할 리가 없거든.” 요코는 딱 잘라 말했다.
참고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고다이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요코가 한 말에서 뭔가 걸리는 게 감지되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_58쪽
미궁에 빠진다…….
구라키의 자백은 수많은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큰 수수께끼가 남아 있었다.
어째서 구라키는 33년 전에 체포되지 않았는가, 어째서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원래는 사체 첫 발견자라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구라키 본인도 그저 잘 모르겠다, 라는 대답을 했을 뿐이다.
우리는 정말 미궁에 빠지려는 사건을 해결한 것인가. 어쩌면 새로운 미궁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닌가…….
자꾸만 밀려드는 의심을 고다이는 애써 떨쳐내고 있었다. _106쪽
“방금 전에 이번 사건의 유족분들께 사죄드리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과거 사건의 유족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역시 사죄할 마음이 있습니까?”
“그야, 네, 물론입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난바라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가즈마는 실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찰 발표에서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과거의 사건’이라고 했을 뿐, 살인 사건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금 가즈마가 했던 말은 살인 사건이라고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쪽같이 유도질문에 걸려든 것이다. _175쪽
그런데도 이번 사건으로 구라키 다쓰로의 아들이 다양한 형태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인터넷상에는 비난할 대상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자들이 너무도 많다. 피해자인 시라이시 겐스케 변호사를 비난하는 글까지 난무하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비방은 ‘살해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업자득이다’라는 것이었다.
[……] 피해자 측에까지 그런 비난을 퍼부을 정도니 가해자 쪽에는 더욱더 무자비한 매리잡언罵?雜言이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고소해한다든가 하는 마음 따위, 미레이는 전혀 들지 않았다. 살인은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 모두를 고통에 빠뜨린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_268~269쪽
나도 똑같은 눈빛인지 모른다, 라고 미레이는 생각했다. 범인이 자백을 했고 이제 사건의 진상은 다 밝혀졌다고 모두들 말한다. 그리고 그 진상을 바탕으로 재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진상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이 세상에 어머니와 자신뿐이라고 미레이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또 있었다. 가해자의 가족도 역시 이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_274쪽
“그래, 맞는 말인데 그 두 사람은 특수한 경우야. 공통의 목적이 있었어.”
“뭔데요, 그게?”
“둘 다 사건의 진상을 납득하지 못했다는 점이야. 분명 또 다른 진실이 있다, 그것을 꼭 밝혀내겠다, 라고 마음먹고 있어. 그런데 경찰은 이미 수사는 끝났다는 식이고 검찰이나 변호인은 오로지 재판 준비에만 골몰했지.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으로 서로 적의 입장이지만 오히려 그 둘의 목적이 같았던 거야. 그렇다면 한 팀이 되기로 한 것도 실은 이상할 게 없어.”
“그런가요……라기보다 아무래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죠. 나는 그 기분, 잘 모르겠던데요.” 나카마치는 두부를 입에 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마치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얘기잖아요.” _420~421쪽
■ 일본 서점원과 독자들이 보낸 찬사
★★★★★ 수많은 히가시노 작품 중에서도 최상위에 오를 걸작. 하나하나의 조각이 퍼즐을 채워가듯이 다양한 진실이 밝혀진다.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을 읽을 때의 감정이 밀려왔다.
★★★★★ 인간을 묘사하는 시선에서 거대한 선함을 느낀다.
★★★★★ 오랜만에 묵직한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 연이어 몰아치는 진실과 마지막의 선명한 대반전. 시종 가슴이 뭉클해지는 스토리지만 어딘가 맑은 순수함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틀림없는 히가시노 게이고 최고 걸작이다!
★★★★★ 미스터리로서의 매력과, 원죄와 속죄 그리고 피해자 및 가해자 가족의 심경 등 어려운 문제를 멋지게 융합시켜 엔터테인먼트로 그려내는 솜씨는 가히 발군이다.
★★★★★ 불관용의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비춰주는 영혼을 담은 이야기.
★★★★★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히가시노 게이고다― ‘왕의 귀환!’
■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일본 추리소설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1985년 『방과 후』로 제31회 에도가와란포상을 수상하면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초기에는 주로 수수께끼 풀이형 추리소설을 썼고, 차츰 인간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에 중점을 둔 사회파 추리소설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이과적 지식을 바탕으로 기발한 트릭과 반전이 빛나는 본격 추리소설부터 서스펜스,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미스터리의 외연을 넓히는 다양한 시각과 재료로 폭넓은 장르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비밀』(제5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용의자 X의 헌신』(제134회 나오키상, 제6회 본격미스터리 대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제7회 주오코론문예상) 『몽환화』(제26회 시바타렌자부로상) 『기도의 막이 내릴 때』(제48회 요시카와에이지문학상) 『그대 눈동자에 건배』 『위험한 비너스』 『백야행』 『유성의 인연』 <가가 형사 시리즈> <라플라스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외 다수가 있다.
2021년 작가 생활 35주년을 기념하여 선보인 『백조와 박쥐』는 용의자의 죽음으로 종결된 과거 사건이 30여 년에 걸쳐 일으킨 비극을 밀도 있게 추적해가는 가운데 휴머니즘적인 시선으로 죄와 벌에 대해 묻는 소설로, 인간이라는 미스터리를 푸는 데 천착해온 히가시노 추리 문학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 옮긴이 양윤옥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으로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별이 총총』,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대 눈동자에 건배』 『위험한 비너스』 <가가 형사 시리즈> <라플라스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 이 책은
전 세계 누적 판매 1300만 부 베스트셀러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작가이자, 현존하는 일본 추리소설계 최고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 『백조와 박쥐』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데뷔 35주년을 맞아 2021년 4월에 발표한 이 소설은 한국어판 기준 총 568쪽, 원고지 2천 매가 넘는 대작으로, 2007년부터 15년 가까이 히가시노의 주요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겨온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양윤옥이 번역을 맡았다.
히가시노는 1985년, 추리 작가들의 등용문이라 불리는 에도가와란포상을 수상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 누구보다 왕성하게 창작을 이어왔다. 다채로운 소재와 주제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발한 트릭과 반전이 빛나는 본격 추리소설부터 이과적 상상력을 가미한 SF, 판타지, 의학 미스터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그야말로 스펙트럼 넓은 세계를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그에게 오늘의 명성을 안겨준 것은 단연 우리 시대의 병폐와 복잡다단한 인간 본성 그리고 범죄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사회파 추리소설’ 계열의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35주년 기념작 『백조와 박쥐』는 히가시노가 이러한 자신의 추리소설 본령으로 돌아가서 더욱 원숙해진 기량으로 써낸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두툼한 분량에도 하루 이틀 만에 독파했다는 현지 독자들의 앞선 리뷰가 증명하듯이, 소설은 33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두 개의 살인 사건과, 이에 얽히는 인물들이 저마다 진실을 좇아가는 장대한 이야기를 탄탄한 틀 안에서 흡인력 있게 풀어낸다. 나아가 공소시효 폐지의 소급 적용 문제, 형사재판 피해자 참여제도, SNS 시대에 더욱 논란이 되는 범죄자와 그 가족에 대한 신상 털기나, 공판 절차의 허점 등 굵직한 사회적 논의들을 아우르면서도 추리소설 본연의 재미를 잃지 않으며 차곡차곡 서사를 쌓아나가 놀라운 결말에 다다르는 데는 거장의 노련함이 물씬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해온 작가가 전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슴 뭉클한 드라마가 녹아 있다.
■ 도서 줄거리 소개
1984년, 용의자의 죽음으로 종결됐던 살인 사건이
2017년, 한 남자의 자백으로 뿌리부터 뒤흔들린다
30여 년에 걸친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히가시노 게이고판 『죄와 벌』
도쿄 해안 도로변에 불법 주차된 차 안에서 흉기에 찔린 사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정의로운 국선 변호인으로 명망이 높던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 주위 인물 모두가 그 변호사에게 원한을 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증언하면서 수사는 난항이 예상되지만, 갑작스럽게 한 남자가 자백하며 사건은 해결된다. 남자는 이어 33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금융업자 살해 사건’의 진범이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며 경찰을 충격에 빠뜨린다.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그 사건 당시 체포되었던 용의자는 결백을 증명하고자 오래전 유치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였다.
+ “전부 내가 했습니다, 그 모든 사건의 범인은 나예요.”
서막, 한 남자의 자백과 함께 본격적으로 점화되는 미스터리
총 49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서막은 범인이 자백하면서 마무리되는 살인 사건 수사 이야기로 장식된다. 2017년 가을, 불법 주차로 신고된 차량 안에서 타살체로 발견된 변호사 사건을 조사하는 경시청 수사 1과 고다이 형사는 착실하게 발로 뛴 수사 끝에 피해자와 희미한 연결 고리를 가진, 아이치현에 사는 66세 남성 구라키 다쓰로의 존재에 도달한다. 이어지는 조사에서 33년 전 발생했던 금융업자 살해 사건이 다시금 떠오르고, 이 사건과 구라키의 접점을 찾아내면서 마침내 그가 자백에 이르는 과정이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얼마 후 피고 구라키가 밝힌 살해 이유가 세상에 공개되자 여론이 들썩인다. 그는 33년 전 용의자가 유치장에서 자살하면서 종결된 금융업자 살해 사건의 진범이 자신이며, 이를 알게 된 변호사와 갈등이 빚어지면서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의 살인범이 또 사람을 죽였다는 점과, 과거 경찰의 오인 체포 문제 등이 지적되는 가운데, 평소 자극적인 언행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던 시사평론가는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을 면한 사람에게 과거의 범죄를 두고 몰아붙인 피해자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는 논평을 내기도 한다.
+ “나도 그쪽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본막, 진실을 위해 공조하게 된 대척점에 선 사람들
한편, 사회가 이 살인범에게 어디까지 죄를 물을 수 있느냐며 요동치는 상황에서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는 그 여파에 휘말린다. 가즈마는 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인터넷에 신상이 공개되는 등 평온했던 일상이 무너지고, 마찬가지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미레이는 피해자 유족인데도 수사 진행 상황을 뒤늦게야 전해 듣는 데 분노해 범죄 피해자나 유족이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피해자 참여제도를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이라는 대척점에 선 두 사람이지만, 사건의 개요를 파악할수록 이들은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어쩌면 가족이기에 알 수 있는 근거들을 내밀며 두 사람이 각각 검사와 변호인에게 진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도, “피고인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면서 검사는 최고형으로 기소를 준비하고 변호인은 양형의 경감만을 목표로 삼을 뿐이다. 결국 ‘백조와 박쥐’처럼 서로 다른 곳에 속한 이들은 ‘납득할 수 있는 진실’을 찾아 공조하기에 이르고, 과거와 현재 사건의 의문점들을 하나씩 발견하면서 소설은 본막을 올린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 전체에 걸쳐서 현대사회의 불관용과 인터넷상의 악의 문제를 드러내 보이고, 제삼자를 거쳐 듣는 사실들이 과연 진실인지, 죄와 벌을 판가름하고 죗값을 치르는 방식은 누가 정할 수 있는지 숙고하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는 것은 이제 이 책을 읽어나갈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