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과 가죽의 시詩』는 2009년 『위저드베이커리』로 등단한 후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단 하나의 문장』, 장편소설 『네 이웃의 식탁』 『파과』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을 발표하며,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평가받는 구병모의 최신작이다. 일반적 사고의 통념에 의문을 던지고 한 차원 비틀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작가의 이번 작품은 구두처럼 닳아 없어지는 ‘인간’의 삶을 재료로 ‘존재’의 영원한 삶을 한 편의 시처럼 풀어낸 소설이다.
구두를 만들며 함께 살던 요정들은 흐르는 세월 속에 뿔뿔이 흩어져 인간의 육신을 입고 살고 있다. 인간 세상에서 여전히 구두 장인으로 영원의 삶을 살고 있는 안 앞에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형제 미아가 나타난다. 미아는 자신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며, 자신의 반려 유진을 위한 구두를 만들어줄 것을 그에게 부탁한다. 때가 되면 모습과 거처를 바꾸며 여전히 정령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과 달리 유한한 존재인 유진과 사랑에 빠진 미아를 보며 안은 상념에 빠지지만,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미아의 말에 알 수 없는 질투와 허망함을 느낀다.
안에게도 오래전 마음을 나누었던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삶을 꾸려나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아프게 돌아서야만 했었던 안.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백발의 여인이 된 그녀와 조우한 안은 비로소 자신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조금은 깨닫게 된다.
“점유할 수도 당겨 쓸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인간과 인연을 맺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그럼에도 그 무의미를 선택한 미아에게 자신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남아 있는 날들의 목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109p)
안은 형제들과 함께 ‘우리’로 충만했던 상상계로 돌아가는 불가능한 소망을 비는 대신, 소멸하는 존재들에게 한 발짝 다가가기로 마음먹는다. 대체로 타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결국 이 이야기는 소멸이 전제된 평범한 인간의 삶과 사랑이 본래적으로 지닌 비대칭성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구 정령 현 인간’의 성장 서사, 바로 ‘인간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옷과 이름을 지닌 채 상징계에서 살아간다. 그 상징계의 틈으로 포착되는 실재가 얼마나 그로테스크한지에 대해 정신분석학은 늘 경고해왔다. 그러나 안과 미아가 통과해온 곳, 그리고 여전히 드물게 목격하는 곳은 구병모의 전작들이 보여주던 실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물론, 굳이 안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대체로 조급하고 야만적이다. 동시에 그럼에도 찰나의 순간 어떤 빛나는 것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이 소멸이 지나가는 짧은 자리에 흔적처럼 남게 되는 시적인 것도 다행히 인간의 것이라면, 우리는 “가뭇없이 사라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불이 밝혀진 몸으로 심지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허공에 자신의 움직임을 그려 넣고자 하는 인간의 열의”가 우리 삶의 전부임을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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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shoe last는 구두 골 또는 화형靴型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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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리는 cobbler plier 또는 lasting pincer라고 하는데 일반 직선형 펜치가 아니라 가죽을 잡고 구부리기 쉽도록 집게의 모양이 새의 부리처럼 휘어진 물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왜 고소리라고 불리는지 어원을 알아내지 못했고, 발음으로 보건대 일본어에서 변형된 게 아닐까 나름대로 추측만 한다.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소리そり’는 칼과 같은 연장이 휘어진 모양이나 상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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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선인장, 버섯 균사체, 파인애플 잎사귀, 포도 찌꺼기 등을 이용한 친환경 가죽이 생산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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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로 다만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나마 전해졌다면 그것은 최정우 님의 해설과 편집부의 노고에 빚지고 있다.
2021 봄
표4
잇기緣와 입기肉의 소설
문학의 무한성과 영속성
왜 소설은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했던가, 어째서 소설은 시를 그 자신의 제목으로 삼아야 했던가.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질문이다. ‘시’의 이름을 단 이 ‘소설’은, 아주 오래되고 유명한 하나의 설화가 끝났던 시점에서, 곧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의 힘겨운 일을, 마치 콩쥐의 두꺼비나 우렁각시가 그랬던 것처럼, 밤새 남몰래 도와주던 요정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던 그때로부터, 그러니까 그들이 더 이상 나타날 필요가 없었던 그 순간을 통과해, 다시 말해 그때와 그 순간이 무한과도 같은 시간을 수많은 유한으로 수놓았던 그 모든 사연과 역사를 넘어서,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그러므로/그러나 이를 두고 과연 ‘시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탄생과 죽음 그 자체가 없는 존재에게 어떤 시작이란, 그리고 그러한 시작이 바로 그 시작부터 당연히 전제할 수밖에 없는 어떤 끝이란, 과연 무엇이며 또한 무엇일 수 있을까.
-최정우,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 탄생과 계약과 응징과 구원을 말하는 수많은 옛이야기의 패턴 가운데, 어느 인디언 부족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세상 창조를 마친 뒤 신은 사랑하는 인간들의 몸속에 ‘영원한 빛’이라는 걸 선물로 심어주었는데, 이후 인간들은 교만과 불순종으로 인해 세계인들에게 널리 익숙한 홍수 신화와 같은 루트를 타고 ‘영원한 빛’을 영원히 박탈당함으로써 그것이 죽음의 기원이 되었다는.
그 심판의 유래는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것일 뿐 안과 같은 존재들의 몫은 아니다.
-30~31쪽
* “그래도 일단 갖고는 있으려고요. 생각해보면, 이제 아이가 없다고 해서 하던 작업을 중단한다는 게,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누구도 신지 않을 것,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더는 쓸데없어진 것이라는 이유로, 아름답게 완성시키면 안 되나?”
-141쪽
* 안은 미아 앞에 올려둔 상자 뚜껑을 연다. 곧 얼굴을 수그려 갑피에 입술이라도 댈 것만 같은 미아의 복합적인 표정은, 형제들이 어떤 이유나 당위나 보상을 생각지 않고 지은 것으론 마지막이라고 볼 수 있는,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가 잠든 곁 작업대 위의 구두를 떠올리는 듯하다. 유진과 같은 보통의 사람이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영역에 새겨진 감정이, 유한과 무한의 사이 그 어디엔가 자리한 존재의 오랜 허무가, 한 켤레의 구두에 담겨 있다.
-144쪽
* 안은 웬만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미아, 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언젠가 네가 혼자가 되더라도 사실은 처음부터 그 결정을 존중한다고. 우리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만을 머물렀다가 부서지고 사라질 세상의 모든 것을 붙들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뻗고야 마는 손을, 변함없이 바늘을 쥐는 손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170쪽
* 유진의 손짓이 머무는 곳에, 발끝이 닿은 자리에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는 작은 존재들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로 보이지 않는 걸까. 하나, 둘, 셋……. 마지막으로 목격한 지 오래되어 확신할 수 없으나 분명 인간의 지식으로 판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음악에 몸을 맡기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무대를 서성이고 있다. 그 존재들은 처음에는 어떤 회의도 불신도 반감도 갖지 않은 빛으로만 감지되었다가 파장의 움직임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소리와 냄새로도 느껴지고, 어느 때는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이었다가 타오르는 횃불이었다가 녹아내리는 눈송이였다가 하면서 속성을 자유로이 바꾸더니 다음 순간 리듬과 박자를 갖춘 음악이었다가 마침내는 영원히 낭독이 불가능한 언어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처럼 보인다.
-169-170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서른네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1980년대생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되었다.
세대별로 진행되던 핀 소설은 025~030에 들어서서는 장르소설이라는 특징 아래 묶여 출간되었고, 031~036은 절정의 문학을 꽃피우고 있는 1970년대 중후반 출생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근간
036 윤고은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박민준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박민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동 대학원 회화과 졸업, 동경예술대학교 대학원 재료기법학과 연구생 과정 수료. 서울시립미술관, 갤러리현대 등 국내외 다수의 기관 및 장소에서 전시. 『라포르 서커스』를 집필한 소설가로서도 활동 중. 자신이 상상해낸 새로운 이야기에 신화적 이미지 혹은 역사적 일화를 얹음으로써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은’ 독창적인 화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