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무토, 깜짝 놀랄 정도로 실망스러운 정보를 입수했는데.”
“인사이동으로 또 진나이 씨하고 같이 근무하게 됐을 때도 깜짝 실망했는데, 그보다 더한 상황인가요?”
새로 발령받은 곳에서 진나이 씨와 마주했을 때는 놀랐지만, 그보다 자유분방하고 형식에 얽매이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진나이 씨가 주임 시험을 봐서 직함을 달았다는 사실이 청천벽력이었다. 막 나가는 문제아 콘셉트를 내세우던 아티스트가 하루아침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다니는 모습을 목격한 듯한 느낌이랄까.
_7쪽
차도에 눌어붙은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레코드 홈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선에 바늘을 올려놓으면 사고 당시의 소리나 피해자의 끔찍한 비명이, 인생을 앗아 가는 잔혹한 소리가 재생될 것 같았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는 가드레일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일부는 이 빠진 것처럼 철거되고 있었다. 차량과 충돌해 파손된 것이리라. 그 옆에 있던 피해자의 생명을 앗아 가고, 가해자의 인생을 단숨에 망가뜨린 괴물이 풍경을 도려낸 흔적이었다.
_49쪽
“가해 소년. 진나이 씨가 담당했던 소년이죠?”
“그랬지.”
“기억 안 나요?”
“아니, 기억나.” 제아무리 진나이 씨라도 이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 일이란 게 끊임없이 힘든 아이들이 찾아오잖아. 진나이 씨, 도와주세요. 진나이 님, 진나이 신이시여 구원하소서, 하고. 그러니까 뭐, 계속 한 아이만 생각할 수는 없지. 안 그래?”
“그건 그렇죠.” 우리는 카운슬러가 아니며, 신원인수인도, 부모도 아니다. 소년사건을 조사하고 보고할 뿐이다. ‘뿐’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온갖 고난을 극복해야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년의 인생’ 전부를 돌보는 게 아니다. 이 소년은 어떻게 될까, 그 장래를 생각하는 경우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로 대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면피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일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_115쪽
“무토 씨는 솔직히 어떻게 생각하세요?”
낯빛이 바뀌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와카바야시는 꽤 취기가 오른 것 같았다. 내부에 숨은 지휘자가 지휘봉을 흔드는 손길이 이상해졌는지, 말의 리듬과 억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뭐가?”
“일하다 보면 다양한 범죄자를 만나잖아요.”
“범죄자라기보다는 사건을 일으킨 소년이지.”
“그렇죠. 그런 녀석들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 안 해요? 남에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 간 놈들을, 반성한다는 이유로 용서해도 되는 겁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들한테 몹쓸 짓을 한 녀석들은 더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진 않으세요? 차로 사람을 친 놈은 똑같이 치여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인간이 정말 갱생될 수 있을까요? 내가 피해자였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_261쪽
복부에 통증과 함께 살을 도려내듯 열기가 확 오르는 느낌이 들며 소름이 돋았다. 그 직후에 격렬한 고통이 몰려왔다. 온몸의 피부를 잘게 베어 내는 듯한 날카로운 아픔이었다. 칼날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옆구리를 누르며 손을 보았다. 끈적거리는 검붉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손을 들었다. 주변은 어두웠지만, 엔진이 꺼진 차의 전조등과 실내등 불빛 덕에 그것이 빨간 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_278~279쪽
■ 지은이_ 이사카 고타로伊坂幸太?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반향을 일으키고 이름 앞에 항상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작가. 한국을 비롯해 미국, 프랑스, 중국, 대만 등 1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으며, 국경을 넘어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에게 선물받은 책에서 ‘짧은 인생을 상상력에 내던질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는 문장을 보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본 추리소설계의 전설 니시무라 교타로西村京太?의 이름과 같은 획수의 한자를 조합한 필명 이사카 고타로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닮으라는 바람을 담아 가족들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2000년 『오듀본의 기도』로 신초미스터리클럽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02년 『러시 라이프』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3년 추리소설 독자를 넘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중력 삐에로』를 시작으로 2004년 『칠드런』 『그래스호퍼』, 2005년 『사신 치바』, 2006년 『사막』, 2008년 『골든 슬럼버』로 여섯 차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나 ‘집필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한다. 2004년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로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수상한 데 이어, 같은 해 『사신 치바』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에서 수상했고, 2008년 『골든 슬럼버』로 야마모토슈고로상과 서점대상뿐만 아니라 200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올라 3관왕을 달성했다. 서점대상 제1회부터 제6회까지 매회 최고작 10위권에 선정된 유일한 작가로, 2016년에는 12년 만에 『칠드런』의 후속작 『서브머린』을 발표했으며, 2017년에는 『화이트 래빗』과 『AX』, 2018년에는 『후가와 유가』, 2019년에는 『시소 몬스터』와 『고래 머리의 왕』을 출간하는 등 변함없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기상천외하고 독창적인 세계관을 중층적이고 정교한 구성력과 경쾌한 필치로 풀어내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며, 최근 영화로 제작된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비롯해 12개 작품이 영화화되는 등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영화나 연극, 만화, 드라마 같은 다른 분야로도 확장되어 독자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 옮긴이_ 최고은
대학에서 일본사와 정치를 전공했고 현재 도쿄대학교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일본 문학을 연구하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이사카 고타로의 『칠드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비롯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옛날에 내가 죽은 집』, 미치오 슈스케의 『스켈리튼 키』,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그림자밟기』,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 모리무라 세이치의 ‘증명’ 시리즈 등이 있다.
이사카 월드의 팬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려 온,
『칠드런』 이후 12년 만의 속편
“사실 『칠드런』의 후속편을 쓸 계획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어나는 소년사건을 접하고 ‘진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제 안에서 뭔가가 솟구쳤어요. 『칠드런』을 재밌게 읽어 준 독자들을 위해 진나이와 무토의 새로운 활약상을 쓰자, 이번에는 장편을 써 보자, 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_ 작가 인터뷰에서
‘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제왕’ 이사카 고타로의 2016년 작 『서브머린』이 최고은의 번역으로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가솔린 생활』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을 엄선해 꾸준히 선보여 온 ‘현대문학 이사카 월드’의 열 번째 작품으로, 이사카 고타로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대표작 『칠드런』(2004)의 속편이다.
이사카 고타로는 기존의 결과물에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과 독자에게 늘 신선한 설렘을 주고 싶어서, 속편이나 시리즈물을 쓰기보다는 매번 새로운 인물과 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럼에도 12년 만에 예외적으로 『서브머린』을 출간한 데에는 『칠드런』의 주인공 진나이의 부활을 간절히 바라는 독자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이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향한 작가 자신의 각별한 애정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터무니없는 말로 상대를 얼떨떨하게 하는 괴짜에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수식어가 딱 들어맞는 자기중심적 인물이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 진나이. 10년 넘게 이사카 월드의 인기 캐릭터 1, 2위 자리를 지켜 온 그가 셜록과 왓슨 못지않은 환상의 콤비를 자랑했던 후배 무토와 재결합해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개성 있는 인물과 통통 튀는 문장, 일상을 특별하게 바꾸는 유쾌한 발상으로 산뜻한 감동을 선사했던 『칠드런』에 이어, 『서브머린』 또한 ‘소년범죄’라는 가장 현실적인 소재 위에 기발한 설정과 해학, 사회에 대한 냉정한 성찰, 12년이란 공백만큼 더욱 진해진 감동이 공존하는, 이사카 고타로만이 쓸 수 있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보여 준다.
엉뚱한 듯 진지한 가정법원 조사관들과
‘문제 많은’ 소년들이 펼치는
죄와 벌, 용서에 관한 가슴 따뜻한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 일도 너무 세세한 데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사건을 일으킨 녀석들은 모두 엄벌에 처하면 돼. 그렇지?”
와카바야시가 고개를 떨궜다.
“우리가 뭘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귀찮아.”
“네.”
“하지만 이게 그럴 수도 없단 말이지.” 진나이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 죽겠지만, 모든 사안을 기계적으로 엄벌에 처할 수도 없어. 왜 그런지 알아?”
“왜 그런데요?”
그러자 진나이 씨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 같은 녀석들도 있으니까.”
_ 본문 325쪽
전작 『칠드런』이 진나이라는 개성 강한 캐릭터를 연결 고리 삼아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을 연작소설 형태로 가볍게 그렸다면, 장편인『서브머린』은 하나의 주제를 보다 깊이 파고든다. 이 작품은 인사이동으로 뜻하지 않게 다시 한 팀이 된 가정법원 조사관 진나이와 무토를 중심으로 날로 심각해지는 소년범죄와,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소년법의 실태,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건 이후 삶’을 다룬다.
하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단지 사회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고 괴로워하는 청년을 향해 무신경한 말을 툭툭 내뱉다가도, 너 같은 녀석이 있어서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거라고 뜻밖의 위로를 건네는 진나이. 그는 인간 사회에 흘러넘치는 온갖 형태의 부조리와 악을 시니컬하게 그리면서도 인간을 향한 끈질긴 관심과 애정만큼은 결코 놓지 않고,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룰 때조차 ‘엔터테인먼트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사카 고타로적’ 세계관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사카 고타로는 ‘진나이’라는 양면적인 캐릭터를 영리하게 활용해, 자칫 가해자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거나 반대로 너무 무겁게 흘러가 버리기 쉬운 주제를,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만, 이사카식 해학은 잃지 않는 작품’으로 멋지게 승화시켰다. 이 책은 ‘진나이’라는 인물의 부활을 기다려 온 독자들은 물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너무 쉽게 버리고 마는 현 사회의 모든 이들이 읽어야 할 작품이다.
■ 줄거리
가정법원 소년사건 담당 조사관 진나이와 무토는 무면허 난폭 운전으로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다나오카 유마라는 소년을 담당하게 된다. 다나오카는 어린 시절 양친을 교통사고로 여의고 친척 손에 자란 데다, 10년 전 다른 소년이 일으킨 차 사고로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어쩌다 무면허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되었을까? 진나이와 무토는 난폭 운전을 한 이유를 캐묻지만 다나오카는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결국 두 사람은 사건의 경위를 알아내기 위해 다나오카의 주변인과 10년 전 사고에 관련된 인물들을 찾아 탐문에 나선다. 무면허 운전으로 무고한 생명을 앗아 간 소년, 그 소년의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또 다른 소년…… 복잡하게 얽힌 사건을 쫓아 진실의 퍼즐을 맞춰 가는 두 조사관과 비밀스러운 사연을 간직한 소년들이 만나 죄와 벌, 그리고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