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과도 다르고 노랫소리와도 다른,
아련하면서도 단단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밑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비로소 당도했다는 안도감과
더 먼 곳으로 떠나려는 끝없음, 양쪽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
고요하고 따듯하고 아름답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의 작가
오가와 요코가 들려주는 바닷바람과도 같은 일곱 편의 이야기
일본의 대표적 여성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집 『바다』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를 통해 따뜻한 감동을 선사했던 오가와 요코의 단편소설들을 엮어냈다.
연인의 집을 방문한 청년이 조우한, 바다로부터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소리가 나는 명린금(鳴鱗琴)을 연주한다는 그녀의 남동생 이야기를 그린 표제작 「바다」를 비롯해, 죽어가는 옛 연인을 만나러 오스트리아에 온 60대 여인과의 며칠간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를 배경으로 활자 관리인과의 기이한 소통을 묘사한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 말을 잃은 소녀와 고독한 호텔 도어맨의 교류를 그린 「병아리 트럭」, 추억에 제목을 붙인다는 노인과 관광 가이드 소년의 특별한 우정 이야기 「가이드」 등 작가 특유의 정취와 더없이 섬세한 문체로 묘파한 일곱 편의 단편을 실었다.
특히 이 소설집에는 작가 인터뷰와 작품 해설을 함께 수록해 오가와 요코 소설의 오랜 독자들에게 뜻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
원시의 바다에 안긴 듯 고요하고 따듯한, 그러나 조금은 기묘한 일곱 빛깔 이야기
오가와 요코 단편소설의 정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통해 수십만 독자의 사랑을 받았고,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는 무한한 체스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마음과 마음의 소통을 그리며 오직 그녀만이 쓸 수 있는 “소설다운 소설”에 대한 무한 신뢰를 주었던 오가와 요코가 이번에 들고 온 이야기는 일곱 빛깔 단편소설들이다.
오가와 요코는 장편소설을 “긴 망상에 빠지는 것”이고 단편소설은 “짧은 망상에 빠지는 것”으로 비유한다. 장편이건 단편이건 착상이나 쓰는 방식에 차이는 없다고 한 것과 같이 이번 소설들은 그녀만이 살려낼 수 있는 고요하고 따뜻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고스란히 농축해놓은 최고의 장이다.
신비한 감각의 재현, 풍부한 이미지의 향연,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삶의 미세한 기미를 포착하는 그녀의 눈을 통해 모든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순간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또 미약한 자들의 소통을 보여줌으로써 우정, 신뢰, 사랑이라는 덕목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특히 그 속에서 얼핏 드러나는 관능적이기까지 한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작품에 또 다른 매력을 부여한다.
오가와 요코는 일본에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아쿠타가와 상 수상 작가인 가와카미 히로미는 그녀를 “추종한다”고 단언한다. 그녀가 발표하는 작품마다 미디어를 비롯해 많은 독자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한다. 『바다』는 이러한 작가적 역량이 더없이 훌륭히 발현된 소설집이다. 어른을 위한 정감 어린 그림책과도 같은 『바다』를 통해 그녀의 오랜 팬뿐만 아니라, 오가와 요코 월드에 입문하는 새로운 독자까지 심원한 그녀만의 바닷속 세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 수록 작품 소개
「바다」
결혼 인사차 연인의 본가를 방문한 청년. 그녀의 가족과의 어색한 저녁식사 자리에는 그녀의 ‘꼬마 동생’이 있다. 청년보다도 머리 하나는 크고, 체중도 1.5배는 나갈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청년은 서먹서먹한 가운데 남동생의 방에서 함께 자게 된다. 기린무늬 잠옷을 입고 서랍에서 꺼낸 미지근한 사이다를 마시며 자기 전에 꼭 동물 방송 비디오를 본다는, 그리고 자기는 ‘명린금’이라는 신기한 악기의 연주자라고 말하는 남동생. 남동생은 자기가 세상에서 유일한 명린금 연주자라고 말하는데, ‘나’는 진심으로 그가 연주하는 명린금 소리를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서 실현한, 빈으로 가는 단신 여행. 투어 참가자 가운데 단신 참가는 ‘나’와 고토코 씨 두 사람뿐. 때문에 고토코 씨와 같은 방을 쓰게 된 나는 옛 연인을 만나러 간다는 고토코 씨의 시중을 들며 양로원에 가게 된다. 빈의 거리 풍경이나 자연 풍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한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야기.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
의학부 대학원생의 논문 타이프를 하청받는 사무소에 들어간 신입 타이피스트는, 어느 날 ‘미란(?爛, 썩어 문드러짐)’의 ‘미’라는 활자가 빠지자 새로운 것과 교환하기 위해 3층 창고에서 근무하는 활자 관리인에게 향한다. 활자 관리인과 그 글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손끝과 목소리, 셔츠 색밖에 알지 못하는 그에게 관심을 높여간다는 이야기. 활자 관리인과 나누는 대화, 활자에서 연상되는 음란한 분위기,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의 독특한 분위기 모두가 오가와 월드라고 할 수 있는 작품.
「은색 코바늘」
할머니 기일 법요에 참가하러 가는 길, 기차 안 맞은편에 앉은 뜨개질을 하고 있는 노부인을 보고 떠올리는 ‘나’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
「깡통 사탕」
40년간 버스만을 운전해온 남자. 지금은 ‘버스 아저씨’로 불리며 유치원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 남자는 아이가 있었던 적이 없어서, 아이들이 울 때가 가장 난처하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남자는 포켓에 깡통 사탕을 준비해두고 있다.
「병아리 트럭」
40년 가깝게 호텔 도어맨으로 근무한, 정년 직전의 남자. 그의 새로운 하숙집은 1층에 미망인 주인과 손녀가 사는 단독주택의 2층. 엄마가 죽고 난 뒤 말을 하지 않는 그 소녀와 함께 본 병아리를 실은 트럭. 소녀가 준 매미 허물로부터 교류는 시작되고, 말을 나누지 않은 채 점차 마음을 주고받게 된 두 사람. 고독한 남자와 목소리를 잃은 소녀, 두 사람의 재생을 훌륭하게 그려낸 작품.
「가이드」
관광 가이드인 엄마의 투어에 따라가게 된 ‘나’. 그 투어에서 만난 초로의 신사. 그는 옛 시인이었던 경험을 살린 ‘제목 상점 주인(제목 지어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마지못해 동승하게 된 투어에서의 멋진 하루. 이 하루 동안 ‘나’는 상당히 성장하고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 본문 중에서
“무슨 악기를 연주하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불이 꺼진 뒤 나는 물었다.
“명린금이에요.”
꼬마 동생은 대답했다.
“명, 린, 금?”
“네, 이렇게 써요.”
그는 허공에 손을 뻗어 검지로 뭐라 글자를 썼으나, 어두워서 읽을 수 없었다.
“흔한 악기가 아닌가봐.”
“네, 아마도.”
“어느 나라 악기인데?”
“음, 일본이에요. 여기요.”
“옛날부터 있던 거야?”
“아뇨,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고요.”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늘게 들렸다.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얼굴만 이쪽으로 돌린 게 어슴푸레 보였다.
“어떻게 생겼지?”
“럭비공보다 좀 더 큰 게 두 팔로 안기에 딱 좋은 크기죠. 혹등고래의 부레로 만들어요.”
“저런.”
“부레 표면에 물고기 비늘을 빽빽하게 붙이고, 속엔 날치 가슴지느러미로 만든 현을 넣었거든요. 그게 진동원이 돼서 공기의 떨림을 비늘에 전달하는 거예요.”
“비늘 종류는 정해져 있고?”
“가급적 물고기 종류를 다양하게 쓰는 편이 깊이 있는 소리가 나오겠죠.”
명린금은 鳴鱗琴이라 쓴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진기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인데.”
“아마 그럴 거예요. 명린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세상에 저밖에 없으니까요.”
꼬마 동생은 말했다.
“제가 발명한 악기거든요. 제가 발명자고, 유일한 연주자예요.”
어둠에 눈이 익은 탓에 그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느껴졌다. 커튼 틈새로 흘러든 달빛이 가느다란 띠가 되어 우리 둘 사이에 드리웠다. 옆방의 이즈미 씨 기척은 이미 완전히 조용해진 뒤였다.
“언제, 어떤 때 연주하지?”
“정해져 있진 않아요. 하지만 연주하는 장소는 꼭 해변이죠. 바다에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나거든요. 그게 그렇잖아요? 바다 생물로만 만든 악기니까요.”
- 「바다」 24~27쪽
“아무튼 먼 곳에 비록 한순간이라도 날 기억해준 사람이 있다니 기쁜 일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잠 못 이루는 밤도 안심이에요. 그 먼 곳을 떠올리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어요.”
-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 46쪽
그들이 노쇠한 팔로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데, 내 마음에도 조금씩 슬픔이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말 한 마디 주고받아본 적 없고 나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의 죽음일지라도, 그 죽음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떠맡아야 하는 종류의 아픔이 있는 듯했다. 그것은 차가운 샘물처럼 내 몸을 적셨다.
-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 49~50쪽
“아주 조용한 활자랍니다.”
그의 목소리에 젖빛 유리가 조그맣게 흐려지는데, 눈으로 그 모양을 좇을 겨를도 없이 사라집니다. “조용한가요?”
저는 물었습니다.
“그래요. 말없이, 조용하게, 자기한테 주어진 장소를 지키면서 결코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흡사 고둥 속에 숨은 심해 생물 같습니다.”
저는 심해를 생각했습니다. 가본 적도 없건만, 모래의 까끌까끌한 감촉과 흔들거리는 물결,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어둠의 느낌이 떠올랐습니다. 그곳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고막에 들러붙는 것 같습니다.
膣은 바다 밑에 묻혀 있습니다. 입구는 겹겹이 진 주름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에 그런 관이 묻혀 있다는 기미조차 없는데, 그는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언제나 창고에 혼자 계시나요?”
저는 여기에 그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었습니다. 되도록 오래 그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활자를 다루시는데요?”
“저만의 방법으로 찬찬히 활자를 만지는 게 제 일입니다.”
-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76~77쪽
그 풍경 가운데 소녀가 있었다.
“그리 가면 안 돼. 그러다 차가 오면 치일 거야. 그래, 다들 이 나무 그늘로 모이렴. 겁내지 않아도 돼. 괜찮아, 금방 누가 구해주러 올거야. 걱정할 거 없어.”
소녀는 그들을 인도하고, 기운을 북돋워주고, 공포에 질려 꼼짝 못 하는 병아리를 품에 안아주었다. 색색의 깃털이 날아올라 소녀를 감쌌다.
남자는 이것이 그녀가 주는 진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녀가 들려준 목소리. 그것이 바로 자기에게만 주어진,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 「병아리 트럭」115~116쪽
“먼 옛날 있었던 잊지 못할 일, 애달픈 추억, 아무도 모르는 중대한 비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체험 등등 뭐든 다 된다만, 손님들이 가져오는 기억에 제목을 붙이는 것, 그게 내 일이란다.”
“제목을 붙이는 것뿐이에요? 그냥 그것뿐이라고요?”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냐? 하지만 내 감히 말하건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우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게 나한테 얼마나 시시한 이야기건 간에 전부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끈기와 넓은 마음이 필요하단 말이지. 나아가 그걸 상세하게 분석하고 의뢰자와 기억을 가장 친밀하게 엮어줄 제목을 이끌어 내는 거야.”
“왜 제목이 필요한데요?”
“아주 적절한 의문이구나.”
남자는 자못 감탄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란히 아카시아 줄기에 기대섰다.
“제목이 안 붙은 기억은 잊어버리기 쉽거든. 반대로, 적절한 제목이 붙어 있으면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그걸 남겨놓을 수 있어. 보관해놓을 장소를 마음속에 확보할 수 있는 거란다. 평생 두 번 다시 떠올릴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기억일망정, 거기 서랍이 있고 라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다들 안심하는 거야.”
- 「가이드」143~144쪽
나는 찬찬히 생각한 다음 말을 이었다.
“오늘 제 하루에 제목을 붙여주세요.”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밤의 어둠이 바로 저기까지 다가와 있는 하늘의 한 점을 응시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는 지팡이로 땅바닥을 한 번 내리쳤다. 그게 신호였다. 키 큰 몸을 굽혀 내 귓가에 얼굴을 가져와서는 고막으로 직접 전달되는 목소리로 말했다.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제목임을 바로 알았다. 오늘 하루를 기억에 아로새기기 위한 내 제목임을.
- 「가이드」157~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