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가브리엘 루아 Gabrielle Roy 1909년 3월 22일 캐나다 마니토바주의 생-보니파스에서 태어났다.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1929년 위니펙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연극배우로서의 활동을 병행하며 8년 동안 교사생활을 한다. 1939년 몬트리올에 정착해 기자로 일하다가 1945년 『싸구려 행복』을 발표해 캐나다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페미나상을 수상하며 일약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한다. 1954년 긴 침묵과 고통스러운 집필 과정을 거쳐 『데샹보 거리』를 발표하고 이 작품으로 첫 번째 캐나다 총독상을 받는다. 1977년 교사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여섯 편의 중?단편을 묶은 『내 생애의 아이들』로 또 한 차례 캐나다 총독상을 수상하며, 비평계의 찬사와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는다. 일생 동안 같은 산을 그리는 독학의 화가 이야기인 『비밀의 산』 외에 『알타몽의 길』『휴식 없는 강』『즐거운 여름』『내 생애의 아이들』『지상의 여린 빛』『무엇 때문에 고민하나, 에블린』 등의 작품이 있다. 1983년 7월 13일 74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사후에 미완의 자서전 『비탄과 환희』가 발표되었다. ■ 옮긴이 김화영 고려대학교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문학 상상력의 연구』『행복의 충격』『바람을 담는 집』『소설의 꽃과 뿌리』『시간의 파도로 지은 집』 등 10여 권의 저서 외에 미셸 투르니에, 파트릭 모디아노, 장 그르니에, 로제 그르니에, 레몽 장,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등 프랑스 주요 작가들을 한국에 처음 소개하였고, 『알베르 카뮈 전집』(전15권) 『섬』『뒷모습』『외면일기』 등 70여 권의 역서를 내놓았다.
■ 이 책은 ‘캐나다 문학의 큰 부인'이라 불리며, 세 번의 캐나다 총독상 수상, 캐나다 작가 최초의 페미나상 수상 등의 화려한 수상 경력에 어울리는 문학적 깊이와 감동을 겸비한 가브리엘 루아의 작품들은 캐나다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영미문학권, 유럽문학권, 제3세계 문학권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가브리엘 루아의 대표작 『내 생애의 아이들』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데 이어, 간결하고 고즈넉한 문체의 만년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세상 끝의 정원』이 김화영 교수의 깊이 있는 번역으로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집은 캐나다 서부 내륙, 즉 매니토바, 서스캐처원, 앨버타 등 3개 주에 펼쳐져 있는 광대한 평원지역에 이주하여 정착한 소수민족들을 주제로 한 네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작품은 「삼리웡, 그대는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한 인간의 고독과 소통의 부재 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설은 또 다른 이민들인 삼리웡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캐나다 이민의 작은 역사를 보여준다. 20세기 초 캐나다 이민법에 의해 희망을 갖고 본국을 떠난 중국인 삼리웡은 야트막한 야산 줄기가 뻗어 있는 지형에 매료되어 서스캐처원 주의 ‘호라이즌(지평선)' 마을에 정착한다. 그는 곧 예전에 밀 저장소였던 곳을 빌려 작은 식당을 연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행을 이고 사는 피레네 지방에 온 늙은 스무야, 아내가 집을 나간 후 에그 프라이만 먹고 사는 짐 파렐, 아이슬란드에서 와서 지평선 마을의 구역장이 된 피트 핀린슨, 그리고 옛 퀘벡에서 온 자콥을 만난다. 어느 정도 그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받던 삼리웡은 4년 동안의 가뭄이 아닌 유전의 발견으로 갑작스러운 개발과 함께 변화된 그 마을로부터 축출당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송별연을 준비함으로써, 그는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떠밀리듯 기차에 몸을 실은 삼리웡은 마치 인간의 삶은 다시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듯 호라이즌 마을을 찾아냈을 때처럼 창밖으로 스치는 아주 보잘것없는, 그저 조그만 간이식당 하나 정도에 어울리는 그런 마을을 또다시 찾는다. 그리고 이 세상 어느 곳에 우연히 내려앉은 한 마리 새가 둥지를 틀 듯, 지난번보다는 덜 거창하게 유리창에 비누로 식당 간판을 쓴다. 여기서 작가는 이주 외국인이 겪는 의사소통의 부재나 번영으로부터의 소외를 통해 척박한 삶을 사는 삼리웡이라는 개인이 느끼는 고독의 문제를 제시한다. 두 번째는 「한 나그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이 소설은 한 나그네의 방문을 통해 가족의 확대, 이야기의 허구와 진실의 경계 너머를 보여준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 쪽의 친척이라고 밝히고 그날부터 친척들과 소문으로만 남아 있을 법한 고향 마을의 구석진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들려준다. 낮 동안은 그저 묵묵히 일하는 사람일 뿐인 그가 저녁 화로 가에서 들려주는 아버지가 모르고 있는 아버지의 다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추억 속의 인물들을 되살려내고, 그의 이야기에 옷을 입히게 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돈에 너무 인색했던 마르슬린같이 굴지 말아!” “알베르틴, 당신은 수프를 필로멘느처럼 좀 못 끓여?” 그는 찾아올 때 그랬던 것처럼 떠날 때도 돌연 떠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가 들려준 돌팔이 의사, 살인한 여자, 백 살 먹은 늙은이, 만병통치약을 만든 에프렘 브라방의 이야기는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는 지친 심신을 누이며 횡설수설 늘어놓는다. 그를 위하여 약을 구하러 간 아버지가 방문했던 집마다 그 집안 사람임을 자처하는 사기꾼이었음을 알게 되고 분노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를 신뢰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오히려 그의 거짓 얘기들을 선의로 따뜻하게 받아들이며, 아주 침착한 어조로 말한다. “그래서요?” 그리고 떠나는 그를 향해 소리친다. “잘 가요……. 여행 잘 해요……. 우리 귀스타브 사촌님!” 세 번째는 단편 「우두 골짜기」. 별이 점지해준 길을 따라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는 두코보르 무리. 선발대로 떠난 사람들은 막막한 초원지대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과 맞닥뜨린다. 황홀한 산맥과 골짜기를 따라 흘러가는 강물, 그리고 불타는 지평선. 그곳은 인간들의 불안정한 영혼에 끼치는 기이한 영향력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인디언들이 이름을 붙여놓은 ‘우두 골짜기'다. 선발대를 이끄는 식민 요원 맥퍼슨은 난감해하며 “저기 보이는 것은 산들이 아니고 골짜기에 보이는 것은 강이 아니”라며 그들을 설득한다. 그들은 그들이 본 것들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의 눈에 그것들이 보이니 상관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착할 땅이었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그들 앞에 펼쳐질 고난을 뚫고 나갈 믿음이었을까. 두코보르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본 것을 우리의 여자들, 아이들도 보게 된다면 그들 역시 안심하지 않겠느냐고. 표제작이자 이 작품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편 「세상 끝의 정원」은 가브리엘 루아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자품이다. 어느 날 인간이 개간한 땅의 끝에서 꽃들이 가득한 한 정원을 보고 씌어진 이 작품은 그 정원을 가꾼 노년의 병든 여인, 마르타의 삶을 통해 그녀의 시선에 묻어 있는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을 들여다보고 있다. 앨버타 주 북부 인적 없는 평원에서 남편과 함께 외로이 살고 있는 여주인공 마르타. 그녀는 우크라이나를 떠나 이곳에 정착하여 늙음에 이른 고독한 여인으로 암에 걸려 쓸쓸한 만년을 보낸다. 그녀에게는 이젠 멀리 떠나 영어로 이따금 편지를 보내오는 아이들이 있을 뿐, 그녀와 남편은 끝내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소통수단인 언어에서마저 캐나다 사회에 편입되지 못했다. 마르타는 온갖 고생을 다 하며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왔지만 삶을 깊이 사랑한다. 삶에 대한 이 끈덕진 사랑은 그녀가 죽을 날을 기다리며 애지중지 가꾸어 놓은,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는 꽃들을 통해서 감동적으로 표현된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 때문에 이 머나먼 고장으로 이민을 왔다고 원망하는 삶을 산다. 그는 삶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쓴맛을 본 것이다. 그는 오직 정원 가꾸기에 인생을 걸고 있는 그녀를 질투하고 시기하며, 그럴수록 그의 삶은 피폐해져만 간다. 그것은 그가 아내가 죽고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자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그녀에 대한 쓸쓸한 애정이었던 것, 그러던 그는 어느 순간 아내가 자기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버려져 있던 숲을 다듬는다. 그리고 서리가 내리는 시월 어느 날 아침, 마르타는 문득 밤새 꽃들이 얼어죽지 않도록 남편이 종이 모자로 꽃들을 씌워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녀가 꽃들을 위해 해왔던 수고들을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대신해서 하게 됨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됨을 깨닫는다. 이로써 마르타는 삶의 에너지, 삶에의 사랑과 열정이 자신의 진정한 몫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며 생의 마지막을 고요히 맞이한다. 이 작품은 사랑 받지 못한 한 여인에게 자기 주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주는 위안, 그리고 자연이라는 거대한 휴식처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상 끝의 정원』은 1974년 봄, 작가의 나이 65세에 완성한 만년의 작품집이다. 때문인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오는 너그러운 사랑이 시종 아름답게 이 책의 문장들을 시들지 않고 꽃피게 한다. ■ 본문 중에서 삼리웡은 그의 등 뒤로 따라 나와서 습관대로 먼 산의 윤곽을 시선으로 더듬으며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가뭄을 목격했다. 그 기억들은 그의 가장 흐릿한 기억력만큼이나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올라갔다. 그의 일생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 마음이 통했던 몇몇 순간을 제외하고는 그저 가뭄의 연속이었던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 가뭄에서도 헤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결국 헤어나고 마는 것이었다. 자러 들어가기 전에 그는 문턱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산들이 그 먼지의 바탕 저 위로 불쑥 솟아오르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달이 비치고 바람이 약간 자면 산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아주 잠깐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중에서 그는 끝없이 뻗어간 밀밭을 상기하면서 부드러운 산들의 곡선이 가끔 그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듯이 그 밀밭도 그의 삶과 어느 정도 날줄과 씨줄이 되어 뒤얽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을 받아들여준 이 고장의 광대하고 순수한 이 공간들에 에워싸여 지낸 세월이 어떤 면에서 행복한 것이었음을,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듯 자기도 그 행복을 깨닫지 못한 채 흘려보내버렸음을 비통한 마음으로 의식했다. 어쩌면 그것이 행복이었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 행복을 잃어버려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중에서 그는 찾아올 때 그랬듯이 떠날 때도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그가 떠나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의 모습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음울한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빙긋이 웃음 짓던 그의 정다운 표정마저 흐릿하게 지워진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돌팔이 의사, 살인한 여자, 백 살 먹은 늙은이를 다시 찾아내곤 했다. 그들은 모두가 저 떠돌이 귀스타브의 친구들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통해서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헌 누더기 옷깃을 슬그머니 쳐들어 보이는 그 약간 피곤해 보이는 몸짓이나 때로는 그 인물들을 향하여 던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인물들의 진정한 모습을 되살려주는 것이었다. -「한 나그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중에서 대개의 경우 흐리터분한 색조가 고작인 평원보다 돌연 동방의 풍경에 더 가까워진, 엉뚱하다 싶을 만큼 아름다운 이 골짜기는 이처럼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각의 해가 쏟아붓는 구릿빛 광선의 물결에 실려 그들의 눈앞에서 불타고 있었다. 엉겅퀴와 닿으면 손이 베일 듯 날카롭게 웃자란 풀들 사이에서 무수한 꽃들이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광채를 거기서 받아내고 있었다. 말을 들어보면 그 중 어떤 꽃에도 독이 되는 침이나 분비물이란 없고 상처를 입히는 일도 없이 그 모양이 암홍색 벨벳 양산같이, 짙은 금색의 두상화같이, 핑크빛이나 우유 빛 화관같이 기이하게 화려하고 큼직했으며 잎사귀들은 빛나는 와니스를 바른 듯 추악하게 번들거렸다.-「우두 골짜기」중에서 마르타가 이 고장의 아름다움을 가장 실감나게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이었다. 그녀는 마치 들판을 거슬러오는 한줄기 향기로운 바람처럼 기이하고 돌연하게 밀려들곤 했던 행복의 충동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예상치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더욱 기이하고 돌연하게 느껴졌던 것이리라. 사실 끊임없이 일상의 온갖 일에만 매달리며 살아오는 긴긴 세월 동안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긴장이 풀리는 유일한 때였다. 그녀는 또 너무나도 부드럽고 너무나도 순종하는 한 마리 짐승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저 "꼬리를 저리 치워, 조심해야지" 하고 그 짐승에게 말하기만 하면 그 털이 붉은 작은 암소는 파리 떼가 마구 달려드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기껏해야 그 가엾은 두 귀를 끊임없이 흔들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세상 끝의 정원」중에서 이제 어둠은 짙은 푸른 빛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깊은 푸른 빛을 배경으로 모든 사물들이 실루엣으로 변하여 멀리 있는데도 그 작은 나무는 쉽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고깔처럼 머리 위에 잎새들을 덮어쓰고 아래쪽 낮은 가지들을 두 다리인 양 벌리고 서 있는 그 나무가 그녀의 눈에는 오래전부터 마치 어떤 수도사나 순례자, 어쨌든 아주 먼 곳에서 줄곧 걸어오고 있는 어떤 사람처럼 느껴졌다. 벌써 여러 번, 마르타는 고독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면 오직 먼 곳에서 끝날 줄 모르는 수고를 이기지 못해 등이 굽은 채 언제나 걷고만 있는 이 실루엣을 보고 싶은 생각에 문간으로 나와 서곤 했다. 다른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이런 기이한 동반자를 가지곤 했던 것일까?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동반자를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모습들로 그려보았다. 가령 아주 희귀한 꽃씨를 자루에 담아 지고 다니는 행상인 아니면 그녀의 아이들을 만나고서 그들의 소식을 전해주려고 찾아오는 어떤 사람으로 상상해보는 것이었다.-「세상 끝의 정원」중에서 그녀는 커튼을 열고 손바닥만한 화단에 눈길을 던졌다. 그 안에다가 그녀는 어쩌면 꽃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삶 그 자체를 가꾸어놓았던 것이다. 얼어서 뻣뻣해진 풀들 사이에서 그녀는 아직 하루 정도는 고스란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황금 쑥부쟁이, 보라색 국화, 그리고 몇 송이의 공작초들을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에게 루브카를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적어도 곁에 거느린 자녀들과 매일같이 그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착한 남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들이었다.-「세상 끝의 정원」중에서 「세상 끝의 정원」은 어느 날 지나는 길에 우연히 인간이 개간한 땅의 저 끝에서 꽃들이 만발한 어떤 정원을 보고 쓰게 된 작품이다. 거기서 한 여자가 바람 속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일을 하다가 얼굴을 들고 난처해하면서도 애원하는 듯한 시선으로 지나가는 나를 오래도록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그 시선은 내가 그의 말을 들어줄 때까지 여러 해 동안,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다 침묵의 저 깊숙한 곳에서 바라고 있는 바를 내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해주오, 라고. - 책머리에 중에서 "하늘을, 혹은 강물을, 혹은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나무들의 우듬지를 바라보노라면 나 자신을 위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그 운동 혹은 그 소리를 완벽한 그 어떤 이미지 속에서 포착하려 애쓰지 않을 수 없다." 1972년에 그녀가 어떤 친구에게 한 이 말은 곧 생애 마지막 시기에 이른 그녀의 몸짓, 욕망, 사고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탐구, 단 하나의 법칙을 잘 요약한다. 나이가 많아지고 건강이 쇠약해지고 친구들이 떠나고 직업적인 걱정이 희미해지고, 그리하여 그의 삶과 존재가 군더더기 없이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나면서 글쓰기는 마침내 그 본질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 책이 출간되자 어떤 비평가는 거기에 표현된 특유의 “북아메리카 성”을 특히 주목했다. 영역판 『바람 속의 정원』이 나오자 평단은 즉각 그녀의 예술의 절정이라고 격찬했고 어떤 사람들은 전형적인 캐나다 문학의 표상이라고 지적했다. 이민들의 삶과 서부의 풍경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표현함으로써 나르시스적인, 혹은 자기 주장과 요구가 너무나 강한 현대 퀘벡 문학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었다. 결국 만년의 이 작가는 다양한 믿음, 인종의 집단이 서로 다른 언어에 의하여 분열되지 않고 이 광대한 평원에서 고단하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하며 사는 모습을 그린 너그러운 통합의 문학에 도달한 것이다. - 김화영, 작품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