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 이 책에 대하여
핀, 문학을 잇고 문학을 조명하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첫 번째 컬렉션북 출간!
현대문학의 새로운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가 첫 선을 보인다. 2017년 7월호 월간 『현대문학』에서부터 시작된 이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그들의 신작을 집중 조명하는 작가 특집란이다.
그동안 전통적 의미의 문학이 맞닥뜨린 위기 속에서 문학 작품을 향한 보다 다양해진 변화의 목소리 속에 『현대문학』이 내린 결론은 오히려 문학, 그 본질을 향한 집중이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문예지의 창작 지면을 오히려 대폭 늘려 시의 경우 신작 시와 테마가 있는 에세이를, 소설의 경우 중편 내지 경장편을 수록해 가장 『현대문학』다운 방식으로 독자 대중과 조금 더 깊게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충분히 조명하는 취지의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 결과물로서 월간 『현대문학』 2017년 7월호부터 12월호까지 실린 시인 6인―박상순, 이장욱, 이기성, 김경후, 유계영, 양안다의 작품들을 시리즈의 신호탄이자 첫 번째 컬렉션북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Ⅰ』으로 가장 먼저 출간한다. 이는 현대문학의 새로운 시리즈의 출발점인 동시에 1955년 창간 이래 유수한 시인들을 배출해온 현대문학이 다시금 시인선을 출발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핀pin’이란 주로 사물을 여미거나 연결하는 데 쓰는 뾰족한 물건을 의미이지만, 또는 꽃이나 웃음 등이 개화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흔히 무대 위의 피사체나 세밀한 일부분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쏘아주는 빛도 ‘핀’ 조명이라 하는데, 우리가 표방하는 ‘핀pin’은 이 모두를 함축하는, 정곡을 찌르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Ⅰ』의 작가들은 단행본 발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를 이루어 큐레이션된다. 현대문학이 새롭게 시작하는 시인선인 만큼, 개별 소시집이 이루어내는 성취는 그것 그대로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에세이의 테마 선정과 표지화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동반한 개성적인 6권 세트는 서로 조응하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세트로 독자들에게 문학을 향유할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문학과 독자를 이어주는 ‘핀’이 되려는 새로운 플랫폼 <현대문학 핀 시리즈>.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가 가지는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기대한다.
현대문학*ARTIST-정다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탄생된 시집 표지이다. 각각 개별의 시집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미술 작품으로도 볼 수 있는 이번 VOL Ⅰ 시집들의 표지는 패브릭 드로잉 작가 정다운(b. 1987)의 작품들로 장식하게 되었다.
동덕여대 회화가 출신의 정다운 작가는 신진 시각예술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기획프로젝트 ‘2017 아티커버리(articovery)’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TOP 1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중국, 홍콩,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임의의 구성에서 우연의 결과를 얻고, 이렇게 반복되는 행위들은 규칙성을 갖고 하나의 화면을 완성하는 정다운 작가의 작업 방식은 한 권 한 권의 소시집이나 여섯 권 세트로 큐레이션되는 핀 시리즈와도 그 의미가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우리의 첫 시리즈 시집 첫 번째 협업 아티스트로 정다운 작가를 선정했다.
▲ 작가의 말
2017년 6월, 나는 프랑스 파리의 길거리 카페에 있다. 실내에도 자리는 있지만, 카페의 손님들 대다수는 실내를 등지고 거리를 향해 앉아 있다. 카페 앞 도로는 좁다. 그래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카페의 탁자, 바로 앞으로 지나간다. 나 역시 실내를 등진 채 앉아 커피를 주문한다.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분주하다.
혹시 누군가에게는 이 카페에 있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나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낯선 곳에 대한 새로움도 자유도 느낄 수 없다. 떠나온 곳이 그리운 것도 아니고, 내가 앉아 있는 이 길거리 카페의 환경이 어색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오늘의 내가 걱정이고, 내일의 내가 걱정이다. 그래도 하늘은 맑다.
―에세이 「그의 카페」 중에서
▲ 본문 중에서
밤이 일어선다. 밤이걷는다.
길고 긴 글자들을 가진 밤이 걷는다. 황혼의 글자는 바다를 건넌다. 바람의 글자는 빗속에서태어났다. 12월의 글자는 여행가방을 꾸렸고 월요일의 글자는 별을 좋아했다. 화요일의 글자는 거짓말을 했고 수요일의 글자는 딴생각을 했고, 금요일의 글자는 목요일의 글자 뒤에 숨었다. 3층에서 태어난 글자는 토요일의 글자와 사랑에 빠졌다. 봄의 글자는 4층에서 떨어졌고 여름의 글자는 맨발로 나타났고, 낙엽들의 글자는 첫눈을 기다렸다. 시계 속의 글자는 해바라기가 되고 싶었고, 병 속의 글자는 바퀴가 되고 싶었다. 창밖의 글자는 부엌이나 침대가 되고 싶었다. 길고 긴 어둠의 끈을 가진 밤의 글자들을 품은 밤이 일어선다. 밤이 걷는다. 내 얼굴 위로 밤이 걷는다.
밤이, 밤이,
무너진다. 밤이
―「밤이, 밤이, 밤이」 부분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서 함께해요. 목요일부턴 안 와요. 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요일에 나랑 해요. 꼭, 그러니까 수요일에 여기서……
무궁무진한 봄, 무궁무진한 밤, 무궁무진한 고양이, 무궁무진한 개구리, 무궁무진한 고양이들이 사뿐히 밟고 오는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설렘, 무궁무진한 개구리들이 몰고 오는 무궁무진한 울렁임, 무궁무진한 바닷가를 물들이는 무궁무진한 노을, 깊은 밤의 무궁무진한 여백, 무궁무진한 눈빛, 무궁무진한 내 가슴속의 달빛, 무궁무진한 당신의 파도, 무궁무진한 내 입술,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부분
풀잎의 따님이 다가왔습니다. 풀잎의 따님이 손가락 끝을 모아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습니다. 한쪽 발등에 나를 올려놓았습니다. 풀잎의 따님이 한쪽 발을 들어 올렸습니다. 내 심장이 허공을 가르며 솟아올랐습니다. 풀잎의 따님이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풀잎의 따님의 발목을 두 번, 세 번 감싸 안았습니다.
―「풀잎의 따님이 눈길을 걸었습니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