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목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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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회

나는 지난번에 문학작품을 쓰고 읽는 행위의 뜻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욕망과 관련시켜서 살펴보겠다고 여러분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선 사물을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 흔히 사용되는 라틴어 술어를 빌리자면 호모 파베르homo faber로서의 욕망이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내가 이 욕망을 먼저 다루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학은 다른 욕망들, 즉 앎과 놀이와 구원의 욕망을 채우려는 정신적 활동이기도 하지만, 그 욕망들을 구체적으로 담고 또 독자가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건 산문이건 간에 이야기를 만드는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서입니다. 소설이나 시라는 실체가 존재하기도 전에 그 세 가지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치 임신이나 출산도 하기 전에 아이의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별로 뜻이 없습니다.

한데 이렇게 순서를 정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실체를 먼저 다루겠다고 나선 것까지는 좋고 또 정당하다고 생각되는데, 막상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제목을 붙이려니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이것저것 궁리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창조, 제작, 창작, 상상과 같은 여러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어느 말이 좋을지 한참 생각했죠. 그러다가 창조와 창작이라는 두 말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끝에 결국 창작이라는 말을 택하고 제목을 창작으로서의 문학이라고 정했습니다. 내가 이 단어로 낙착하게 된 과정은 대수롭지는 않은 일이지만 간단히 밝히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우선 상상이라는 말을 제외했습니다. 모든 문학작품이 상상의 소산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 역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상상작용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피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앞에 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 문학작품은 작가의 상상에서 태어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상상의 결과이며 상상작용 그 자체는 아닙니다. 마치 태어난 아이가 남녀 간의 육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관계 자체는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제작이라는 말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다가 그 말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말이 많이 쓰이는 것은 목수나 기계공처럼 일정한 기술을 가지고 어떤 물건을 정해진 구도에 따라 만드는 경우입니다. 또 우리가 영화에 대해서 흔히 제작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그것이 다른 예술의 장르보다도 촬영, 음향, 조명, 몽타주, 편집과 같이 기술에 의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겁니다. 하기야 작가나 시인에 따라서는 면밀한 구도를 미리 짜고, 그 구도에 따라 한 줄 한 줄을 다듬어나가는 사람이 없지도 않을 것이며, 이런 사람은 정밀기계를 만드는 기술자와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프랑스문학에서 예를 들자면 그 유명한 보들레르나 발레리와 같은 시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작詩作에 관해서 언급할 때 제작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composition이나 fabrication이라는 단어 쓰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제작의 밑에 깔린 원초적인 영감이나 직관을 생각할 때, 또 괴테와 같이 천재성이나 독창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많다는 점을 생각할 때, 나는 제작이라는 말이 백 퍼센트 적합하지는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창조와 창작이라는 두 말 중의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창조라는 말보다도 창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물론 문학창조, 예술창조, 창조력과 같은 말들이 매우 흔하게 사용되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창조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신처럼 무에서 유를 만드는 행위를 가리킬 때 쓰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 나의 평상시의 느낌입니다. 그래서 혹시 소설가나 시인이 제 작품을 두고, ‘나는 이러이러한 인물을 창조했다. 나의 언어창조의 과정은 이러이러하다는 식으로 자랑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그들이 신과 경쟁하려는 교만을 부린다고 느껴집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결국 창작이라는 단어를 선호하게 된 거죠. 그 말을 쓰면 작품을 처음으로 만든다는 뜻과 함께, 신 아닌 인간으로서 꾸며간다는 뜻이 동시에 담겨질 것 같기 때문이죠. 그러나 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이 문학적 행위와 그 결과인 작품을 두고 끝끝내 창조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근거로서 조역시 작과 같이 짓다, 만들다는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구태여 그의 고집을 꺾으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필경은 어감의 문제일 테니까요.

다만 창작이건 창조이건 간에 인간의 모든 만듦은 결코 무로부터의 만듦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취사선택이며 가공加工이며 변형입니다. 이 점이 중요하고 또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작으로서의 문학 역시 그러한 것인데, 서론 삼아서 우선 조금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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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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