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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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회

그렇다면 흥미를 유발하면서 교훈을 베푼다는 것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삼은 이야기에만 한정된 것일까요?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른을 독자로 삼는 소설이나 시는 교훈과는 무관할까요? 이 질문은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훈’이라는 말을 어떤 뜻으로 사용하느냐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학은 그 두 가지 면에서 다같이 ‘교훈’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반대되는 교훈입니다.
교훈이란 우선 관습적이고 틀에 박힌 도덕적·사회적 규범을 가리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뜻이며, 아이들에게 읽히는 동화의 대부분은 물론이고 이른바 ‘권선징악’의 소설 따위는 이런 교훈을 베푸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처럼 대하는 TV의 홈드라마 역시 대부분 이런 교훈문학의 한 갈래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욕심을 부리지 말라’ ‘어른을 섬길 줄 알아야 한다’ ‘착한 일을 하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따위의 설교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우여곡절을 꾸밉니다. 사회는 그 성원을 순치하고 다스리기 좋은 관례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런 문학을 장려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응주의順應主義의 문학은 사회가 달라지거나 어떤 외래문화의 자극이 있거나 혹은 스스로 깊은 반성을 할 때에는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학사에서 1900년 내외에 이른바 신문학이 대두하여 봉건적 인간관을 타파하려고 했고, 해방 후에 우리가 겪은 가지가지의 경험은 교훈을 베푸는 대신에 삶과 역사에 대한 고민을 그린 여러 종류의 소설들을 태어나게 했고, 또 오늘날 TV가 보여주는 멜로드라마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바로 그런 예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혀 다른 의미의 교훈을 베푸는 문학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교훈문학이 인생과 사회에 대한 피상적이고 거짓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자아내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기를 촉구하는 문학입니다. 이런 문학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교훈을 베푸는 것이지요. 그러나 상식에 어긋나는 더 깊고 참된 것의 인식을 위해서, 그리고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희한한 세계와의 접촉을 위해서 독자가 지성과 감성을 동원하기를 호소하는 그 문학을, 우리는 보통 교훈문학이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구태여 무슨 칭호를 달자면 역逆교훈의 문학, 혹은 이의제기異議提起의 문학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동서고금을 통해서 귀중한 문학이란 바로 이렇게 우리를 관습적 생각과 편견에서 해방시켜주려는 문학입니다. 나는 홈드라마나 대중문학으로서는 여간해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교훈’을, 아니 역교훈을 베푸는 이런 문학작품을 여러분이 더 많이 읽고 또 가능하다면 스스로 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문학과 실용적 효과

그러나 이런 문학에 접하는 것이 무슨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것은 어떤 문학자들이 생각하듯이 너무나 소박하고 어리석은 질문이 결코 아니라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의식주衣食住를 위해서 할 일이 많고 또 오늘날처럼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세상에서, 참된 것을 알아야 한다는 핑계로 그야말로 ‘밥도 안 나오고 떡도 안 나오는’ 문학과 같은 일에 정신을 쏟으라니 철없는 소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차라리 당연하다고도 여겨집니다. 벌써 50년 전에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인 알베르 카뮈는 “오늘날의 작가는 자기의 직업의 정당성과 효과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물질의 혜택이 크게 늘어가고, 대중매체와 오락문화가 나날이 더욱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과학기술의 발달에 총력을 기울이다시피 하는 21세기의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느냐는 질문은 카뮈의 시대보다 더욱 대답하기 어렵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문학은 정말로 써먹을 곳이 없는 한가한 놀이에 불과할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고 문학에도 역시 실용적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시나 소설은 예부터 개인적 수양에 도움을 주고 또 위에서 말한 것처럼 권선징악의 도구로 사용되어왔습니다. 또한 문학작품은 일상적인 의사전달과 같은 다른 언어활동보다 더 ‘멋있는 표현’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많이 읽어두어서 응용하면 남을 설득하거나 이른바 PR을 할 때 큰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가능하겠죠. 가령 제품의 선전문구에 시적詩的 언어를 동원한다거나(지금까지도 내 머리에 박혀 있는 기막힌 선전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해태제과가 자신들의 제품인 사이다를 선전하기 위해서 만든 “우리 사이 좋은 사이 해태 사이다”라는 문구입니다), 혹은 결혼식의 주례사에서 셰익스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 효과를 내는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우리가 다소 빈정거리며 ‘응용문학’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을 이런 실리적 이용은 비단 ‘보통사람들’만이 겨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일이 있죠. “시경詩經에 있는 300수의 시를 암송한다 한들 그것을 정치나 외교에 이용하지 못하면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또 소련에서는 문학과 모든 예술이 오직 공산주의의 건설과 발전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제시대에 쓰여진 우리의 소설이나 시의 많은 부분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북돋는 데 바쳐졌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으로 보면 개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문학이 실리 내지는 실용적 목적에 이용되어온 것을 알 수 있고, 우리는 그런 현상을 다만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잘못된 이용도 있고 잘된 이용도 있습니다. 탐욕스런 장사꾼들처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혹은 옛소련에 있어서처럼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서 문학이 이용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난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남을 올바른 길로 유도한다거나(하기야 어떤 것이 올바른 길인지는 항상 문제가 되긴 하지만),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게 하는 한 방식으로 문학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우리는 그것을 반겨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실질적 효과를 위해서’라고 대답한다고 해도 그것은 백 퍼센트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문학이 인류의 자유와 화합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또 심지어 바람직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도울 수 있다면 왜 그것을 마다해야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문학은 실용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던가 ‘문학은 오로지 문학 그 자체를 위해서 있다’는 따위의 주장을 내세우는 어떤 전문가들은 일종의 문학적 자폐증自閉症에 걸린 환자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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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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