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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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회

따라서 어린아이의 행복이란 어른이 만든 신화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 인생과 사회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가령 여러분도 벌써 오래전부터 겪어온 경쟁사회에서의 문제들을 생각해보세요) 시달리다 보면 아직도 인생에 대한 반성을 할 줄 모르고 사회생활에 편입되어 있지 않은 어린 시절이 행복해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린아이들에게도 불행과 공포는 수없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파서, 배가 고파서 혹은 어머니가 곁에 없어서 우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런 아이를 보고 ‘저렇게 우는 것도 어린 시절의 행복이지’ 하고 생각하는 노인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불행에 짓눌려서 머리가 돈 사람일 겁니다. 요새는 극성스러운 어머니들의 강요로 서너 살 때부터 벌써 여러 학원으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들이 참으로 불행하다고까지 느껴집니다.
이렇듯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어린이의 행복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들은 방금 언급한 극성스러운 어머니를 가진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아직은 고달픈 사회생활에 휘말려들고 있지는 않고 많은 한가로운 사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한가로운 시간을 그냥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반드시 무엇을 합니다. 태어나서부터 손짓, 발짓으로, 그리고 오관五官을 사용해서 자기의 욕망을 표현하고 세계와의 접촉을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젖을 빨고 어루만지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는 갓난애의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자기자신 이외로도 다른 사람과 사물이 있고 그런 것을 인식하고 인지하고 욕망하는 것이 삶의 길이라는 것을, 그들은 선천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죠.
하기야 이런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에 공통된 현상입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죠. 그것은 유성언어有聲言語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유아는 말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을 하게 되자마자 그들과 세계와의 관계는 질적質的으로 달라집니다. 그들은 대상들을 다만 인지할 뿐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구분하고 그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엄마, 저건 뭐야?’라는 최초의 물음은 말하자면 철학의 시작입니다. 아이들은 세상을 보고 놀라고 그것이 무엇이며 왜 이 자리에 그런 꼴로 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가령 동물원에 간 엄마와 두세 살 먹은 아이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엄마, 이건 뭐야?―원숭이란다―원숭이는 왜 우리 집엔 없어?―동물원이 아니니까―원숭이 볼기짝은 왜 빨개?―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단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는 노자老子가 말하듯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존재가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이미 대상의 존재에 호기심을 갖고 그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지성知性을 발휘합니다. 이 선천적인 순수한 앎의 욕구는 세계를 향해서 무한히 뻗어나갑니다. 하늘은 얼마큼 높으냐, 비행기는 왜 날 수 있느냐, 나는 어떻게 해서 태어났느냐는 따위의 질문, 우주와 사물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어린 철학자의 질문 앞에서 어른들은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어린아이에게 해주는 이야기

한데 우리가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온 많은 재미있는 설화들은 바로 이런 순수한 호기심에 대응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령 수수의 색깔이 빨간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밤길을 가던 할머니가 호랑이를 만났다. 할머니가 살려 달라고 신령에게 빌었더니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할머니는 그것을 타고 올라가 목숨을 건졌다. 할머니를 잡아먹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은 호랑이는 자기에게도 동아줄을 내려 달라고 신령에게 청했다. 신령은 역시 동아줄을 내려보냈으나 그것은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래서 호랑이는 그것을 타고 올라가다가 그만 줄이 끊어져서 떨어졌다. 그때 호랑이가 다쳐서 흘린 피 때문에 수수가 붉은색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봅시다. 이 이야기는 물론 그 자체로서 재미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결코 연결지을 수 없는 두 사물, 즉 호랑이 피와 수수밭이라는 두 가지 것을 결부시켜서 희한한 이미지를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어린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호랑이가 수수밭에 털썩 주저앉아 새빨간 피를 흘리는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마음속에서 그려보며 ‘아이, 재미있다!’고 외칠 터입니다. 그러나 이 설화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어린이의 순수한 호기심을 채워주려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달리 말해서 어린이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이유와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는 목적 사이에는 어긋남이 있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어른들은 어린이의 순수한 호기심과 이야기가 주는 기쁨을 이용해서 벌써부터 어떤 교훈을 베풀려고 합니다. 앞의 설화에서 어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호랑이가 수수밭을 벌겋게 물들였다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양념이며, 이야기의 주안은 할머니를 잡아먹으려는 호랑이는 나쁜 놈이며, 나쁜 마음을 품으면 그 호랑이처럼 하늘의 벌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리하여 어른은 선악의 구별을 짓고 사회의 바람직한 일원으로서 일정한 규범 속에 어린이를 편입시키기 위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콩쥐팥쥐』와 같은 우리나라의 많은 설화도 또 그 유명한 이솝의 우화들도 거의 모두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런 교훈을 베풀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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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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