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의 「사슴」과 정현종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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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회

여러분이 벌써 짐작했겠지만 이 제2의 리얼리즘은 특히 시의 언어에서 흔히 나타납니다. 가령 여러분 모두가 익히 알고 있을 노천명의 단시短詩 사슴을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앞에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배경도 없이 목 긴 사슴이 불쑥 나타납니다. 사슴이야 흔해빠진 짐승이지만 여러분이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에 젖어본 일은 별로 없겠죠. 한데 그렇게 무심하게 대해온 사슴이 이 시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마치 낯선 짐승처럼 나타납니다. 어디에서 사는지, 몇 살인지, 심지어 한 마리인지 여러 마리인지도 모르는, 말하자면 추상적인 사슴입니다. 그러자 독자는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인격조차 잊고 그 사슴과 대면하고 스스로 사슴이 됩니다. 말하자면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난 일종의 무인지대에서 완전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사슴과 한 몸이 된 독자는 그가 긴 목을 뻗듯이 제 마음이라는 긴 목을 뻗어서 이미 사라진 화사한 전설의 나라를 허공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안타까운 향수는 젊은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 이 시에 대한 많은 해설들은 작자인 노천명 자신의 체험이라고 적어놓고 있기도 합니다. 하기야 시인의 그런 서정抒情을 아는 것만 해도 여러분 자신의 체험은 확대된 셈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 시는 인간이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이른바 아르카디아 리플렉스Arcadia reflex의 소산입니다. 우리는 옛날 옛적에 이상향에 살고 있다가 전락했다는 이 신화적 상상력과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가지가지의 시도가 시적詩的 언어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 짧은 서정시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에는 정현종의 산문시 거울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죠. 그러면 우리는 또 전혀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서는 노천명의 사슴보다도 더욱 야릇하게 그 무엇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사물이라는 것이죠. 하기야 아무 데나 널려 있는 것이 사물입니다. 여러분도 나도 사물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저기에 사물이 있다고 인식해본 일이 있나요? 그리고 이 시에서처럼, 사물이라는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것과 무슨 행복한 관계를 맺어본 일이 있나요? 여러분이 평상시에 맺어온 행복한 관계는 우리가 보통 소중한 것으로 치부해온 것들, 가령 내 자식, 예쁜 여자, 비싼 보석, 좋은 집, 내 고향, 내 조국과 같은 특정한 대상과의 관계였습니다. 한데 여기에 느닷없이 나타난 것은 한정된 윤곽이 없는 사물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흔히 말하는 자연조차도 아닙니다. 사물이란 자연을 이루는 작은 것들, 가령 하나의 돌이나 한 그루의 나무나 한 마리의 토끼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갓 태어난 아이, 한 척의 나룻배,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득한 곳에서 비쳐오는 별빛일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의 요소들인 동시에 그것들을 대표하는 것이죠. 한데 이 시는 그런 것들과의 행복한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좀 어려운 말을 쓰자면 존재론적 행복입니다. 사물들이 그 비밀스런 본질을 보일까 말까 할 때에, 그들과 인간들이 원초적 관계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에 느끼는 짜릿하고도 그윽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와 사물은 서로 비밀이 없이 지내는 듯하여 각자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각자의 거울에 비추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물의 비밀이 내 거울에 비추고 나의 비밀이 사물의 거울에 비추는 일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시인처럼 해먹기 쉬운 직업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가장 심오한 참을 아는 것이 여반장如反掌이라면 지난날의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의 모든 고단한 노력에 무슨 뜻이 있었겠어요? 사실, 이 시에서 사물과 나 사이에 비밀이 없다는 말은 결코 그런 안이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애인들끼리 그렇게 하듯이 비밀을 서로 털어놓자는 약속이지 그 비밀의 실체가 무엇인지 당장에 밝혀졌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비밀이 없음은 그러나 서로의 비밀을, 비밀이 많고 끝없음을 알고 사랑함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이제부터 매우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비밀과 입맞추고 그 속삭임을 듣는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불행하게도 그것이 미망迷妄인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흔하게 참의 길을 가다가 겪는 비극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를 끝맺고 있는 빌어먹을, 나는 아마 시인이 될 모양이다라는 아이러니컬한 구절에는 매우 중요한 이중의 의미가 담겨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첫째로 시인이 된다는 것은 이방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先知者는 제 고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성서의 말이 있지만(누가복음 4:24), 참을 추구하기 때문에 상식과 기존관념을 어겨야 하는 시인 역시 사회에서 소외되고 자칫 저주된 운명을 지니게 됩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내 머리에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서시序詩가 떠오릅니다. 그야말로 빌어먹을시인을 태어나게 한 어머니가 차라리 얽히고설킨 살무사 무리라도 낳게 해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는 그 대목 말입니다. 또 한 가지로 그 구절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밀스런 참을 향한 고행의 길로 떠날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 숙명을 걸머진 시인 자신의 결연하면서도 비장한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파국과 좌절로 낙착되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친애하는 사람들을 떠나려는, 출발하려는 욕구, 이따금 우리를 사로잡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욕구에 끌린 말라르메를 연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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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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