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리얼리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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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회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이상적理想的인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작품에 숨어 있는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사실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랜 읽기의 체험과 방법을 갖추고 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세계와 자아에 관해서 조금 더 참된 것을 알기 위해서 문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일반독자에게, 프로이트와 같은 접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죠. 그런 점을 고려해서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군요.

나는 앞에서 리얼리즘을 넓은 의미로 취해서 현실탐구의 정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변身邊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해서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려는 시적詩的 탐구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과 형식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역시 19세기의 서양 소설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오늘날에도 온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형식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본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두기로 하죠.

 

 

기본적 리얼리즘의 계책―『서편제의 서두를 예로 삼아

 

그렇다면 기본적 리얼리즘의 특색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물론 낯선 것을 인식하도록, 즉 겉모양과는 다르거나 미처 몰랐던 참을 인식하도록 독자를 유도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서 갑작스럽게 생소한 것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 점을 알기 위한 쉬운 예로 여러분도 이미 읽었을 이청준의 서편제를 들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보기로 하죠.

이 소설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한 실재하는 장소와 시간을 배경으로 삼아서 시작됩니다. 1970년 무렵의 전라남도 보성읍 밖이 무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객관적 존재를 조금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1970년이라는 시간은 분명히 있었고 보성읍도 엄연히 실재하며 따라서 그 읍 밖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이니까요.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낯익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일이 벌어지는 곳은 그 읍 밖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자리 잡은 한 한적한 길목 주막입니다. 그러자 독자는 벌써 사실을 떠나서 소설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셈입니다. 그 한적한 길목의 이름이 소릿재이며 그곳에 주막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 고갯길과 주막이 실제로 있었는지 반드시 분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지방을 자세히 모르는 일반독자에게 그 실재성 여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런 지리적 정보는 거짓이며, 그것은 텍스트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소설의 이해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 전라남도 보성읍 부근이라는 실재하는 지역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일까요? 소설이라는 것이 어차피 가짜 이야기인 바에야 가령 밑도끝도없이 어느 주막이 있었다는 식으로 시작되면 무엇이 나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일 시작이 그렇게 되었으면 독자가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겁니다. 지난번에 원용援用한 콜리지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불신의 자의적 중지라는 심리상태가 일어나기 어려웠을 겁니다. 전라남도 보성읍이라는 분명한 지명地名을 내세워야 비로소 소리꾼을 주제로 삼은 이 이야기에 그럴듯하다는 인상이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서 지명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 일이 마치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처럼 스스로 착각에 빠져들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1970년경의 그곳에서라면, 소설의 인물이나 사건이 현실적으로 있음 직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보성읍 언저리, 고갯길, 주막집, 소리하는 여자, 그 내력과 소리의 원조에 대한 화자의 호기심, 그 호기심의 이유`이렇게 기호들이 쌓아가면서 소설의 올을 이루는데, 독자는 그것이 모두 가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환상에 끌려갑니다. 소리꾼은 대개가 남도 출신이고 그 성장과정은 순탄치 않은 일이 많다는 상식을 이미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먹혀듭니다.

그렇다면 기본적 리얼리즘의 문학은 이렇게 해서 독자가 기존관념에 따라 품고 있는 현실관에 되도록 가깝게, 가능하다면 그런 현실관과 똑같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기야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그런 효과를 겨냥하는 작품들이 쌔고 쌨지만 그런 것은 참으로 가치 없는 것들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을 흔한 일들을 무엇 때문에 또 그대로 베껴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독자인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알량한 생각이나 지식을 확인하기 위해서 문학작품을 읽어야 하겠습니까?

진실한 기본적 리얼리즘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적事實的 정보와 우리의 기존 지식을 소설의 밑바탕으로 삼는 척하는 것은 우리를 그런 것들로부터 서서히 떨어뜨려놓기 위한 역설적 술책입니다. 기본적 리얼리즘은 낯설고 숨어 있는 참을 갑자기 불쑥 갖다대어서, 일상성日常性 속에 묻혀 살아온 일반독자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배려합니다. 다시 말해서 읽어나가는 중에 그런 야릇하고 참된 것이 마치 일상생활에서 어느 틈에 슬그머니 일어나는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우리에게 낯익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말하자면 미끼에 지나지 않죠. 아니, 이런 표현이 너무 상스럽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듯하군요.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처음에는 낯익은 풍경이 얼마 동안 계속되는데 그 풍경이 차츰차츰 달라져서 마침내 전혀 낯선 고장을 눈앞에 대하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라고요. 또 다른 비유를 하자면, 기본적 리얼리즘은 비행기가 지상에서 활주를 하는 것 같더니 슬며시 하늘로 떠오르는 것과도 같죠.

서편제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우리가 익히 알 만한 현실과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에 어느 틈에 낯선 상황으로 들어섭니다. 이런 수법은 또한 서편제이외에도 남도사람이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다른 4편의 연작소설에서도 한결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그때마다 현실의 환상에 끌려서 화자와 함께 그의 과거로의 여행에 동참하고, 그의 현재의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화해와 용서를 베풀려는 화자의 심정을 나누어 갖습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독자는 이미 일상적 현실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낯선 경지와 대면하고, 새로운 삶의 진실을 만났다고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더 참된 것으로 느껴지는 그 경지로부터 일상의 세계를 되돌아보고 그것이 피상적이며 거짓된 것이었음을 반성하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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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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