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과 3중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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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회

그런 것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예로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죠. 그 비극에서, 은퇴하기로 마음먹은 노년의 리어왕은 세 딸의 효심孝心을 알아보고 그 정도에 따라 영지領地를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손위의 두 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효성을 맹세하여 크게 만족한 왕으로부터 각각 제 몫을 얻어 가집니다. 그러나 왕이 가장 귀여워했던 막내딸 코델리아는 다만 자식된 도리를 지킬 따름이라고만 말하는 과묵한 태도를 보여 왕의 큰 실망과 분노를 자아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요란스럽게 효성을 맹세했던 두 딸은 결국 아버지를 골수까지 파먹고는 내던져버리고, 그를 마침내 거두어들여 보양하려는 것은 불효자식처럼 보였던 막내딸입니다.

만일 리어왕을 이렇게만 요약한다면 그 의미는 뻔합니다. 그것은 속되게 말해서 인간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교훈을 베푸는 것이 됩니다. 리어왕의 큰 실수가 진실과 가식假飾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정념에 쏠린 데 있다는 것을 안 독자는, 인간이란 항상 겉모양에 홀려서 숨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상과 진실의 관계에 관해서 리어왕이 베푸는 앎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른 이야기에서도 흔히 보게 되는 이런 교훈으로 이 비극이 요약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더 깊은 의미에서 숨은 현실을 밝히려는 주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희곡이 단순한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기야 악덕한 두 자매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사랑에 빠져 죽게 되는데, 그것이 일종의 징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성실한 코델리아 역시 부왕父王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음모에 빠져 죽습니다. 그리고 리어왕은 비통하게도 그 사랑스런 막내딸의 시체를 안고 나타나며, 그 역시 곧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 의도나 행위와는 상관없는 죽음과 악의 힘이며, 그 힘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지성감천至誠感天이니 하는 따위의 희망을 뒤엎는 부정적否定的 운명의 승리야말로 이 희곡이 보여주려는 또 하나의 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죽음의 숙명에 관한 이야기에 프로이트의 해석을 곁들여서 더욱 심층적인 의미를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무의식의 발견자로서 칭찬을 받자, 선지자先知者인 시인과 철학자들이 자기보다 훨씬 앞서서 무의식을 발견했으며 자기는 다만 그것을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을 찾아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응답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리어왕읽기에도 나타납니다. 그는 우선 아프로디테, 프시케, 신데렐라와 같은 옛 신화와 옛이야기에서 풍부한 예를 들어가면서,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과묵寡默하고 아름다운 셋째딸이 죽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리어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비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셋째딸 코델리아를 맞아들인 리어왕은 결국 죽음의 숙명을 맞아들인 것입니다. 인간은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럼으로써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숙명에 끌려간다는 것이 프로이트가 내세우는 해석입니다. 말하자면 아름다움과 사랑은 필연적인 죽음이 베푸는 미약媚藥과 같은 것이죠.

프로이트의 이런 해석이 과연 어느 정도 옳을까요? 하기야 시레네스의 노래에 끌려 물에 빠져 죽은 어부들의 신화도 있고, 또 서양 중세기에는 이졸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음을 맞은 트리스탄의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또 그 이외로도 아름다운 여자에 매혹되어서 죽게 되는 이야기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우에 아름다움의 모습을 띤 죽음이 셋째딸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그 후 프로이트가 더욱 발전시킨 죽음의 욕동欲動을 살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더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방면에 관해서 천박한 지식밖에는 가지고 있지 못한 나로서는 무슨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로서 할 수 있는 말은 프로이트가 보여준 바와 같은 엉뚱해 보이는 해석이야말로 문학작품을 통해서 참으로 이르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과연 작가 자신의 의도를 반영한 것인지 아닌지는 지난 강의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내용은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고 또 전혀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 그 자체이며, 그것을 읽는 사람이 더욱더 깊이 묻힌 참을 밝힐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남의 나라의 작품을 읽거나 혹은 옛날의 작품을 읽을 때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품이 생산된 시대나 지역과는 다른 문화적·사상적 환경에서 사는 독자는 그야말로 이방인으로서의 안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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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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