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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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회

그러나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의제기의 문학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낯설게 하기의 정신과 수법입니다. 훌륭한 작품이란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온 것들을 이상한 것으로 만드는 문학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니 내 머리에는 얼마 전에 어떤 소설을 읽다가 거기에 인용된 노래의 한토막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People are strange when you are a stranger”라는 구절입니다. 나는 그것이 누가 지은 것인지도, 또 어떤 문맥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필경 어느 팝송의 한 부분일 것 같은 이 구절이야말로 문학정신을 매우 잘 나타내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외국에 갔을 때만이 아니라 제 나라의 한복판에 있을 때에도, 이방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방인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그 유명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뫼르소처럼, 또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카프카의 변신그레고르 잠자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면 지금까지 그렇게도 낯익었던 사람들과 사물들과 자신의 존재가 갑자기 야릇해 보입니다. 우리가 알아온 모든 것이 사실은 겉껍데기이며 진짜는 그 속에 깊이 가려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싹틉니다. 사실, 이러한 정신적 이방인으로서의 의심이 모든 뜻깊은 시인과 작가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하기 위해서 우선 리얼리즘이란 무엇인지 좀 자세히 따져보기로 하죠.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리얼리즘이야말로 문학정신의 기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용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또 리얼리즘의 정신이 참을 인식하는 것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적절한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리얼리즘은 모사模寫가 아니다

 

가장 소박한 입장에서 볼 때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나타내자는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짓을 거부하고 참을 제시하자는 주장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겠는데, 부질없는 말장난으로 남들을 농락하려는 철없는 짓을 감히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야, 그것을 마다할 시인이나 작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간단하고 바람직한 주장은 엄청난 문제들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귀찮은 일이지만 그런 문제들 중에서 한두 가지 짚어나가 봐야겠군요.

여러분은 신라의 화공 솔거率居가 황룡사의 벽에 그렸다는 소나무가 하도 실물과 같아서 새가 그 위에 앉으려고 하다가 벽에 부딪쳐 죽었다는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겠죠. 그야말로 리얼리즘 그림의 극치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엉뚱한 상상을 한번 해봅시다. 솔거의 소나무 그림과, 법주사 입구에 서 있는 소위 정이품송正二品松이나 철갑을 두른 듯한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의 커다란 천연색 사진과, 또 남농南農과 같은 이름난 화가의 소나무 그림을 나란히 세워놓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새가 그중의 어느 것에 와 앉는지를 보고 가장 참되게 현실을 재현한 것을 가려내는 규준으로 삼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것이 말이 될까요? 아마도 여러분은 당장에 내가 당찮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탓할 겁니다. 그런 그림과 사진들을 나란히 세워놓는다는 상상이 터무니없기 때문이 아니라, 새의 눈에 의지해서 참을 판정하려는 짓이 근본적으로 틀렸기 때문에 그렇게 탓할 겁니다. 솔거의 소나무와 새에 관한 이야기는 그 그림의 훌륭함을 칭찬하기 위한 매우 소박한 과장법이며,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소나무의 소나무다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는 소나무만이 아니라 어느 나무에라도 와 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데 그림이나 사진이 아닌 글의 경우에는 이런 일은 아예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만일 언어로써 소나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야 한다면,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전에 실린 정의定義겠죠. 소나무란 소나무과의 상록 침엽 교목이다. 높이는 25미터 정도이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구과毬果로 다음 해 가을에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객관적 서술이 문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식물학적 서술은 앞서 본 것처럼 비개별적인 것이며, 문학적 참의 인식의 바탕이 되는 개별적 체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 체험한 소나무의 소나무다움이 아닙니다. 그러자 우리는 가령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중의 한 수에 생각이 미칩니다. “더우면 곳 퓌고 치우면 닙 디거늘/솔아 너는 얻디 눈 서리를 모르는다/구천의 불희 고든 줄을 글로하야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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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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