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읽기의 필연적 모순

페이스북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블로그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링크 복사하기

15 회

그러니 작가나 시인의 동기나 의도에 대해서는 너무 큰 무게를 두지 말고 그들의 작품을 창작으로, 언어적 구조물로, 다시 말해서 허구로 보고 읽으면서 이해해나가도록 합시다. 한데 작품을 허구로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동어반복 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이 현실 아닌 가짜라는 인식을 밑에 깔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인식이 결핍되면 웃지 못할 난센스가 생깁니다. 특히 어린이의 경우에 가끔 일어나는 일이죠.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인 사르트르는 유년 시절에 스스로 모험소설의 주인공 노릇을 하면서 집안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 나는 슈퍼맨의 흉내를 내려고 하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의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과 허구의 혼동은 비단 아이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원시시대에는 벽화로 그린 동물에 실재성實在性이 부여되었고, 우리는 오늘날에도 우상偶像을 숭배합니다. 하기야 이른바 문명국가에 있어서는 이 우상숭배는 대부분의 경우에 이미 우상의 실재성이 아니라 그 상징성을 자각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요. 한데,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허구와 현실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의식을 예술감상의 밑바닥에 깔고 있지 않으면서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는 중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때마침 정의의 총잡이가 나타나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악한을 죽여라!’는 고함 소리가 요동치는 일이 제법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이런 일은 없겠죠.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에서, 줄리엣의 무덤을 찾아간 로미오가 독약을 먹으려는 순간, ‘줄리엣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다. 독약을 먹지 말라!’고 외치는 관객이나, 춘향전을 보면서 변 사또를 후려갈기려고 무대로 뛰어오르는 관객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서정주의 화사에 홀려서 그 을 찾아나서는 독자가 있을 것 같습니까?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대부분의 사람은 문학만이 아니라 모든 갈래의 예술작품을 대할 때 그것이 허구인 줄 미리 인식하고 이른바 미학적 거리를 유지할 줄 안단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작품을 읽는 독자가 그 속으로 빠져들지 않는다면 읽기가 성립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춘향전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거나 보면서 매순간마다 저건 가짜지.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사람을 속이고 있군하고 중얼거리며 그 속으로 끌려들기를 거부한다면 문학적 창작이라는 인간의 행위는 완전히 헛되고 무의미하고 해롭기조차 할 것입니다. 한데 작품이라는 허구는 그와는 정반대로 여러분이 그것을 마치 진실인 양 받아들이고, 그러기 위해서 도리어 현실과 당분간(즉 작품을 대하는 동안) 담을 쌓기를 종용합니다.

바로 여기에 작품수용의 모순이 있는데, 문학은 바로 이 모순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묘한 인공적 구성물입니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은 객관적으로는 가짜 이야기이지만, 그 자체의 내부에서는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일단 춘향전이라는 책을 펼치면, 흡사 교회나 극장에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사람들이나 현상들과는 단절됩니다. 그리고 그 허구가 만드는 밀폐된 공간에 스스로 갇힌 여러분 앞에서 춘향과 몽룡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이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기꺼이 그 가짜이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실재성實在性조차 부여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따라가 봅니다. 19세기 초의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였던 콜리지Coleridge라는 사람은 이 현상을 두고 불신不信의 자의적自意的 중단이라고 말했는데 매우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독자는 이 이야기는 가짜니까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스스로 중단하고 그것이 마치 사실인 양 대한다는 것이죠. 만일 이 의식의 전환이 읽기의 과정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문학적 진실’, 허구이면서도(아니, 허구이니까 도리어) 더 순수해 보이는 진실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와 아울러 또 한 가지의 현상이 가짜 이야기읽기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군요. 그것은 이른바 감정이입의 현상입니다. 하기야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이죠. 우리는 가령 천재지변으로 자식을 잃고 흐느껴 우는 어머니를 보면 그 처지를 마치 자신의 처지인 것처럼 옮겨 생각하고 눈시울을 붉힙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시나 소설을 읽는 중에 일어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벌써 잘 알고 있을 터입니다. 만일 춘향전을 읽으면서 춘향과 몽룡의 기쁨과 괴로움을 다만 인지할 뿐 그것을 함께 나누어 갖지 않는다면 독서의 효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지적知的이건 정적情的이건 간에 감동 없는 읽기에 무슨 뜻이 있겠으며, 그런 경우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

우리 현대문학 회원에게 무차별적으로 보내지는 타사의 메일을 차단하기 위해,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008년 2월 19일]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