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의도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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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회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죠. 그것은 작가가 소설을 쓰건 시를 쓰건 간에 자신의 여러 체험에 대해서 반성, 선택, 재구성의 작업을 가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품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행위는 이유 없는 순수한 행위는 아니겠죠. 그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미지, 인물, 사건 따위를 독자가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즉 독자에게 호소할 마음이 없고서야 무엇 때문에 작품을 쓰고 발표하겠습니까? 그러나 독자가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작가가 그의 구성물에 담아넣으려던 어떤 특정된 의미를 독자가 그대로 어김없이 파악한다는 것일 테죠. 그래서 어떤 작품의 내용이 난해하거나 모호하면 그 작가에게 직접 찾아가서 당신은 과거에 어떤 체험을 했었기에 이 작품을 썼고, 독자는 그것을 어떻게 읽으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될까요?’ 하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신문에는 그런 기사가 많이 실립니다. 한데 작가에 따라서는 겸손에서이건 교만에서이건 간에, ‘작품의 이해와 해석은 나와는 상관없고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반대로 어떤 작가는 누가 묻기도 전에 자신의 의도를 밝히기도 합니다.

 

김춘수의 의 경우

 

사실, 작가 자신이 창작의 동기나 의도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런 정보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예를 들어볼까요? 의 시인으로 유명한 김춘수는 그의 시가 난해하다고 말하는 독자들에게 이런 뜻의 말을 자주 했습니다. ‘여러분이 내 시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를 보지 않고 무슨 관념이나 상징적 의미를 그 사물에 덮어씌우기 때문이다.’ 알 만한 이야기입니다. 가령 우리는 장미를 장미로 보지 않고 무슨 순결이니 아름다움이니 혹은 정열이니 하는 관념의 상징으로 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가려는 김춘수의 의도는 가상假象으로부터 진실로, 껍데기로부터 알맹이로의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의 초기 대표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라는 이름의 시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시구는 예컨대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마음에/백합 같은 내 동무야라는 이은상의 사우의 구절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꽃을 노래하는 것이 결코 아니죠. 꽃은 너무나 인간화된 비유에 불과합니다. 그 반면에 김춘수의 이 간단한 시구는 꽃 그 자체를 새로 희한하게 탄생시킨다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성서의 첫머리에서 빛이 있으라는 신의 말씀이 떨어지자 혼돈으로부터 빛이 탄생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김춘수의 의도를 약간 거슬러서 이 시를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냥 꽃이라고 새삼스럽게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꽃에 덕지덕지 씌운 때를 말끔히 씻어내려는 일종의 주술이지만, 이 명명命名의 행위는 역시 인간의 행위로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에 말했듯이 존재하는 것은 무질서한 것들의 퇴적堆積이며, 인간이 사물을 분간하고 그것에 제각기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사물 자체의 본질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이것은 꽃이다라고 외쳐보아도 그 꽃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여러분은 모를 것이며 그것을 속속들이 묘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또 설사 묘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본질에 도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피어오르던 꽃도 며칠이 지나면 마치 나는 당신들이 이름 지은 이 아니다라고 말하려는 듯이, 마치 제 본질을 인간의 눈앞에서 감추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시들고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이 시구에서 꽃은 시인이 주장하듯이 결코 사물로서의 꽃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 역시 시인 자신의 욕망이 빚어낸 하나의 상징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어떤 초월적 존재의 상징입니다. 과연,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그 뒤에 오는 시구는 꽃이라는 말에 분명한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더욱 잘 말해줍니다. 그리고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마지막 구절은 초월의 욕망과 그 욕망의 실현의 어려움을 동시에 알려주는 비교적 흔한 발상의 한 예가 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앞으로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와 같은 시인의 시를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그런 초월적 존재의 상징으로서 나타난 것이 왜 새나 나비나 별이 아니라 하필 꽃이냐고 물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이청준의 눈길의 경우

 

김춘수의 시를 두고 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나요? 미안합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작가 자신이나 해설자가 창작의 동기와 의도에 관해서 하는 설명이 때로는 작품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만, 도리어 그 의미를 제한하고 독자 스스로가 더 깊고 넓은 의미를 발견하는 데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문학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지루할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이청준의 소설에서 한 가지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그의 걸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눈길을 읽어본 일이 있겠죠? 나 역시 깊고도 애절한 모정母情을 그린 그 소설을 좋아합니다. 한데 그 모델이 된 것이 작가 자신의 어머니이며 그 어머니가 겪은 고생도 사실이라는 것이 요새 TV의 한 특집방송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 소설을 허구가 아닌 실화로서 읽을지 모릅니다. 하기야 그래서 나쁠 것은 없죠. 그런 사정을 아는 것이 이야기를 더 눈물겹게 만들고 더 큰 감동을 자아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소설에 나오는 화자가 작가 자신이고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라고만 생각한다면 소설을 그 소재로 되돌리고 그 의미를 좁히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눈길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이 실화이기 때문일까요, 혹은 소설로서의 능란한 글쓰기 때문일까요? 여러분이 이렇게 자문해보면 작가 자신의 체험을 넘어선 차원에서 이 소설의 재미를 더 잘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실화라 해도 어머니의 그 눈물겨운 말투 하나하나를 작가가 어떻게 모두 외우고 있었겠어요? 또 여러분은 소설에서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본인에게 직접 털어놓지 않고 그의 아내인 며느리에게 고했다는 사정을 알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작가에게 물어보아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그뿐 아니라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마치 남인 것처럼 그냥 노인이라고 칭하고 노인에 대해선 빚이 없음을 골백번 속으로 다짐했던그 쌀쌀맞은 아들 이청준이 이제 그 나름으로 불효자는 웁니다라고 비탄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을까요?

이런 의심을 가져보는 것은 눈길을 더 재미있게읽기 위한 시발점이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것은, 아무리 작가의 체험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망정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인공적 구성물(그것을 우리는 흔히 텍스트라고도 부르죠)입니다. 눈길의 경우, 우리는 작가 이청준 자신의 체험에는 별로 상관하지 말고 그것을 객관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제된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큰 감동을 자아냅니다. 만일 어머니가 그 쓰라리고도 깊은 애정을 아들에게 직접 토로했다면 그것은 자칫 넋두리가 되고, 말하자면 아들을 고문하는 꼴이 되었을 겁니다. 그 점에서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시키고 그것을 들어주는 매개자로서의 아내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로 우리는 어머니의 애정과 반비례反比例하여 어머니로부터 달아나려고 했던 아들의 태도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애정은 어떤 점에서는 아들의 개인적 욕망의 성취를 방해하는 치근치근한 장애물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생기는데, 소설의 재미는 화자인 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엿듣고는 마침내 그 긴장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의 애정 속으로 용해되고 만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용해는 과연 결정적이었을까요 혹은 일시적 반응에 지나지 않았을까요. 소설은 그 점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것은 의문부호를 남기는 이른바 열린 소설이며 그 속편은 독자인 여러분이 스스로 써볼 만한 것이죠. 눈길은 이런 점에서도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소설에 나타난 모자母子관계를, 가령 카뮈의 이방인에서의 모자관계와 비교하면서 뜻있는 성찰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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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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