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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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

책상 서랍을 열어보다 깜박 잊고 있던 쌍가락지를 꺼내 본다. 지난 가을 진주문학회 초청으로 진주시에 갔을 때 받은 은 쌍가락지다. 진주 남강 의암대에서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논개는 깍지 낀 손가락이 풀리지 않게 하기 위해 열 손가락에 쌍가락지를 꼈었다고 한다.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높은 충절을 되새기려, 촉석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진주교에 가락지 모양 상징물 이십 개를 축조해놓았고 논개 쌍가락지를 만들어 그 뜻을 기리고 있다고 했다.

반지 상자에서 은가락지를 빼 손가락에 끼워본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 들어가지 않는다. 손가락 굵기가 문제가 아니라 애국심이 부족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닐까, 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며 반지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들이 떠오른다.

반지가 귀했던 어린 시절이다. 도회지에서 이사 온 친구가 어디서 들었는지 소매치기들 반지에는 면도날이 붙어 있다고 했다. 마치 자기가 면도날 달린 소매치기 반지를 낀 것처럼 가방 찢는 흉내와 주머니 따는 동작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 소매치기들 무섭다. 소매치기하다가 들키면 어떻게 하는 줄 알아. 이렇게 면도날로 얼굴을 삭, 긋는 거야. 그래놓고 얼굴에서 피가 나 정신없을 때 도망친대. 무섭지.”

친구가 바람잡이 대역으로 세워뒀던 여자친구 얼굴 긋는 시늉을 했다. 여자친구가 놀라 소리를 쳤고 나도 섬뜩 놀라며 내 얼굴을 만져보았다. 만원 버스는커녕 그냥 버스도 한 번 타본 적이 거의 없는 우리가 놀라자 친구는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기차에서 있었던 일인데, 아기 엄마가 화장실 다녀오는데,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더래. 달려가 보니까 글쎄 반지 꼈던 아기 손가락이 없어졌더래. 반지가 안 빠지니까…….”

, 그만해.”

여자친구의 비명 가까운 소리에 도시에서 이사 온 친구의 이야기는 끝났었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십 대 초반이었다. 단기사병 복무가 끝나가던 그해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망신고 하러 면사무소에 가는 길이었다. 동네 아주머니가 눈길에 미끄러졌는지 넘어져 있었다. 그 곁에 있던 건넛집 누이가 새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려다 같이 나뒹굴었다. 눈 내린 둑길을 달려가 아주머니를 일으켜드렸다. 아주머니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나서 그 아주머니가 술에 취해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해 겨울엔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렸다. 나는 내 무능력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면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 발로 둑길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눈이 녹던 어느 날 나는 잔설 속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발견했다. 술 취한 동네 아주머니가 넘어졌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묵직한 금반지를 아주머니한테 찾아준 날 저녁이었다. 건넛집 막내딸이 장터에서 튀겨 온 닭 한 마리를 들고 왔다. 새어머니가 직접 와 인사해야 하는데 다리를 다쳐 고맙다는 말을 대신 전한다며 돌아갔다. 튀김 닭 고소 한 냄새가 집 안 가득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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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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