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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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회

발목을 다쳤다. 걷기가 힘들어 택시를 탔다. 엑스레이 사진 판독 결과 뼈는 이상 없고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의사는 친절하게도 모형 발을 움직여가며 통증의 원인을 설명해주었다. 의사가 모형 발목을 비틀 때마다 마치 내 발목이 비틀리기라도 하는 듯 다리가 찌릿찌릿 저려왔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에 뜬 사진을 보여주며 발 상태를 설명해주고 나서, 한 이틀 두고 보았다가 다친 부위가 더 부으면 깁스를 하자고 했다.

병원을 나와 다시 택시를 타고 용정리 한방병원에 갔다. 깁스를 하기 전에 침을 맞아두자는 계산이었다. 한방병원은 평소보다 한가했다.

노인들은 일이 없는 겨울이나 장마철에 많이 아파요. 농번기에는 아파도 안 아픈 거죠.”

병원에 환자가 많다고 말을 건넸을 때 매일 그렇지는 않다며 한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노인들의 통증이 들판으로 흩어지는 봄이 왔음을 절감하며 침을 맞았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진통제 주사와 침을 맞아서 그런지 다리가 좀 부드러워졌다.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집을 나섰다. 지팡이를 짚어보며 지팡이 짚는 데도 요령이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오른발 쪽에 실리는 하중을 줄이려고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었다. 그렇게 하자 오른발의 통증은 줄일 수 있었는데 다치지 않은 왼발도 뻗정다리로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담뱃불을 붙이려고 지팡이를 왼손으로 잡고 있다가 깜박 잊고 걸음을 옮겨놓았다. 아차, 싶어 지팡이를 옮겨 잡으려고 하는데 왠지 발이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친 오른발과 왼손으로 짚은 지팡이를 나란히 앞에 두고 왼발을 내딛으니까 뻗정다리로 걷지 않아도 되었다.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걸을 때는 두 발로 걷는 거와 마찬가지였는데 왼손에 지팡이를 짚으니 세 발로 걷는 격이 되었고 힘이 자연스럽게 분산되어 걸음걸이가 편했다.

 

노후를 위해 하나 장만해놓았지, 세 발로 걸을 때를 위해서.”

동네 형님네 간이 창고에 모여 술을 한잔하고 있었다. 집주인인 엄익선 형이 선반에서 꾸불꾸불한 도사 지팡이를 내려 보여주며 농을 던졌다. 그러자 김정만 형이 세 발은 이제 건너뛰고 네 발로 직접 넘어가는 시대에, 쓸데없는 짓했다며 농으로 말을 받았다. 그러면서 유모차 한 대 갖다가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나도 끼어들어 유모차 말고 바퀴 네 개 달린 지팡이를 세련된 제품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물어보았다. 밤에 켤 수 있는 작은 경광등과 백미러를 달고 간편하게 접을 수 있게 지팡이를 만들어 특허를 내보자고 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한주 아빠가 비싸서 그걸 노인들이 사겠냐고 했다. 청와대에서 백수白壽를 한 노인들에게는 지팡이를 선물한다는데, 정부지원사업으로 하면 안 될까? 이런저런 말들이 더 오가던 끝에, 사람은 태어나 네 발로 기다가 허리 펴고 두 발로 걷지만, 결국은 짐승들처럼 다시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 죽고 만다는 말이 나왔고, 그 대목에서 묵언의 건배를 들었었다.

 

산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다. 산에 핀 진달래도 볼 겸 강화산성을 넘어 버스 터미널에 가려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야트막한 산허리를 잡아 산길을 올랐다. 진달래와 생강나무꽃이 만개해 있었다.

꽃들아, 너희들이 봄의 지팡이냐, 봄은 너희들을 짚고 오는 것이냐, 물어보자 꽃들이 아니요, 봄이 우리들의 지팡이에요, 라고 겸손을 떨었다. 꽃의 빛깔이 한층 더 곱게 다가왔다. 봄은 어린데, 지팡이는 무슨 지팡이야! 헛소리하는 당신이나 넘어지지 않으려면 지팡이 잘 짚으소. 혼잣말을 하며, 산허리 가로지르는 길을 넘었다.

산허리에는 가로지르는 길이 있다’, ‘사람의 허리에도 길이 있다중얼중얼 시구절을 만들어보며 길을 내려섰다. 역기, 철봉, 평행봉 등의 체육 시설과 족구장, 배드민턴장을 갖추어놓은 장소가 나타났다. 어린 남녀 학생이 긴 나무의자에 앉아 까르르까르르 웃음을 날렸고 씩씩하게 팔을 저으며 걷기 운동을 하는 아저씨를 위해 산새들이 울음소리로 구령을 붙여주고 있었다.

체육 시설을 지나자, 옛 시골 풍경이 그대로인 마을로 뻗어내린 길이 펼쳐졌다. 봄엔 자연을 옮겨 적으면, 다 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거짓말 같았다. 밭에서 일을 하던 할머니가 밭고랑에 드러눕는 거였다. 머리에 모자를 쓴 할머니가 밭고랑에 누워 다리를 가지런히 하며 허리를 쭉 폈다. 할머니 손에는 호미가 들려져 있었다.

하루에 아니, 한 시간 사이에 땅에 허리 펴고 눕는 사람 두 명을 만나다니! 따스한 봄볕이여, 너의 연출은 너무 평화롭고 울렁울렁 깊기도 하구나.

허리를 휘게 한, 허리를 아프게 한, 허리를 아프게 하여준, 밭이 할머니 몸을 받아주는 침묵의 소리에 냉큼 지팡이 소리를 거두었다.

봄이 허리 펴는 소리에 꽃들이 피어난 봄날이었다.

 

 

침을 맞고 강화읍내에 나온 김에 가보고 싶은 절이 있어 남산을 향했다. 길을 오르며 홍매화도 보았고 담장 아래 제비보다 빨리 온 제비꽃도 만났다. 쉬엄쉬엄 절에 올라 읍내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절 마당에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외치며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혼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서투른 방심으로 시간을 보내며 다리를 쉬었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길에 아저씨 한 분이 갑자기 벌러덩 드러누웠다. 술이 많이 취했나보다 하고 내려오는데 아저씨 옆에 있던 할머니가 발음이 좋지 않은 목소리로 불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걸음을 조금 빨리해 다가갔다. 길에 누워 있던 아저씨가 고개를 들더니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시멘트 부대를 가리키며 좀 도와달라고 했다. 누워 있던 아저씨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저씨는 할머니에게 내가 등산객이 아니라 다리를 다쳐 지팡이를 짚고 있는 거라고 말 반 손짓 반으로 설명을 했다. 내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자 아저씨는 길에서 일어나 시멘트 부대에 등을 갖다 댔다. 시멘트 부대를 들어 올려주자 아저씨가 힘겹게 일어나 언덕 위 슬레이트집을 향해 힘들게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는 고갯짓으로 아저씨를 가리키며 고모부인데 허리가 아파서 그런다고 했다. 말귀가 어두운 할머니는 혼자 산다며 묻지 않는 말들을 했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라 부르기에는 좀 뭣한, 겉늙은 아주머니는 약간 정신이 불편해 보였다. 시멘트 한 부대를 더 들어주자 아저씨는 아픈 허리에 짐을 진 채 고맙다고 자꾸 무거운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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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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