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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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회

자물쇠 만지는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여보았다. 분명 자물쇠 만지는 소리였다. 방에 누워 있다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유리창에 검은색 코팅비닐을 붙여놓아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선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자물쇠 만지는 소리가 났다. 출입문 유리에 붙여놓은 코팅비닐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갓 초등학생이 되었을 법한 꼬마가 자물쇠 번호판을 누르고 있었다.

몇 번 열쇠를 잃어버렸다. 그때마다 쇠톱으로 자물쇠 고리를 잘랐다. 고민 끝에 번호 자물쇠를 샀다. 번호 자물쇠는 기억력이 열쇠와 같아, 열쇠를 분실할 우려가 없어 좋았다.

사실, 시골에 살며 별 볼일 없는 방을 잠그고 다니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써놓은 글들은 잃어버리면 어디 가서 살 수도 없는 것이기에 할 수 없었다.

좁은 틈새로 보이는 꼬마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했다. 꼬마는 마치 오락게임이라도 하듯 번호를 눌러보고 자물쇠를 당겨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할까. 꼬마는 왜 문을 열어보려고 하는 걸까. 꼬마의 표정을 보아 문을 열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물쇠만 열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꼬마는 다른 의도는 없고 오직 열림과 닫힘의 게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스르륵. 문을 열었다. 문 따라 움직인 자물쇠를 놓지 않아 꼬마의 상체가 옆으로 기울었다. 우두망찰하여 서 있던 꼬마가 정신을 차리고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도망쳤다. 왜 자물쇠를 열려고 했을까. 내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가 도망가버렸다. 아니 내 궁금증을 품고 있는 자물쇠가 도망갔다.

나는 자물쇠를 문밖에다 그냥 매달아둔다. 자물쇠가 잠겨 있으니까 꼬마는 집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꼬마가 너무 놀라지 않았을까. 미안한 맘이 든 것은 꼬마가 내 시계에서 사라진 후였다.

 

80년대 초다. 멀리 바닷가에서 직장에 다닐 때다. 직장 동료들이 모여 술을 먹고 있었다. 웬 술판이냐고 물었더니 형이 주택복권에 삼 등으로 당첨되어 한턱내는 거라고 했다. 그 자리에 행운의 형은 없었다. 그 형은 어디 갔냐고 물어보았다. 술이 너무 취해 사원 아파트에 바래다주고 왔다고 했다. ‘이번에 안타를 쳤으니까 다음에는 홈런을 칠 거라며 술을 과하게 마셨다고 했다.

다음 날 출근해  형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사는 그는 현관문 앞에 다다라서야 열쇠가 없음을 알았다. 식구들이 처가에 가 집은 비어 있었다. 평소 성격이 대담한 데다가 운동을 많이 한 그는 자신의 발달된 운동신경을 믿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티브이 안테나 줄을 타고 베란다로 내려가려고 시도했다. 티브이 줄이 끊어지고 그는 추락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위와 같이 추론했다. 그 추론에는 일리가 있었다.

전날, 일행 중 하나가 술 취한 형을 바래다주고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었다. 문제의 아파트 열쇠는 오토바이 열쇠와 함께 열쇠 꾸러미에 묶여 있었다고 했다.

 

열쇠에 관련된 슬픈 기억이 떠올라 바람도 쐴 겸 방을 나섰다. 경첩 암놈과 수놈 사이에 뚫린 구멍에 못을 찔러 박고 자물쇠를 채웠다.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온수리 장날이었다. 음악 테이프 파는 좌판과 튀김 파는 포장 트럭을 지나 길을 건넜다. 좌우로 천막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과일 파는 트럭 앞에서 옛날에 살던 동네에서 자주 뵙던 아저씨를 만났다.

이보게, 저기 이불 파는 데는 겨울이고, 여기 과일 파는 데는 가을이고, 또 저기 야채 파는 데는 봄일세.”

. 정말 그러네요. 어디 모종이나 씨앗 파는 데가 있으면 여름일 텐데요.”

나는 아저씨의 재담에 박수를 치며 한참 웃고 나서열쇠왕할아버지가 요즘 안 보인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저씨는 그 할아버지 안 보인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강화읍 장에서열쇠왕할아버지를 처음 보았었다. 그 할아버지는 노란 금박지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 왕관에는 열쇠왕이란 글씨가 써 있었다. 나는 왕관 쓴 할아버지를 보고, 사람의 몸이 열쇠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후 나는 그 할아버지를 온수리 장이나 강화읍 장에서 간간이 만났다. 그러던 중 어느 겨울에는, 온수리 장에서 그 할아버지를 만났고 시 한 편을 썼었다.

 

열쇠왕

 

머리에 종이 금관

금관에 열쇠왕이란 글자

주먹코안경

열쇠 자물쇠 주렁주렁 달린 조끼 벗고

겨울바람 피해 농협현금자동지급기 코너에서

콜라에 빵을 먹고 있는 할아버지

온수리 장날은 헐겁고

할아버지는 수많은 열쇠를 깎아 무엇을 열었을까

현금지급기 거울 속을 들여다보다

압축된 내 삶 같은 직불카드를 들이밀면

내 몸뚱이는 무슨 열쇠일까

무엇을 열겠다고 세상을 떠돌아왔는가

하 많은 자물쇠를 만났는가

혼자여서 쩔렁거리지도 못하는

울며 웃는

내 몸은 무슨 열쇠인가

꿈에는 가끔 무엇을 열어보았던가

탈칵 열리는 게 뭐 있었던가

열리지 않음만 실컷 열다가

상처로 패인 열쇠가 되어

결국

이 악물고 호흡 끊으며

죽음만 비틀어 열고 말 존재인가

찌개용 돼지고기를 사려고 돈을 찾고 있는

잔금에 신경 쓰는

나는

아직 내 몸이 무거운, 열쇠가 되지 못한

철편 하나

 

장터의 한편에서, 연탄 화덕을 놓고 수수부꾸미를 만들고 있는, 바지락을 까 대접에 담아놓은, 시금치 몇 단만 쌓아놓고 있는 할머니들을 보며 맘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내 맘과는 달리 할머니들의 표정은 담대하게 밝았다.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으며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 할머니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열쇠와 자물쇠가 자웅동체인 마음이었다.

마음의 자물쇠와 열쇠는 둘 다 신축성이 좋아, 마음먹기에 따라 열리고 닫힐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수업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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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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