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이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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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회

사오 년 전이었다. 산자락에 붙어 있는 집 중 개를 기르고 있는 집들만 골라서 너구리가 내려왔다. 너구리들은 털이 거지반 뽑혀 있었고 등짝과 배 여기저기에 부스럼이 나 징그러웠다. 병을 앓고 있는 상태가 비슷비슷한 것을 미루어보아 큰 전염병이 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너구리들은 왜 개장 근처로 내려와 죽어갔을까.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해지자 같은 과인 개 냄새를 동료 냄새로 착각한 것일까. 먹이 사냥할 힘이 떨어지자 사촌 격인 개에게 도움을 청하러 내려왔던 것일까.

그 일이 있은 후 동네에 너구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바닷가 갈대숲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고 산길에서 배설물을 볼 수도 없었다.

너구리가 좋아한다는 고욤나무 열매가 떨어져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구리들이 전염병에 거의 몰살당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자연을 너무 대책 없이 과보호한 결과로 너구리들이 전멸한 것은 아닐까. 제한된 공간에 숫자는 늘어나고 먹을 것은 한정되어 있고 해서, 너구리들 몸이 약해진 틈에 전염병이 창궐했던 것은 아닐까. 생존조건이 좋아져 역설적으로 생존조건이 나빠진 것은 아닐까. 무조건 보호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자연보호의 폐해가 보호가 아닌 전멸이라는 충격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길상아, 가만히 있어!

개가 벼룩이 많은지 뒷발로 목덜미를 긁적긁적거리고 입으로 꼬리를 물어 자근자근 씹기를 자주해 목욕을 시켜주고 있자니 개과인 너구리가 떠올랐다.

내가 기르고 있는 발바리 개 길상이는 유난히 물을 싫어한다. 오징어 다리로 달래도 보고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며 안심도 시켜보지만 도통 소용이 없다. 수돗가와 무조건 멀어지려고 뒷다리로 앙버티며 힘을 막무가내로 쓴다. 작은 체구에서 어찌나 그리 센 힘이 나오던지 감탄할 정도다.

비누칠을 다 끝내고 바가지로 물을 퍼붓자 개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한 손으로 거머쥐고 있던 개 목줄띠를 더 바투 잡았다.

개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목욕을 서둘러 끝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개는 추워서 떠는 건지 놀라서 떠는 건지 몸을 벌벌 떨었다. 눈빛에 불안함이 역력한 개를 양지 쪽으로 끌고 가 털을 말려주며 바라다보고 있자니, 방에서 기르지도 않는 개를 목욕까지 시키고 내가 너무 극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불자 시원해졌던지 개가 목을 빼고 혀로 코끝을 핥았다.

정말 개 팔자가 상팔자네, 목욕도 시켜주고. 네 팔자가 내 팔자보다 낫다. 네가 내 상전이다.

당분간이라도 벼룩 걱정 안 하고 편히 자게 물 호스 끌어 개장을 청소해주었다. 청소하는 나를 개가 뭐하는 짓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 길상이 너는 왜 한 귀는 세우고 한 귀는 세우지 않았냐. 뭐라고, 내가 말하는 것 반만 듣고 반은 안 들으려고. , 세상 소리 반만 들으며 살라고 한다고. 예끼 이놈! 아니면 뭐라고, , ,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한 귀는 닫고 한 귀는 세웠다고. 바람 소리 새소리 세상 모든 소리 잘 새기어들으려고 그런다고. , 착하고만.

혼자 미친 사람처럼 개한테 말을 걸다가 개밥을 챙기려고 대문을 들어섰다. 특별히 날계란 하나를 풀고 밥을 비볐다. 간을 생각해 김치찌개 국물도 댓 숟가락 퍼 넣었다.

개밥을 주려고 바깥마당으로 다시 나갔다. 개가 제 집에서 뛰쳐나왔다. 나는 개 밥그릇에 밥을 담아주고 개집을 들여다보며 잔소리를 했다.

, 금방 엉망이 되었잖아. 물청소를 했는데 발자국 도장 천지네.

집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지. . 그렇게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가니까 집이 엉망이지.

혼자 떠드는 나를 개는 본 체도 않고 밥을 먹었다. 밥그릇까지 싹싹 핥아 먹고 나더니 그제야 고개를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개는 말간 눈동자를 굴리며 혀로 콧잔등을 핥았다.

내 집은 넓어서 나는 아예 신발을 벗고 살아요. 세상이 다 내 집인걸요. 꼭 잠자는 곳만이 내 집인가요. 밧줄에 묶여 있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신발을 벗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요?

개가 침묵으로 자기중심적인 나를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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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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