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맘만 믿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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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회

내가 알고 있는 새 중에는 부엉이가 제일 이른 봄에 알을 낳았어요. 봄눈이 하얗게 내린 산. 부엉이가 날아간 곳으로 다가가 보았지요. 흙에서 조금 돌출된 바위 위에만 눈이 쌓여 있지 않아 금방 눈에 들어왔지요. 집이래야 약간 움푹한 게 전부였는데, 그곳에 부엉이가 품고 있던 알이 있었어요. 부엉이 알은 따듯했어요. 부엉이는 수풀이 우거지기 전에 일찍 알을 낳았던 거지요. 그래야 새끼들에게 줄 먹이, 설치류나 몸집 작은 포유류를 많이 잡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친구들과 공동으로 그 부엉이 집을 맡았어요. 그때만 해도 봄이면 새집을 맡아놓던 시절이었죠. 어느 산 어디쯤 있는 무슨 나무에 무슨 새집을 맡아놓았다고 하면, 그 새집을 친구들은 서로 인정해줬지요. 그때 본 꾀꼬리 집과 비둘기 집은 다른 새집보다 더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비둘기들은 대부분 소나무에 집을 짓지요. 삭정이 몇 개 걸쳐놓은 비둘기 집은 짓다가 만 것처럼 엉성했어요. 꾀꼬리는 큰 참나무의 옆으로 길게 뻗은 가지에 집을 매달아 찾기도 접근하기도 힘들었지요. 양다리로 가는 가지를 감고 거꾸로 매달려야 다가갈 수 있었으니까요. 따가새(때까치), 꾀꼬리, 새매는 사나웠어요. 집에 접근하면 암수 두 마리가 양쪽에서 날아들며 날개로 어깨나 머리를 공격해왔지요. 그래서 가는 갈참나무 가지를 꺾어 등에 꽂고 올라갔지요. 그렇게 하면 새들이 등에 꽂은 나뭇가지만 치고 머리는 공격하지 않았으니까요. 새끼를 내려오거나 내려와도 될 만큼 적당히 컸나 보려고 나무에 오르내리며 새들을 심하게 괴롭혔던 거죠. 그때는 이상하게 별 죄의식도 못 느꼈지요. 왜 그렇게 새 새끼를 내려다가 힘들게 먹이 잡아주며 길렀는지 모르겠어요. 부엉이도 내려다가 길러보고 물총새까지 잡아보았지만 비둘기는 한 번도 못 잡아보았어요. 비둘기 알을 맡아놓고 이제 부화해 새끼 몸에 솜털이 났겠구나 하고 가보면 이미 새끼를 쳐 나간 후였으니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새끼를 빨리 쳐 나가 죄를 짓지 않게 해준 비둘기가 고맙기만 할 따름이지요. 비둘기가 젖을 먹여 새끼 가 빨리 성장했던 것은 아닐까도 싶네요.

내가 몸이 아파 약 먹을 때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네가 어려서 산짐승과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몸이 아픈 것 같다고. 그럴 때마다 산새 어미들 맘 아프게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몸이 아플 수도 있다고 수긍이 되더라고요.

 

어머니 묘 앞쪽으로 고가 길 떠받칠 다릿발이 여러 개 세워졌어요. 콘크리트 배합 공장도 생겼고요. 모래, 자갈, 시멘트를 배합하며 콘크리트 만드는 소리가 시끄러워서인지 새들이 잘 뵈지 않더라고요. 어머니 있는 곳에 인터체인지가 생긴다네요. 높은 다리 길이 과수원 앞을 돌아 넘나 봐요.

다리. 다리라 하면 물을 건넌다는 느낌이 강해, 허공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더라고요. 저 고가 다리는 농토를 건너고 그 아래 오가는 사람을 건너는 것이구나, 차가 사람을 건너가는 것이구나, 내 유년의 추억을 건너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봉분에서 꿀풀과 쑥을 뽑아내며 인터체인지에 대해 상념에 들기도 했었지요. 어머니와 나 사이의 인터체인지는 무엇이었을까, 삶과 죽음 길의 인터체인지는 무엇인가, 생성과 소멸의 인터체인지는 또 무엇인가 빠르게 질문들이 만들어지더라고요. 사랑과 그리움, 여한과 정리, 한 호흡지간이라는 사고력 얕은 단답을 해보았었지요. 그러고 나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어요.

어머니에게서 나에게로 건너온 것은 무엇이고 나에게서 어머니에게로 건너간 것들은 무엇일까. 어머니는 내 육체의 전생이고, 나는 어머니 육체의 내생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도 살아 있고 나도 살아 있다. 어머니가 죽어 나로 부활해 나는 어머니가 된 게 아닐까? ,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엉클어놓더라고요.

뽑은 풀들을 한쪽에 버리고 무덤 전체를 내려다보았지요. 그랬더니 머리 같은 봉분과 양팔 같은 봉분의 퇴성이, 한평생 산 세상에 절하고 있는 모습 같아 보였어요. 살아 있는 제게 먼저 절하고 있는 것도 같았지요. 저는 얼른 무릎을 꿇었지요. 내 손에 끊긴 쑥의 향이 코끝에 묻어났지요.

 

어머니 묘 밑, 형의 묘 앞에서 음복을 한 잔 했습니다. 어머니 잘 모시라는 부탁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고가 길 다릿발 사이로 펼쳐진 들판을 바라다보았지요. 농사꾼들이 곡식을 두고 하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고추가 한창 커야 할 시기에 가뭄이 들었는데 물을 제대로 못 줘 시원찮다는, 벼이삭 거름을 너무 적게 줘 소출이 줄었다는, 욕심이 과해 밑거름을 너무 많이 줘 잎만 성하고 고구마는 들지 않았다는 말도 그중에는 있었지요.

어머니도 우리들 생각하며 농사꾼처럼 복기를 했었잖아요. 큰애는 똑똑했는데 가르치지 못해, 작은애는 살림을 제대로 못 내줘 술에 타락되었고, 누이들은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내보내, 너는 제일 힘들 때라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잘 안 풀린 것을 모두 어머니 탓으로 돌렸지요. 늘 안타까워하던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니 자식 농사란 말에서 슬픈 냄새가 났어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놓고도 안타까운 게 부모 심정인가 봐요.

나는 밥 먹을 때 가끔 스티로폼 도시락이 떠올라요. 지퍼 달린 비닐 가방에 밥그릇을 담을 수 있는 스티로폼이 담겨 있던 보온 도시락 말이에요. 네모반듯한 양은 도시락과 스티로폼 도시락에 들어 있던 스테인리스 밥그릇은 보기에도 차이가 많이 났죠. 나는 잘사는 친구들보다 그 도시락을 먼저 가지고 다녔지요. 그 밥의 미지근한 온기는 지금도 식지 않고 손에 전해질 때가 있어요.

나는 내 맘만 믿고 열심히 살았는데 뭐, 제대로 해준 게 하나 없구나.”

메론 껍질처럼 튼 손으로 가슴을 잡고 말하던 어머니 모습 떠올라 가족묘 있는 곳에서 자리를 떴지요.

 

카네이션 꽃바구니에 신경 쓰다 보니 사촌형 차에서 가방을 깜박 잊고 내렸지 뭐예요. 나를 내려준 형은 과수원 아래 있는 가축우리로 내려갔고요. 가방 속에는 찬송가책이 들어 있었어요. 나는 교회도 안 다녔고 노래도 부를 줄 몰라,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던 찬송가를 읽어라도 드리려고 했는데.

고인이 제일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찬송가라고 하며, 장례예식장에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찬송을 부를 때, 따라 부르자 목이 메었지요. 눈이 심장보다 더 뜨거워졌고요.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를 달리는 차에서 보았어요. 십수 년 동안 어머니가 드렸을 간절한 기도가 교회에 꽉 차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어머니, 이제 나는 달이 떠도 마중도 못 나가겠네요.

어머니가 마중 나와 있던 달로 찾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항상 먼저 나와 계신 곳으로 제가 찾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걸요. 그렇게, 그렇게 그리움을 지워가며,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겠지요. 그래도 달로 마음 마중 나갈 수 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놓았나

 

맘 마중 나오는 달정거장

길이 있어

어머니도 혼자 살고 나도 혼자 산다

혼자 사는 달

시린 바다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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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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