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맘만 믿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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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회

집 근처에 라일락꽃 핀 골목길이 하나 있어요. ‘골목길 마중 나오 고 골목길 배웅 나오는 예의 바른 꽃이란 시구절이 며칠 전 그 골목길에서 떠오르는 거예요. 그 시구절로 시 한 편 써보려고 골목길을 몇 번 더 갔지요. 한번은 라일락 가지에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 있더라고요. 벽에 바짝 붙어 몸 숨기고 비둘기들을 관찰했지요. 라일락꽃에 모여든 벌들을 비둘기들이 잡으러 온 것 같았거든요. 알 낳을 때가 되어 단백질을 섭취하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새끼가 부화되어 먹이를 잡으러 온 걸까. 비둘기들이 뭔가를 먹는 것 같은데 안경을 안 쓰고 나와 자세히 볼 수 없었어요. 얼핏 보기에는 벌을 잡아먹는 것도 같았어요. 비둘기들이 화사하게 핀 꽃 위에서 벌들을 잡아먹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좀 잔인하다는 느낌이 왔어요. 그때 문득 라일락꽃 향기에 취해서, 환각상태의 힘 빌려 벌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에 비둘기들이 정말 벌을 잡아먹나 확인하려고 몇 번 안경을 쓰고 나갔지만 결국, 비둘 기들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런데요,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알아보니까요, 비둘기들은 평생 씨앗만 먹고 산대요. 새끼들에게는 깃털이 나기 시작할 무렵까지 젖을 먹인대요. 비둘기들은 암수 다 피전밀크pigeon’s milk라는, 두유 성분 비슷한 식물성 젖을 만드는데 새끼들이 어미 입속으로 부리를 집어넣어 먹는다 하네요. 비둘기들이, 예의 바른 라일락꽃 위에서 제정신엔 미안한지 꽃향기에 취해 새끼들 위해 벌을 잡는다고 썼더라면 큰 망신당할 뻔했지 뭐예요.

지금까지 내가 시 쓰며 사는 얘기를 해봤는데 어렵죠?

 

어머니, 그때 내가 몇 살이었나요? 젖 뗄 때 말입니다. 평소와 달리 빨간 어머니 젖을 물었다가, 써서 입 떼고 울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까징끼라는 약을 발랐던 것 같아요. 다 말린 담뱃잎을 골라 포장하는, 담배조리하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는 내 모습 보고 깔깔 웃던 소리도 들릴 듯하네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 보면 꽤 늦게까지 젖을 먹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어머니 등에 업혀 큰 물가를 지나는데 비가 내렸던 그 물가가 어디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갓난아기였던 네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며, 큰누이 데리러 제천 의림지를 지나는 거였다고 말해주었죠. 그때 어머니한테 궁금했던 것들을 다 물어볼 걸 그랬어요. , 나도. 물어보지 못해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것들이나 생각하고 참, 한심하지요.

이젠 043으로 시작하는 고향 쪽 전화번호가 찍혀도 크게 놀라지도 않는걸요. 왠지 아세요? 축이 없어진걸요. 운동기구 역기 아시죠. 손잡이 없는 역기를 한번 떠올려보세요. 그리움과 슬픔 두 바퀴가 아직 있기는 한데, 손잡이가 되는 축이 없어진 것 같아요. 허공을 움켜잡고 들었다 놓는 것처럼 허전하기만 해요. 이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두 바퀴만 덩그렇게 남았으니 말이죠. 이제 나는 죄를 짓지도 못하잖아요. 제일 큰 죄 지을 수 있던 대상이 없어졌으니까요. 팽팽하던 낙하산 줄 하나가 팅 끊어진 것도 같고 내 삶을 늘 달아주던 오래된 앉은뱅이저울이 고장 난 것도 같아요.

 

어머니가 누워 있는 그곳도 복숭아꽃은 벌써 피었다 졌겠지요. 복숭아꽃 필 무렵 찾아간다고 해놓고 또 약속을 어겼네요. 언제 철들지, 내 자신이 심히 미워지네요. 과수원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사촌형이 복숭아밭에 더 오래 머물죠. 아무래도 사촌형과 같이 오래 있으니까 덜 심심하겠네요. 평소에도, 그곳에서 기르고 있는 사슴 먹이 주러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형이 들른다고 해 그래도 맘이 조금 놓이기는 했어요. 어머니 누워 있는 그 너머에 우리 밭이 있어 오르내리던 옛일이 생각나요.

산길가에서 따 먹던 뱀딸기는 싱거웠고 옹달샘 가에 있던 찔레 숲찔렁(찔레순)은 상큼했었지요. 시엉(싱아)은 시고 서리 맞은 아그배는 달고 아버지가 구워주던 산마는 분이 났었지요. 옹달샘 아래 도랑에서 잡은 가재를 모닥불에 구우면 빨갛게 색이 변하던 것도 떠오르고요. 왜 이렇게 뭐, 먹던 일만 생각이 나죠?

먹는 것 외에 기억나는 게 있기는 한데 그건 내가 더 어렸을 때의 일이네요. 그곳 산에 불을 지르고 따비밭을 만들 때지요. 형과 누이도 일을 하고 어린 나는 다 만들어놓은 밭가에서 혼자 놀았지요. 그때 나는 무슨 조그만 항아리를 흙 속에서 파내며 놀았어요. 여린 손으로 흙을 파고 조심조심 꺼내도 항아리가 자꾸 폭삭폭삭 깨졌어요. 깨지지 않게 하나만이라도 꺼내보려고 무진 애를 썼었는데 끝내 온전하게는 하나도 못 캤었지요. 그게 무슨 항아리였는지 지금 도 궁금하네요. 또 어머니가 똬리 끈을 입에 물고 그 위에 얹은 대 광주리에 밥 내오던 풍경도 떠오르고요.

 

어머니, ‘마이라는 옷 알아요. 모르시죠. 편한 양복 같은 거예요. 양복이라고 봐도 돼요. 내일모레 내가 그 마이 입고 찾아갈게요. 결혼식장에서 축시 읽어줬더니 고맙다고, 이곳 강화도에 사는 잘 아는 이가 좋은 걸로 사줬어요. 그날 신부는 우리 함씨였어요. 하여간요, 비싼 거예요.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내가 영정 앞에 서서 환하게 웃는 모습 보셨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전에 명절날 고향에 가면 네 친구 누구는 양복을 쫙 빼입고 왔다고 하시며 부러워하셨잖아요. 그런데 살아생전에 양복 입은 모습 한 번 보여드리지 못한 일이 생각나서였어요. 상조회에서 빌려 입은 양복이었는데요, 그 모습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문상객 없는 새벽에 제가 어머니 앞에 서서 기왕이면 웃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환하게 웃었던 거예요. 머리가 좀 희끗희끗해서 그렇지, 근사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볼 만은 했지요?

내일모레 카네이션이라는 꽃도 사가지고 찾아뵐게요. 꽃을 사들고 찾아뵙는 것도 난생처음이네요. 꽃을 달아드릴 기회가 있기는 있었는데 그때는 산속에서 형과 돼지 기르며 살 때라 조카들이 달아드렸고 상계동 살 때는 누이가 달아드렸었지요.

어머니, 그런데 어머니 앞에는 왜 이렇게 난생처음인 것들이 많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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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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