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양화대교-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혹은, 이상한 공무도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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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회

십이 년 전이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배경지 근처인 양화대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의 일은 현실이 아닌 꿈만 같기도 하다.

 

무엇이 그리 막막했던가. 나는 차라리 끝내자는 결심을 했다. 신촌로터리에서 한강을 향해 무조건 걸었다. 삼십육 년간 이어온 호흡의 길이를 물리적으로 이어보니 짧지만은 않았다. 걸음을 내딛었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러 호출기에 녹음되어 있는 음성들과 호출번호를 지웠다(내 다시는 지상의 호출에 응하지 않으리라).

죽음 이후, 괜한 오해로 내 죽음이 잘못 해석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내 죽음을 지키려는 나의 의지에 손목을 잠시 잡아주었다.

죄송합니다. 막상 죽음을 기정사실화시키자,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맘은 뭉뚱그려져 짧게 정리되었다. 죽어버릴까 망설일 때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컸다. 그건 나만의 특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사소한 것들이 떠올랐다. 가령, 돈도 없는 친구에게 빌린 돈 십만 원, 누구누구는 참 잘해줬는데 밥 한 끼 못 샀네, 같은 것들이.

 

지인처럼 이정표들이 나타났다. 천천히 걸었다. 워낙 단호하게 맘을 먹어서인지 맘에 흔들림이 없었다.

양화대교가 나타나자 무슨 큰일을 이뤄낸 것 같은 맘이 들고 맘 한쪽이 이완되며 편안해짐을 느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

어딜 가냐고!

죽으러 왔는데요.

잡아.

다리 입구에서 날렵하게 생긴 사내 둘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 직업이 뭐야?

직업은 없고 그냥 글 쓰며 살아왔어요.

예술가를 다 잡아보네.

, 너 기왕 죽을 거면 우릴 위해 사람 한 명만 죽여주고 죽으면 안 되냐?

싫어요. 곧 죽을 사람이 왜 죄를 짓고 죽어요.

그렇게 부정적으로 듣지 말고 우릴 위해 좋은 일 한 번 해주고 죽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사람을 죽일 만큼 배짱이 있었으면 내가 왜 죽으러 왔겠어요. 살지요.

 

사내들에 의해 내 죽음이 잠시 지연되고 있을 뿐, 사내들은 겁나지 않았다.

, 가게 내버려둬요.

그런데, 이 새끼 되게 이상하네. 너는 왜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기분 나쁘게. 우리가 분명, 너보다 어려 보이잖아.

그렇게 살아온 걸 어떡해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떻게 반말을 해요.

지랄하네. 너 반말 한 번만 하면 살려줄게.

싫어요. 전 살기 싫어 죽으러 온 건데요.

이 새끼, 말 안 되니까 그냥 저 아래로 끌고 가.

그렇게 말을 맺은, 사내 둘 중 우두머리 같은 친구가 어둠 뒤쪽으로 사라졌을 때다.

당신 진짜 죽어. 내 말만 들어. 내가 뛰자고 그럴 때 뛰어. 잡히면 진짜 죽는단 말이여.

낮게 속삭이던 사내가 내 손목을 낚아채고 강변로 갓길을 내달렸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뛰었다. 뛰어서는 안 되는데 생각하며. 그 사내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나를 위한 마음만을 위하여 따라 뛰었다. 결단코 내가 살려고 뛰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등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는가 싶었고 나는 목덜미를 세차게 얻어맞으며 나가떨어졌다.

너 이 새끼, 차렷해. 너 얘 데리고 저 아래로 내려가라고 했는데. , 도망을 쳐.

나는 처박힌 상태에서 멍한 눈을 들었다. 사내 하나가 사내 하나를 주먹과 발로 가격했다. 동작이 날렵했다.

그냥 살려주고 싶었어요. 이상하게.

한참 후에야 구타가 멎었다. 때린 사내가 맞은 사내의 어깨를 부축하고 널브러져 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곧 죽을 거였으므로 통증도 느낄 수 없었다.

얘가 너를 살리고 싶단다. 씨팔.

너도 살고 싶냐?

안 돼요. 난 죽어야 돼요.

아저씨, 제발 반말 한 번만 해봐라. 살려준대잖아.

싫어요. 내가 뭐가 무서워서요.

, 너도 무릎 꿇어. 우리가 이렇게 빌게.

제발 반말 한 번만 해줘라.

싫어요. 난 죽을 건데요, . 세상 살면서 지킨 것도 없는데, 그거라도 지켜야지요, .

안 되겠다. 그냥 내버려두면 죽겠다. 살려주자. 너 가서 차 잡아.

안 돼요. 나는 저기 다리까지만 가면 돼요.

한참의 실랑이질 끝에 차가 한 대 섰다.

아저씨 이 사람 내리면 죽으니까 시내 한복판에 내려주세요. ! 사내들이 선불로 돈을 지불하고 나는 신촌 로터리에서 내렸다.

 

그날

나는 신촌 연립주택 골목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고,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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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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