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선생님, 멀리 날다

페이스북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블로그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링크 복사하기

19 회

화창한 날씨다.

학교 운동장을 대각으로 가로지른 백 미터 직선과 둥그렇게 그려놓은 이백 미터 곡선이 선명하다. 명지바람에 백회 가루가 살포시 날아오르기도 한다. 백회 가루 냄새에 학동들의 발뒤꿈치가 가볍게 들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맘도 시나브로 흥분된다. 운동복 입은 고학년들이 조별로 운동장을 이동한다. 여기저기서 선생님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출발신호를 알리며 휙, 아래로 내리는 깃발 소리도 들린다. 결승선에서 학동들이 맞잡고 있는 흰 광목 줄이 팽팽하다. 학교 건물 중앙에 게양된 태극기가 간간이 노래처럼 펄럭인다

오늘은 군 대항 체육대회에 나갈 육상선수들을 선발하는 날이다. 결승 테이프 가슴에 휘감은 학동이, 달려온 여력에 결승선을 한참 지나서야 멈춰 선다. 좋은 기록이 나왔는지 스톱워치를 얼굴 높이로 들고 웃는 선생님의 배후에서 물오른 능수버들이 차르륵차르륵 흔들린다.

교실 앞 화단과 울타리에서는 봄꽃들의 계주 경기가 한창이다. 노란 개나리꽃은 민들레꽃에게 배턴을 넘겼고 개복숭아꽃은 붉은 진달래의 배턴을 넘겨받았다. 키 작은 자주색 금강제비꽃은 배턴 넘길 다음 주자를 찾지 못해 어리둥절 피어 있다.

싱싱하고 푸른 기운 가득한 교정에 햇살이 조밀하게 쏟아진다. 운동장 한 모퉁이에 몰려 있던, 물고기 비늘 같은 벚꽃잎이 약한 회오리바람을 타고 둥글게 날아오르다 산개한다. 작은 구름 그림자가 운동장 쓸며 지나가자 한 학동이 하늘을 바라본다. 그 주위에 있던 학동들도 덩달아 바라다보며 눈을 찡그린다.

학교 운동장에 뚱뚱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난다. 그림자의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진다.

 

교장선생님 오신다!

각 학년과 선생님들을 배려한 것일까? 칠 단계로 이어진 철봉 앞 쪽에서 학동이 외친다. 고무래로 모래밭 평평하게 고르고 있던 남 선생님과 줄자 감고 있던 여선생님의 시선이 교장선생님을 향한다. 멀리뛰기장으로 다가온 교장선생님이 기록이 제일 좋은 학동을 불러오라 한다. 백 미터 달리기 하려고 대기하고 있던 학동 한 명이 달려온다.

교장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불려 온 학동이 구름판 뒤쪽으로 물러서며 멀리뛰기 자세를 취한다. 학동이 모래밭을 향해 힘껏 달려온다. 교장선생님은 허리 굽히고 양손으로 무릎 짚은 채, 달려오는 학동의 동작을 뚫어져라 읽는다. 학동이 구름판 차고 솟아오를 때 교장 선생님도 반사적으로 한쪽 다리 들었다 놓으며 허공을 찬다. 모래사장 양옆에 서 있던 학동들이 와! 하고 함성을 터뜨린다. 남 선생님은 줄자를 구름판에 대고 여 선생님은 뒷걸음쳐 학동의 착지점에 갖다 댄다. 손톱에 선홍빛 물이 들 정도로 줄자를 꼭 잡은 여선생님의 표정이 밝아진다. 아까보다 이십오 센티미터 더 뛰었다는 여선생님의 격앙된 목소리에 학동들이 탄성을 지른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며 빙그레 웃는 학동에게 교장선생님이 다가간다. 어깨를 툭툭 쳐주며 학동을 칭찬한다. 교장선생님은 하나, , 셋 손가락 펼치며 학동의 자세에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한다. 학동이 자세만 고치면 더 좋은 기록 낼 수 있다고 말하며 힘차게 악수를 나눈다. 악수 풀며 파이팅을 외친다.

교장선생님이 캐주얼 양복 윗도리를 벗는다. 얼른 여선생님이 받아 든다. 몸소 시범을 보일 태세다. 교장선생님은 왕년에 좀 뛰었었다고 하며 구두도 벗는다. 바짓가랑이를 착착 접어 양말 속에 집어넣는다. 그 모습을 보고 학동들이 다시 박수를 보낸다. 양팔 돌려 어깨를 풀고 발뒤꿈치 들어 발목을 푼다.

구름판을 향해 교장선생님이 달려온다. 학동들이 와! ! 하고 함성을 지른다. 겅중겅중 뛰어오며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학동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인다. 교장선생님은 구름판에서 가볍게 뛰어오르는 포즈만 잡아본다.

그런 다음 구름판부터 걸음을 세며 다시 도움닫기 출발점에 가 선다. 교장 선생님의 철저한 준비 자세에 감명 받은 학동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이에 답하여 교장선생님도 박수를 친다. 박수 치던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박자에 맞게 박수를 유도한다. 마치 티브이에서 멀리뛰기나 높이뛰기 선수가 보여주던 동작을 보는 듯하다. 다리에 힘을 빼고 몇 번 사뿐사뿐 제자리 뛰기를 반복한다. 준비가 다 된 듯 상체를 뒤로 젖히며 크게 호흡 들이마신 교장선생님이 힘차게 출발한다. 교장 선생님의 발놀림 속도에 맞춰 학동들의 박수 소리가 빨라진다.

교장 선생님의 몸속에 분산되어 있던 힘들이 출렁출렁 자유로워졌다가 강하게 휘젓는 발과 다리로 이동한다. 구름판에 가까워지며 다리와 팔에 모였던 힘 중 일부가 복근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붉게 상기되던 교장선생님의 얼굴이 붉음을 넘어 하얗게 변한다. 구름판에 다다라 도약하는 순간 힘은 급히 오른쪽 발끝과 뒤로 젖혀진 양 손 끝을 향한다. 학동들의 함성 소리와 박수 소리도 점층법처럼 커지다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교장 선생님이 날아오른다.

허공에서 뒤로 젖혔던 상체를 앞으로 튕겨 접으며 교장선생님이 뚝, 떨어진다. 달려온 속도에 비해 건너뛴 모래판의 거리가 짧다.

 

모래판에 착지한 교장 선생님이 쪼그려 앉은 채 일어서지 않는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챈 학동의 눈빛 하나가 불안해진다. 불안한 눈빛이 빠르게 옮아가고 여선생님이 손에서 줄자를 놓친다. 남 선생님이 다가가 어깨를 짚는 순간 힘없이 푹 쓰러진다. 놀란 아이들이 다른 곳에 있는 선생님들을 부르러 내달린다. 남 선생님이 교장선생님을 모래밭에 눕힌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마사지한다. 앰뷸런스 소리가 들린다.

학동들 위해 최선을 다했던 교장선생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있는 힘을 다했던 것이다. 학동들 위해 살아온 날들을 발바닥에 집약해 마지막 족적 남기고 날아올랐던 것이다.

학동들을 사랑하는 만큼 높이, 멀리 날아오른 그가 세운 기록은 영원할 것이다. 그가 날아 뛴 거리는 줄자로 잴 수 없다. 단지 마음의 자로만 그의 사랑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학동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 있는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까지, 멀리 뛴 그의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 위의 글은 한 지인의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상상들입니다. 이 글이 고인에게 누를 끼쳤다면 용서바랍니다

잘 알고 있는 훌륭한 교장선생님이 계셨는데요, 학생들에게 멀리뛰기 시범을 보여주시다 돌아가셨어요. 멀리 뛴 그 자리에서. 참 성실하고 열심이셨는데.’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

우리 현대문학 회원에게 무차별적으로 보내지는 타사의 메일을 차단하기 위해,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008년 2월 19일]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