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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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회

“종교인들이 경전 구절을 인용하며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시를 공부하니까 시로 말해보면 어떨까?”
눈빛이 깊은 복학생 이규도의 제안이었다. 문청 시절에 접어든 치기 어린 우리들이 좋다고 답했다.
“거울 속의 나는 왼술잡이요.”
이상의 시구절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요”를 패러디하며 내가 막걸리 잔을 들었다. 그러자 우리들 중 하나가, 사람들 마음을 빗질하며 내리는 빗줄기처럼 “오늘 나는 나의 젊음을 빗질하고 싶다”고 김광규 시인의 시구절로 받았다.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는 연변 시인의 시구절을 내가 다시 읊었다. 그리고 양팔을 가슴에 접은 채 한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이어 몸을 뒤로 젖히며 건배 하고 외쳤다. 웃음이 이어지고 시구절이 이어진 술 취한 청춘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주고받은 시구절들이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억을 지우며 세월이 흘러 희미해진 친구들 얼굴처럼. 해서, 까마득한 그날의 지하촌이 더 그립다.

지하촌. 지하촌은 명동성당 앞 골목에 있던 막걸리집 이름이다. 출입문 열고 들어서면 바로 주방이 나타났다. 주방은 통로를 겸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탁자 하나가 있었다. 그 외 튀김 조리대와 냉장고 한 대가 시설의 전부인 허름한 곳이었다. 채 두 평이 될까 말까 하는 주방에서 지하로 급하게 경사진 계단이 연결되어 있었다. 머리 수그리고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탁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막 내려선 우측에 문 없는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다. 말이 방이고 장판이 깔려 방이지, 그곳은 마루와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앉은뱅이술상이 하나 놓여 있어, 편히 앉아서 술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방이 있어 지하촌은 방석집이라 격상되어 불리기도 했다.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주머니 사정 때문에 지하촌을 선호했다. 서너 명이 단돈 오천 원만 가지고 술 마실 수 있는 곳이 학교 주변이나 명동 쪽에는 거의 없었다. 저렴한 가격 다음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지하촌의 매력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학생들 술자리와 운동권 노래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또 노래를 부르면 옆 좌석에서도 따라 부르면 불렀지, 노래 부른다고 탓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야유와 눈총을 보내는, 사회과학적 분위기가 지배하는 시절이었다. 늦깎이 학생이 된 나는 지하촌에서 운동권 노래를 처음 접했고 배웠다. 막 고등학교 졸업한 어린 친구들이 운동권 노래를 잘 불러 놀라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지하촌에 오는 손님들은 우리 문창과 학생들과 명동성당 청년회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명동성당 청년회 사람들과는 반군부독재라는 정서가 서로 통해 합석을 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지하촌에서 낭만적인 시만 읊으며 술을 먹지는 않았다. 사회와 문학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 토론했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번은 셋이서 박관현 열사 영정을 놓고 약식으로 추모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매우 엄숙했고 술을 자제했다. 어떤 날은 시위 중 몸에 밴 최루탄 냄새를 풍기며 막걸리 한 잔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지하촌에서 격론도 많이 벌였고 노래도 참 많이 불렀다.
지하촌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맘이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계란말이나 두부김치 하나 시켜놓고 계속 파인애플(단무지)만 달라며 오랫동안 술을 먹어도 크게 역정 내지 않았다. 우리들 언성이 높아지면 주인아저씨가 좀 조용히 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그러다가 더는 못 참을 정도가 되면, 아저씨는 계단으로 된 통로에 프라이팬을 내리고 숟가락으로 두들겨댔다. 프라이팬 소리가 나면 우리는 알아서 언성을 낮추곤 했다.
가끔 돈이 없다고 솔직히 말하고 술과 파인애플만 시키면 계란말이 하나를 공짜로 주기도 했다. 그런 아저씨에게 미안한 맘이 들어, 젊은 강사 선생님을 데려와 바가지 씌우기도 했다.
술추렴을 해도 술값이 모자라거나, 돈 없이 술을 시작했을 땐 ‘전화위복’을 시도했다. 전화위복은 전화를 걸어 어려운 상황을 모면한다는, 우리들이 만든 말놀이다. 나도 사회생활 하는 친구들을 몇 번 불렀는데, 친구들이 술값을 치르며 돈 오천 원도 없어 불렀냐며 어이없어 하기도 했다. 친구와도 전화 연결이 안 되어 술값을 구할 수 없을 땐 아저씨에게 사정을 했다. 그러면 아저씨는 내 사정 좀 봐달라고 하면서도, 우리들 외상 부탁을 들어주는 여린 맘의 소유자였다. 간간이 옛날이 그리운지 지하촌을 찾아오는 졸업 선배들한테 공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선배들한테 감화를 받아서였을까. 나는 지하촌에서 두 손으로 술 따르는 후배에게 신성한 밥도 한 손으로 먹으면서 뭔 두 손이냐며 편안한 자리를 만들려고 노력도 했다.

지하촌이 문을 닫는다고 했다. 외상값 있는 사람들의 협조 간곡히 바란다는 주인아저씨의 말을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왜 갑자기 문을 닫느냐고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들이 만날 안주는 안 시키고 파인애플만 시켜 문을 닫는다고 아저씨가 말했다고 했다.
지하촌을 찾아갔다. 닫힌 문에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다음 날 마지막으로 문을 여니, 꼭 와 외상값을 갚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외상값 갚는 일도 걱정이었지만 당장 어디서 독서토론 소모임을 가질지 걱정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자유스럽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섭섭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담배를 피우며 시도 쓰고 과제도 했었는데…….
다음 날 외상값 갚을 돈을 구해 지하촌을 향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명동 거리에 각양각색의 우산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가판대에서 파인애플 세 개를 샀다. 파인애플을 사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진짜 파인애플은 묵직했다.
아저씨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며 비닐봉지에 든 파인애플을 내밀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저씨는 내게 주방에 놓인 탁자에 앉으라고 하더니, 막걸리 한 잔을 따라주었다. 나는 막걸리 잔을 들고 불 꺼진 지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들이 서로의 시를 비평하거나 시국을 걱정하며 격론 벌이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격앙된 감정 실린 노랫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저씨가 술을 한 잔 더 따라주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툭쳤다.
“야, 이사 가는 데는 지하가 아니라 이 층이다, 파인애플은 없고. 그래도 한번 놀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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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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